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액 계약금 받고 프로 입단했지만…부상·사고·입스 등 아픈 과거 딛고 ‘제2의 스포츠 인생’
유망주 시절 추신수와 쌍벽을 이뤘던 이정호는 이번 시즌을 앞두고 재활군 투수로 키움 히어로즈에 합류했다. 사진=이영미 기자
#이정호 “선수 시절은 절망으로 얼룩졌지만…”
2000년 6월 삼성 라이온즈는 대구상고 출신의 투수 이정호와 계약금 5억 3000만 원, 연봉 2000만 원, 총 5억 5000만 원에 계약한다. 당시 이정호가 받은 5억 3000만 원의 계약금은 1997년 LG 트윈스 임선동이 받은 7억 원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액수였고, 고졸 선수로는 사상 최고 금액이었다. 신장 186cm, 80㎏의 체격에 시속 150km에 육박하는 빠른 공과 다양한 변화구 구사 능력을 보유한 이정호는 부산고 추신수와 함께 미국 메이저리그(MLB)에서 깊은 관심을 보인 투수였다.
이정호는 대구상고 1학년 때 팀의 청룡기 준결승을 이끌었고, 2학년 때는 청룡기 대회 우수투수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00년인 3학년 때는 캐나다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 뽑혔는데 함께 참가했던 동기들이 이대호, 정근우, 이동현, 정상호, 추신수, 김태균, 조영훈 등 1982년생 동기들이다. 당시 고교 야구는 ‘좌 신수-우 정호’로 불릴 만큼 투수 추신수와 이정호가 휩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단 첫 해 삼성은 신인 이정호에 대한 기대를 드높였다. 157km의 속구를 던지는 ‘괴물’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을 안겨줄 정도였다. 그러나 이정호의 프로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가장 큰 원인이 데뷔전에서 타구에 맞은 팔 부상이었다. 2군으로 내려가 재활 과정을 이어갔지만 이정호는 자신의 투구폼을 교정하려는 지도자 탓에 매일 500개 정도의 공을 던졌다고 한다. 다음은 이정호의 설명이다.
“신인들은 뭔가를 보여주지 않으면 자리를 보장받지 못한다. 스프링캠프에서부터 전력 투구를 해야 내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다. 이정호 하면 강속구 투수라는 이미지 때문에 코치들은 내 구속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구속을 끌어올리려다 보면 어깨에 부담을 주게 되고, 시즌 들어가면 너무 많은 공을 던져 구속이 떨어지는 등 악순환이 반복됐다.”
2004년 말 삼성에서 현대 유니콘스로 이적한 이정호는 넥센 히어로즈에서 존재감 없이 은퇴 수순을 밟았다. 삼성 입단 시 ‘초특급 기대주’였던 이정호가 10년 동안 1군에서 거둔 성적은 46이닝 1승 1세이브 1홀드 평균자책점 6.07이었다.
이정호는 은퇴 후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 프런트로 일하다 2014년 12월 김성근 감독의 부름을 받고 한화 이글스 육성군 코치로 활약했다. 2015년 대구고 코치로, 2016년 대구상원고 코치로 아마추어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올 시즌부터 키움 히어로즈 잔류군 투수, 재활군 코치로 활약 중이다. 오랜만에 다시 프로팀 코치로 돌아온 이정호는 지금 맡고 있는 재활군 코치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재활하러 온 선수들에게 내가 겪은 경험처럼 좋은 사례도 없다. 선수들에게 절대 부상을 숨기지 말라고 말한다. 부상을 드러내야 빠른 회복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부상당한 선수들은 가급적 회복 시간을 단축해서 빨리 1군에 복귀하고 싶어 한다. 그들의 심정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조급해 하지 말고 천천히 회복 시간을 가지라고 조언하는 편이다. 선수 시절은 절망으로 얼룩졌지만 그런 경험이 지금의 지도자 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승현 “다시 태어난다면 혼이 나도 ‘내 야구’를 하고파”
2006 프로야구 신인지명회의는 류현진과 나승현 때문에 큰 관심을 이끌었다. 당시 드래프트 2차 1번 지명권을 갖고 있었던 롯데 자이언츠가 나승현과 류현진을 두고 고민하다 즉시 전력감으로 분류된 초고교급 성적의 나승현을 지목했고, 2번 지명권의 한화 이글스는 동산고 좌완 류현진을 선택했다. 류현진은 원래 전체 1순위 지명이 유력했지만 팔꿈치 수술 이력으로 나승현에게 밀려 한화 유니폼을 입었다.
나승현은 드래프트 당시 류현진에 앞서 2차 1번으로 지명을 받았다. 나승현은 “선수 시절 한 시즌도 같은 투구폼으로 던져 본 적이 없다”며 아쉬워했다. 사진=이영미 기자
180cm 78kg의 체격을 갖춘 나승현은 광주일고 3학년 시절 81이닝을 던져 0.6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고 팀의 봉황대기 준우승과 황금사자기 우승을 이끌었으며 황금사자기대회에선 MVP에 선정되기도 했다. 고교 시절 최고 구속이 149km, 3년간 통산 평균자책점이 1.57이었다. 광주일고 시절 나승현과 배터리를 이룬 포수는 강정호였다.
