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 휴가 복귀 날 급성 조울증 증상…국방부 순직 결정에도 보훈대상자 안 돼
이 씨는 곧장 아내 김태숙 씨에게 다급히 연락했다. “기운이가 이상하다.” 이 씨와 김 씨는 아들 이기운 병장에게 필사적으로 전화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어떤 일도 있어선 안 됐다. 2007년 11월 28일, 그날은 아들이 말년 휴가 복귀 날이었다. 딱 일주일 뒤 전역하는 아들이 갑자기 왜 이럴까. 더구나 그날은 아빠 이 씨의 생일이었다. 속 한 번 썩이는 일이 없던 아들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아빠와 엄마는 불안에 떨며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다.
해병대 1011기 이기운 병장은 전역 일주일 앞두고 죽음을 맞았다. 말년 휴가 복귀 날 이 병장은 급성 조울증 증상을 보였다. 사진=박은숙 기자
“엄마, 나 믿제?” 수십 통 전화 끝에 엄마 전화를 받은 아들은 여전히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쉬지 않고 들렸다. 아들은 어디론가 달리고 있었다. “기운아, 오늘 복귀 날이잖아 집에 들어와야지 뭐 하고 있어.” 엄마 김 씨는 걱정되는 마음에 터져 나오는 눈물을 감추며 말했다. “엄마, 나 믿제?” 아들은 재차 물었다.
“그럼 엄만 기운이 믿지.”
“그래, 엄마 나 믿어라.”
그게 마지막이었다. 이기운 병장은 2007년 11월 28일 오전 10시 30분 대구의 한 빌라 4층과 5층 중간 난간에서 추락했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두 시간여 뒤인 오후 12시 34분 두개골 골절 및 폐 좌상으로 사망했다.
황망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말년 휴가를 나와 집에서 좋아하던 돼지불고기를 먹던 아들이었다. 3개월 전부터 잠을 잘 못 잔다는 말은 했지만, 평소와 다른 구석을 찾을 순 없었다. 키 179cm, 몸도 마음도 건강하던 아들이었다. 병원이라곤 맹장 수술할 때 말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대학교 테니스 동아리 행사에서 사회를 볼 정도로 활달했다. 이번 휴가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들은 대학교를 찾아 동아리 선후배와 테니스를 치고 편의점에서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군 조사 결과는 황당했다. 당시 해병 2사단 헌병대는 이 병장이 자신의 신변을 비관해 스스로 몸을 던졌다고 판단했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섬유공장이 부도나면서 유복한 환경이 파괴됐고, 전역 후 진로 고민에 따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했다는 설명이었다. 부대 안에서 구타나 가혹행위는 없었다고 결론지었다.
“당연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때 전화 목소리가 딱 들어도 제정신이 아니더라고요. 왜 그랬을까. 분명 무슨 일이 있었을 건데, 일반 형사 사건도 아니고 군에서 그렇게 결론을 지으니까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더라고요. 사업이 잘 안 된 건 2003년이었어요. 애가 입대한 건 2005년이었고요. 그것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아빠 이수동 씨)
아빠 이 씨와 엄마 김 씨는 아들에게 조울증이 발현했다는 사실을 아들이 떠나고 11년이 지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2018년 국방부 민조단이 사건을 재조사하면서 밝혀내면서다. 그전까진 어떤 이유가 있었으리라 짐작하며 냉가슴 안고 살아갈 뿐이었다. 사진=박은숙 기자
사건 당일 이 병장이 아빠와 엄마뿐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 보인 행동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이 병장은 사귀던 여자친구에게 무릎을 꿇고 “정말 하느님이 있는 것 같다. 하느님이 사람을 왜 사랑하게 만들었는지 알게 됐다. 사랑을 알게 해줘서 고맙다”고 말하거나 동아리 친구에게 “뭘 해줄까? 부탁 하나만 해봐라. 내가 다 해줄게”라고 말하는 등 평소와 다른 언행을 보였다.
