아스팔트 우파 단절 주도 등 지지율 견인…임기 연장 가능성 ‘솔솔’ 킹메이커로 나설까
우여곡절 끝에 ‘김종인 비대위’가 출범한 직후 정치권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런 목소리는 이제 듣기 힘들다. 미래통합당 지지율이 쑥쑥 오르면서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더불어민주당까지 제쳤다는 여론조사결과까지 나오자 김종인 위원장을 바라보는 시각은 달라졌다. 도저히 성적이 오르지 않을 것 같던 통합당을 우등생으로 바꿔놓으면서 김 위원장은 이제 당 내에서 ‘1타 강사’로 불린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8월 2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날 한번 믿어봐”
김종인 위원장을 만나본 통합당 의원들은 지식이 경험과 결합될 때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다는 것을 요즘 느낀다고 입을 모은다. 김 위원장이 보수정당으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수준의 깜짝 놀랄 진보적 의제를 던지는데, 그것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공부에다 경험까지 가미된, 즉 가치와 실행력이 함께 담보됐다는 의미다.
미래통합당은 최근 선을 보인 새 정강정책 첫 조항에 기본소득을 명시했다. 김 위원장이 당에 오자마자 계속해서 주장해온 기본소득 도입을 명문화한 것이다. 김 위원장은 혼자 잘 사는 시대는 지났으며 어울려 잘 사는 시대로 가야 한다는 입장을 천명해왔다. ‘약자와의 동행’을 실현한 김 위원장 작품이 기본소득이다. 이런 연장선에서 김 위원장은 ‘순리(順理)대로’를 강조한다. 뭔가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바로 지금 줘야 하는 것이 순리이고, 이 순리를 따르는 것이 정치라는 의미다. 무턱대고 자유를 얘기할 것이 아니라 밥 먹을 자유, 빵 먹을 자유부터 줘야 한다고 김 위원장은 주장한다.
최근 집중호우에 따른 전국적 피해가 이어지자 4차 추경 편성을 요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보수정당이 간판으로 내세워온 ‘작은 정부’ ‘재정 건전성’도 어려운 시기가 닥치면 과감히 접어두고 시대가 원하는 정책을 과감히 도입해야 한다는 게 김 위원장 생각이다.
그는 정부여당의 정책을 반박하고 비판할 때도 ‘무기’를 들고 나온다. 빈손으로 나와 우격다짐으로 공격하는 게 아닌, 국민들에게 ‘설득 권력·대안 세력’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김 위원장은 문재인 정부 부동산 정책에 대해 비판하면서 아파트 후분양제 전면 도입 등의 대안을 제시한 바 있다. 김 위원장은 최근 기자들과 만나 세금을 올려 부동산 가격을 잡으려 하는 문재인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소개했다.
“내가 노태우 정부 때 보건사회부 장관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부동산 가격 상승을 잡겠다며 토지초과이득세 등 여러 규제 정책이 도입됐어. 나는 정부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반대를 했지. 실효성 없는 제도이고 위헌 소지 등 문제가 더 많다고 말이야. 그런데 밀어붙이더라고. 결과는? 물론 내 예상이 맞았지. 위헌 판결이 나고 제도가 오래 가지 못했지. 부동산을 세금으로 잡는다고? 세금 정책을 쓰면 가난한 사람만 더 힘들어져. 세금은 국가 재정수입 확보원이지, 정부가 원하는 특정 정책의 수단으로 남용해선 안 돼.”
김 위원장은 세종시의 완전한 행정수도화 방안이 과거 박정희 정부 계획과도 맞닿아있다는 민주당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그는 기자들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계획이라고 역사적 정당성을 자꾸 끌어오는데 그 시대 상황을 잘 봐야해. 박 전 대통령은 1970년대 후반 당시 카터 미국 대통령이 미군 철수를 한다고 하니까 북한의 남침에 대비해 수도권 방어 전략을 짜는 차원에서 행정수도 이전 계획을 만든 것”이라면서 “그런데 카터는 미군 철수를 포기했어. 당연히 행정수도 계획도 끝났지. 수도 이전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세계적으로 성공 사례가 없어. 산업 재배치를 통해 기업 분산을 가져오는 계획부터 만들어야 해”라고 했다.
#“대충 하면 공부 못한다”
여당과의 원 구성 협상 과정에서 제1야당이 맡아오는 것이 관례였던 법사위원장 자리를 여당이 양보해주지 않자 “민주당 너희들끼리 다해”라며 상임위원장 자리 모두를 던져버린 것은 김 위원장 최종 판단이라는 게 중론이다. 대충 타협하느니 깨끗하게 빈털터리로 가면서 제대로 된 길을 걷자는 것이었다. 판판이 여당에 깨지고 밀리자 당 내에서 불만도 제기됐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공이었다. 이 부분에서는 운도 따라줬다. 국회 운영을 사실상 독점한 여당이 입법 과속을 하면서 여론의 십자포화를 받았다.