나승현은 데뷔 첫 해인 2006년 51경기 3패 16세이브 평균자책점 3.48을 기록하며 신인치고는 우수한 성적을 거뒀지만 류현진이 그해 신인왕과 MVP를 거머쥐면서 ‘괴물 모드’를 형성하는 바람에 존재감을 잃고 말았다. 이후 나승현은 첫 시즌만 반짝했다가 1군보다는 2군과 3군을 오르내렸고, 결국 2015년 시즌을 마친 다음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되며 28세의 나이에 은퇴 수순을 밟았다.
나승현은 선수 시절 내내 류현진과 비교되는 바람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는 “현진이가 잘하면 잘할수록 더 많은 욕을 얻어먹었다”고 말한다. 2005년 아시아선수권대회 대표팀 선수로 뽑혔을 때는 류현진과 룸메이트가 돼 친분을 쌓았다는 이야기도 들려준다.
은퇴 후 야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입단 테스트를 준비했지만 나승현은 2016년 지역 내 티볼 교육 담당 롯데 순회 코치로 방향을 전환했다가 지금은 롯데 구단 아마추어 스카우트로 활약 중이다. 나승현에게 선수생활 동안 가장 후회되는 게 무엇이었는지 물었다. 그는 “단 한 시즌도 똑같은 투구폼으로 던져본 적이 없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쓰리쿼터에서 언더핸드로, 사이드암으로 자꾸 변화를 주다보니 정체성을 잃었다. 다시 태어나서 야구를 한다면 혼이 나더라도 내 야구를, 내가 하고 싶은 야구를 해보는 것이다.”
#추락사고·팔꿈치 수술·입스…안타까운 사연
2005년 두산 베어스 1차지명자인 김명제는 계약금 6억 원을 받고 프로에 데뷔했다. 입단 첫 해부터 프로야구 1군 무대를 밟은 김명제는 28경기에서 7승 6패 평균자책점 4.63을 기록하며 신인왕 후보로도 거론됐다. 2009년까지 1군 무대에서 통산 137경기에 나서 479이닝 22승 29패 1세이브 7홀드 평균자책점 4.81의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김명제의 야구 인생을 뒤바꿔 놓는 사고가 발생했다. 2009년 12월 28일 23세의 김명제는 음주운전을 하다 차량이 다리에서 추락하는 사고로 생사의 갈림길을 오갔다. 경추 골절상을 입고 대수술을 받았지만 팔, 다리를 온전히 사용할 수 없었다. 당시 김명제의 혈중 알코올농도는 면허취소에 해당하는 0.172%. 김명제는 결국 야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팬들의 비난 속에서 서서히 잊혀갔다.
2014년 9월 김명제란 이름이 뉴스에 다시 등장했다. 사고가 난 지 5년 만이었다. 김명제는 야구 선수가 아닌 휠체어 테니스 선수로 이름을 내밀었다. 교통사고 후 폐인처럼 지냈던 그는 휠체어 테니스로 다시 태어났고, 2018 인도네시아 아시안 패러게임에 출전, 쿼드 복식 부문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휠체어 테니스 선수로 활약하지만 김명제한테 두산 베어스는 여전히 미안함과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는 기자와 인터뷰에서 “두산 팬들이 허락한다면 메달을 목에 걸고 두산 마운드에 올라 시구하고, 진심으로 팬들에게 사죄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직까지 그의 바람은 현실로 이뤄지지 않았다.
강철민은 1998년 고졸 우선순위로 해태(KIA) 타이거즈에 지명돼 2002년 KIA에 입단했다. 김진우가 계약금 7억 원을, 강철민은 5억 원을 받으며 당시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2002년 5승, 2003년 6승, 2004년 8승을 거둔 그는 2006년 9월 미국 LA에서 프랭크 조브 박사로부터 팔꿈치 수술을 받는다. 이후 LG-한화를 거쳐 은퇴 수순을 밟았다. 은퇴 후 강철민은 광주진흥고 코치로 활동하다 2019년 화순고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부산고 이왕기(이재율로 개명)가 롯데 자이언츠 1차 지명을 받던 2005년 신인 드래프트는 고교 유망주들로 풍년을 이룬 시기였다. 대통령배대회에서 4연타석 홈런을 날린 성남고 박병호(키움 히어로즈)와 휘문고 에이스 김명제, 유신고 ‘천재’ 최정(SK 와이번스), 그리고 신일고 서동환 등 투타에서 관심을 끄는 선수들이 즐비했다.
2005년 데뷔 첫 해 중간계투와 마무리를 오가며 5승 3패 6홀드 6세이브를 기록했던 이왕기는 2012시즌 후 롯데에서 방출된 후 입단 테스트를 통해 KA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지만 6년을 ‘입스(Yips, 부상 및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발생하는 각종 불안 증세)로 고생하다 은퇴하고 말았다. 선수 시절 이재율로 개명한 그는 은퇴 후 부산중학교 야구부 코치를 거쳐 KIA 스카우트에서 지금은 롯데 스카우트로 활약 중이다.
“현재 삼성과 NC를 담당하면서 전력 분석도 맡고 있다. 어려운 분야라 일하는 게 쉽지 않지만 공부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는 중이다.”
이재율의 꿈은 프로팀 코치가 돼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 그는 “선수 시절 1군에서 머문 건 고작 2년도 채 안 된다. 나머지 6년은 입스에 걸려 투구폼 찾는다고 헤맸다”면서 “코치가 돼 1군에서 선수들과 함께 생활한다면 짧은 선수 생활의 아쉬움을 조금씩 풀어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