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간호사 장면 삭제·교체 결정…“음악적 의도 수정 못해” 확고하던 YG 각종 악재 이후 눈치보기
간호사의 성적 대상화가 문제가 된 블랙핑크의 신곡 뮤직비디오 속 한 장면. 7일 YG엔터테인먼트는 결국 이 장면을 편집하겠다고 밝혔다. 사진=뮤직비디오 캡처
문제가 된 블랙핑크의 뮤직비디오 속 장면은 ‘No doctor could help when I’m lovesick’(내가 사랑에 아파할 때에는 어떤 의사도 소용없다)는 가사를 표현한 부분이다. 이 장면에서 제니는 하트가 그려진 헤어 캡과 짧고 몸에 딱 붙는 흰 유니폼을 입은 채 붉은 색 하이힐을 신고 등장했다. 핼러윈데이의 길거리나 성인전용 코스튬 판매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간호사의 성적대상화 코스튬과 흡사한 착장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 5일에는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 6일에는 대한간호협회가 각각 논평과 항의 서한을 보냈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조는 “간호사는 보건의료노동자이자 전문 의료인임에도 해당 직업군에 종사하는 성별이 여성이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성적대상화와 전문성을 의심받는 비하적 묘사를 겪어야만 했다”며 “이를 개선하기 위해 간호사들이 오랜 기간 투쟁해왔음에도 YG엔터테인먼트는 블랙핑크의 뮤직비디오에서 간호사를 성적대상화해 등장시켰다”고 지적했다.
대한간호협회도 “가사의 맥락과 상관없는 선정적인 간호사 복장을 뮤직비디오에 등장시킨 것은 예술 장르라기보다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간호사 성적 대상화 풍조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며 ”글로벌 가수의 뮤직비디오가 미치는 사회적 영향력을 감안할 때 사회적 책임을 무겁게 느껴야 한다”고 YG의 태도를 지적했다. 이는 YG가 지난 6일 내놓은 공식 입장문에서 “음악을 표현한 것 외에 특정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한 것을 비판한 것이다.
선정적인 가사나 콘셉트로 종종 방송국과 심의를 놓고 마찰을 빚었던 YG는 콘셉트 수정이나 편집을 통한 재심의는 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기도 했다. 사진=양현석 전 YG대표 인스타그램 캡처
이처럼 전방위 비판이 이어지자 YG도 결국 한 발짝 물러섰다. 7일 YG 측은 다시 공식입장을 내고 “블랙핑크의 ‘Lovesick Girls’ 뮤직비디오 중 간호사 유니폼이 나오는 장면을 모두 삭제하기로 결정하였고 가장 빠른 시간 내로 영상을 교체할 예정”이라며 “조금도 특정 의도가 없었기에 오랜 시간 뮤직비디오를 준비하면서 이와 같은 논란을 예상하지 못했던 점,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깊이 깨닫는 계기로 삼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앞서 YG는 빅뱅, 2NE1으로 쌍끌이했던 2000년대 후반~2010년대 초반까지 확고한 철학을 바탕으로 유사한 논란에 정면승부해 왔다. 2009년 전 빅뱅의 멤버 승리의 솔로곡 ‘스트롱 베이비’의 뮤직비디오가 KBS에서 반려되자 YG는 재심의를 요구하지 않고 뮤직비디오 없이 방송활동만 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당시 ‘스트롱 베이비’ 가사 중 마약을 뜻하는 은어인 ‘크랙’(crack)이 문제가 되면서 실제 방송에서는 이를 박수를 뜻하는 ‘클랩’(clap)으로 수정했으나 뮤직비디오에선 크랙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심의에 걸린 것이었다.
이후 2011년 빅뱅의 유닛 GD&탑의 경우는 앨범 타이틀곡인 ‘뻑이 가요’가 KBS, SBS, MBC 방송 3사로부터 비속어와 저속한 표현 등으로 인해 방송 불가 조치를 받기도 했다. 같은 앨범의 ‘집에 가지마’는 MBC 편성국 심의평가부로부터 선정성을 이유로 활동에 제동이 걸렸다. 이에 YG 측은 ‘집에 가지마’의 수정이 일체 없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밝혔다. “소속 가수들의 음악적 의도에 어긋나는 일체의 수정이나 제약을 회사가 앞장서 막아야 된다”는 것이 소속사의 원칙이라는 게 YG의 입장이었다.
2013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신드롬을 일으켰던 전 소속가수 싸이의 ‘젠틀맨’ 뮤직비디오가 KBS로부터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영상 속 싸이가 공공기물인 주차금지 시설물을 발로 차는 모습이 ‘공공시설물 훼손’에 해당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소속 가수들의 방송 출연을 놓고 KBS와 불편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던 YG 측은 이때도 “뮤직비디오 내용을 수정하면서까지 재심의를 받을 이유는 없다고 본다”며 재심의 신청을 하지 않았다.
YG는 선정성 문제로 논란이 됐던 송민호의 ‘아낙네’ 뮤직비디오를 두고 Mnet과 신경전을 벌인 바 있다. 사진=‘아낙네’ 뮤직비디오 캡처
2018년에는 소속 그룹 위너의 멤버 송민호의 첫 솔로 정규앨범 ‘XX’의 타이틀곡 ‘아낙네’의 뮤직비디오가 문제가 됐다. 음악전문채널 Mnet(엠넷)의 심의국에서 뮤직비디오 속 여성 댄서들과 함께 춤추는 장면을 지적해 선정성을 문제 삼자 양현석 전 대표는 “엠넷에서만 트는 게 문제라는 거지? 안 틀어주셔도 된다고 정중히 예의를 갖춰 말씀드려라”라고 밝혔다. 뮤직비디오를 수정할 의사가 없다는 입장을 확고히 한 것이다. 심지어 양 전 대표는 이와 같은 내용의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본인이 직접 캡처해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리며 Mnet 측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이처럼 소속 가수들의 뮤직비디오와 콘셉트를 놓고 확고한 신념을 고집해 왔던 YG가 고개를 숙인 것을 두고 업계 관계자들은 “대중의 눈치를 본 셈”이라고 짚었다. 이제까지 방송사와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며 ‘심의에 굴하지 않는 쿨한 YG’를 이미지화해 왔으나 지난해부터 불거진 각종 논란으로 인해 굳어진 대중의 비판적인 인식을 무시할 수 없게 된 탓이라는 것이다.
한 방송사 관계자는 “이제까지 YG가 방송사들을 향해 ‘재심의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외치면 대중은 ‘YG 가수들의 노래를 틀지 않으면 방송사만 손해’라며 YG의 편을 들어왔다”며 “그러나 소속 가수들은 물론 수장까지 각종 논란에 휘말리면서 대중이 돌아선 와중에 그나마 조금씩 살아나고 있던 블랙핑크까지 사회적인 이슈에 직면하지 않았나. YG로서는 신속한 대처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편, 블랙핑크의 ‘Lovesick Girls’ 뮤직비디오는 공개 5일 만인 지난 7일 오전 10시 기준 유튜브 누적 조회수 1억 1800만여 뷰를 기록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