김 위원장은 급하다고 해서, 수가 부족하다고 해서, 통합당의 새로운 가치를 세우는 일보다 세 불리는 작업에 집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탈당한 전현직 의원의 복당 가능성에 대해 선을 긋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무소속 의원들의 복당 가능성에 대해 “아직 거론할 시기가 아니다. 내 임기 내에 복당?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 복당을 서두르고 싶지 않다는 것을 넘어 복당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확대해석이 가능했다. 김 위원장은 홍준표 의원 등이 복당한다 해도 플러스는커녕, 마이너스 효과가 더 크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김 위원장이 독단적 당 운영을 한다는 지적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복당을 반대하는 것이 자신의 당 장악력을 위한 포석은 아니라는 게 당 구성원들의 한목소리다. 민주당에서 과거 김 위원장과 함께 호흡을 맞춰본 경험이 있는 한 전직 의원은 “김 위원장과 1시간 이상 독대를 하면서 토론을 해본 적도 있다. 김 위원장은 지시를 내린 뒤 그에 대해 반론하는 사람의 말을 곰곰이 듣는다. 그리고 맞는 말이면 수긍을 한다. 가치를 정립해놓고 그 가치에 맞는 일을 보고 가는 사람이지, 사람을 보고 가는 사람은 아니다. 내가 본 김종인은 그 부분에서는 확실한 사람”이라고 했다.
‘아스팔트 우파’와의 단절도 김 위원장 결심이었다. 장외집회를 하면 정부에 대한 압박효과가 더 클 것이라는 당내 의견도 있었지만 김 위원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통합당 한 초선 의원은 “올해도 광복절 장외투쟁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광화문 집회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김 위원장의 입장이 워낙 단호했다. 우리 당이 올해도 예전 같은 행동을 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정말 아찔하다”고 했다.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8월 19일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무릎을 꿇고 참배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앞을 봐야 안 엎어져”
김 위원장은 오답 노트를 들고 있어야 다음 시험에서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가 요즘 ‘과거 잘못 바로잡기’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도 이 맥락에서 읽힌다. 과거를 바로 잡아야 앞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8월 20일자 상당수 조간신문 1면에는 김 위원장이 무릎을 꿇은 장면이 톱사진으로 실렸다. 김종인이 무릎을 꿇었다는 내용이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도 최상위권에 올랐다. 김 위원장은 8월 19일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5·18 민주 영령과 광주 시민 앞에 이렇게 용서를 구한다”고 사과한 뒤 추모탑에 헌화하고 15초가량 무릎 꿇고 묵념했다. 80세의 고령인 그는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일어나면서 심하게 휘청거리기도 했다. 이 장면에서 많은 이들이 “고령의 나이에…. 감동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김 위원장 일행은 이날 광주 시민들로부터 대체로 환영받았다.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 소속 20여 명이 팻말을 들고 따라다니며 “망언 의원 3명부터 제명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친 것 외에는 별다른 항의가 없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이용섭 광주시장도 “김 위원장께서 5월 영령들과 광주시민들께 사죄해주셔서 우리를 뭉클하게 만들었다”고 감사를 표했다.
통합당 내부 평가도 좋다. 통합당의 내부 결속력을 키우는 계기가 된 것이다. 김 위원장 체제 출범 때부터 김 위원장을 비판하며 각을 세우던 3선 장제원 의원도 8월 19일 페이스북 글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김 위원장의 광주 방문과 사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김 위원장은 당 지지율이 가시적으로 상승하자 쾌도난마식의 과거 절연 행보를 보이고 있다. 8월 18일엔 보수 텃밭 대구를 찾아 박근혜 전 대통령을 향해서 직격탄을 날렸다. 김 위원장은 이날 대구시당에서 연 지방의회 의원 온라인 연수 강연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은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 국민에게 한 약속을 당선된 후 글자 하나 남기지 않고 지우는 우를 범했다. 그렇게 시작한 정권이란 건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왜 우리가 탄핵이라는 사태를 맞이하게 됐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김 위원장이 박 전 대통령을 비판했지만 조원진 우리공화당 대표가 이에 반박하는 입장을 언론에 밝혔을 뿐 대구·경북(TK) 정치권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김 위원장의 말이 먹히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이런 가운데 통합당 일각에서는 내년 4월 7일까지인 김 위원장 임기를 연장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서서히 나오고 있다. 김 위원장이 내년 4월 재보궐 선거 이후에도 일정 기간 당을 이끌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김 위원장이 대선 후보를 만드는 확실한 킹메이커가 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강민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