이 병장은 교회를 다니지도 않았다. 빌라 관리인을 붙잡곤 “교회를 다니십니까?”라고 세 번이나 소리치기도 했고, 슬레이트로 된 5층 건물의 지붕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빌라 관리인의 증언에 따르면 이 병장은 누군가에게 쫓기듯 다급하게 달아나고 있었다. 이 병장은 누구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걸까.
‘조증삽화가 동반된 양극성 장애’ 증상이었다. 흥분 상태의 조울증이었다. 이 사건을 재조사한 국방부 전사망민원조사단(민조단)도, 보훈보상을 거부한 보훈처도, 부대 책임이 없다고 판단한 법원도 이 병장에게 조울증 증상이 나타났다고 판단했다.
급성이었다. 이 병장은 휴가 기간에 복귀 때 후임들에게 줄 선물과 아빠에게 줄 생일 케이크까지 샀었다. 유서를 남기지도 않았다. 쌓였던 스트레스가 복귀를 앞두고 갑자기 폭발한 셈이다. 이 병장의 사후 정신 감정을 맡은 전문의도 “오랜 기간 자살 충동을 느끼고 억제했다기보다는 순간적인 충동 혹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자살을 실행했을 가능성이 더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빠 이 씨와 엄마 김 씨는 아들에게 조울증이 발현했다는 사실을 아들이 떠나고 11년이 지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2018년 국방부 민조단이 사건을 재조사하면서 밝혀내면서다. 그전까진 어떤 이유가 있었으리라 짐작하며 냉가슴 안고 살아갈 뿐이었다.
“아직도 기운이가 ‘엄마’ 부르면서 문을 열고 들어올 거 같아요. 그래서 그때 이후로 항상 거실 불을 켜두고 자요. 밥을 먹다가도, 아들 저렇게 됐는데 내가 밥을 먹고 있는 자체가 죄스러워요. 따라 죽으려고도 했어요. 근데 딸들이 ‘엄마 우린 자식 아니가’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버텼는데, 아직도 하루하루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에요.” (엄마 김태숙 씨)
엄마 김태숙 씨는 1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들이 군에서 쓰던 소지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어쩌다가 이 병장에겐 조울증이 찾아온 걸까. 민조단은 재조사를 통해 초기 군의 조사 결과를 뒤엎고, 부대 안 구타와 가혹행위가 빈번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특히 화기중대 90mm 소대였던 이 병장이 이등병과 일병 시절 전방에 배치돼 타 부대에서 더부살이를 할 때가 있었는데, 당시 구타와 ‘갈굼’이 심했다.
기수를 중요시하는 해병대 문화 탓에 이 병장은 타 부대 선임에게도 구타나 갈굼을 당했다. 당시 부대원들은 “막 패는 식은 아니지만 뺨을 때리는 식의 구타를 많이 당했다”며 “인격 모독적인 폭언, 욕설을 자주 들어서 이 병장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증언했다.
이 병장은 계급이 쌓이면서 구타와 갈굼에서 벗어났지만 지속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분대장을 맡은 분대의 분대원 두 명이 몸이 약하고 군 적응에 어려움을 겪어 이 병장이 대신 근무를 나가거나 훈련을 나가는 일이 잦았다. 이 병장의 소대장에 따르면 이 병장은 자신이 90mm 사수를 맡은 뒤에 한 번도 사격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해 힘들어하기도 했다. 책임감이 강했던 이 병장이었다. 하지만 부대에선 이제 곧 나갈 말년 병장의 상태를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형식적인 면담이 있을 뿐이었다.
국방부 민조단은 결국 구타, 가혹행위, 업무 스트레스, 부대 관리 소홀 등 부대적 요인이 크게 작용해 이 병장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판단했다. 민조단은 이 병장을 순직 처리하고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등 예우를 갖췄다.
이후 엄마 김 씨의 진정으로 다시 한 번 이 사건을 조사한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가해자로 지목된 병사에게 구타 사실을 자백받기도 했다. 해당 병사는 위원회 조사에서 “가벼운 터치 정도는 있었다”면서도 “애정 어린 행동이었고 관심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만 기운이 입장에서는 제 언행이 스트레스가 되었을 가능성은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건은 이렇게 일단락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국가’는 유가족을 편히 두지 않았다. 국방부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보훈처는 이 병장이 보훈보상대상자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보상을 해줄 수 없다는 말이었다. 국가 수호와 직접 관련이 있는 직무수행이나 교육훈련이 직접 원인이 되어 사망하였거나, 그 밖에 직무수행 또는 교육훈련과 상당한 인과관계로 사망하였다고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결국 이 병장의 죽음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말이었다.
엄마 김태숙 씨와 아빠 이수동 씨가 인터뷰를 하면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 유가족은 ‘국가’의 일관되지 못한 결정에, 두 번, 세 번 가슴이 찢어진다. 사진=박은숙 기자
법원 판단도 다르지 않았다. 유가족은 행정소송을 했지만 대구지방법원 행정1단독 재판부(최서은 판사)는 보훈처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이 병장이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한 시점은 이등병과 일병 때라 사망 시점과 시간 간격이 크다는 점, 평소 정신적 스트레스를 호소하지 않았고 마지막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는 점, 분대장 역할 역시 통상 군인들이 수행하는 업무와 다르지 않다는 점, 조울증은 유전적, 생물학적, 환경적, 심리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는 점 등을 들어 군 생활 도중 있었던 구타, 가혹행위나 훈련 스트레스가 이 병장 죽음의 원인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자살 당시 전역 직전이었던 점으로 고려하면, 전역과 관련한 생활사적 변화가 환경적인 스트레스 중 주요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법원은 이등병과 일병 때 구타당한 사실은 병장이 되고선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본 셈이다. 또 이 병장의 분대장 업무가 통상 군인이 수행하는 업무이기 때문에 크게 스트레스로 작용하지 않다고 봤으면서도, 통상 전역을 앞둔 군인이 하는 장래 고민이 이 병장에겐 죽음의 원인이 됐다고 봤다. 그렇다면 이 병장의 조울증은 어디서 온 걸까. 유가족은 ‘국가’의 일관되지 못한 결정에, 두 번, 세 번 가슴이 찢어진다.
“2년 끌려갔잖아요. 가고 싶어서 간 것도 아니고, 끌려간 거 아니에요? 거기 간 거 자체로 정신적으로 힘든 거 아니에요? 약도 한번 못 써보고 보냈다는 게 너무 가슴 아파요. 군대에서 조금만 신경 써줬으면 좋았을 텐데. 병역 기피해서 차라리 감옥을 갔으면 우리 아들 면회로라도 볼 수 있을 거 아니에요? 병장은 군인 아니에요? 군인 신분으로 죽었으면 군이 책임지는 게 상식적이잖아요.” (엄마 김태숙 씨)
“관련 서류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지죠. 찢어지죠. 말로 다 못 하죠. 근데 국가는 아들의 죽음을 두고 누구 책임인지 따지면서 유가족이 소송하게 하고 계속 떠올리게 하고, 두 번 죽이는 거 아니에요? 국방부 결정 다르고, 보훈처 결정 다르고, 법원 결정 다르고 명확한 기준이 있긴 한 건지 모르겠네요.” (아빠 이수동 씨)
이기운 병장 사건을 담당한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조사1과의 김산영 팀장은 “이기운 병장은 후임들에게 ‘성인군자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고 후임을 잘 챙기고 책임감이 굉장히 강했다. 이등병과 일병 때 겪은 트라우마가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성격적 취약성이 있는 사람이었던 셈”이라며 “이등병과 일병 때 겪은 트라우마를 잘 관리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제도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1950년 군 창설 이래 비순직 처리된 사망군인은 3만 9000여 명에 달한다. ‘개인적 사유’에 의한 자해 사망인 경우가 상당하다. 이들은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인람)는 2018년부터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부대 내 구조적 원인을 찾아내 순직 처리로 이끄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2019년 9월 13건의 의문사를 진상규명한 뒤 매월 성과를 내고 있다. 일요신문에서 진상규명된 사연을 연재한다. |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