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민주화 운동부터 아르멘-아제르 전쟁까지…팬들 뭉쳐 영어 아닌 ‘한글’로 호소하기도
그룹 2PM의 닉쿤은 지난 10월 17일 태국 정부의 폭력 진압을 반대하는 글을 자신의 트위터에 올렸다. 일부 태국 팬들은 그의 발언이 “너무 늦었고, 너무 모호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사진=닉쿤 트위터 캡처
최근 대두한 문제는 태국 민주화 운동에 대해 태국 출신 K팝 스타들의 발언을 놓고 벌어진 갑론을박이다. 2014년 5월 쿠데타 이후 군부 독재의 억압 하에 살아온 태국 국민들은 왕실과 정계, 사회 전반을 막론하고 발생한 각종 사건사고에 분노해 지난 2월부터 반정부 민주화 시위를 전개해 왔다. 정부의 압박과 통제가 강력해진 지난 9월부터는 이에 맞선 시위 세력도 더욱 확대됨에 따라 정부 대 국민의 대립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기도 했다.
이에 태국 국민들은 자국 출신 K팝 스타들에게 동조와 응원의 목소리를 내줄 것을 요청했다. 국내에서 현재 활동 중인 태국 출신 K팝 스타는 10여 명으로 알려져 있다. 2PM(투피엠)의 닉쿤, 블랙핑크의 리사, GOT7(갓세븐)의 뱀뱀, NCT의 텐, CLC의 SORN(손), (여자)아이들의 민니, ‘아이돌학교’에 출연해 이름을 알렸던 나띠 등이다.
이들 가운데 닉쿤과 뱀뱀, SORN은 지난 17일 트위터를 통해 태국 정부를 향한 비판의 첫 스타트를 끊었다. 닉쿤은 “폭력은 참을 수 없습니다. 폭력은 어떤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모두들 몸조심하시길 바랍니다”는 글을 남겼다. 뱀뱀도 “폭력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대중에게 폭력을 사용하지 마세요.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경청하고 존중하는 것이 해결의 출발점입니다”라며 태국 정부의 폭력적인 진압을 비판했다.
SORN 역시 “오늘 아무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고, 모두가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모두가 무사하길 바라며, 우리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더 나은 해결책이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태국어로 된 트윗에는 “우리는 정말 할 수 있다”는 댓글을 달아 태국 팬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태국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블랙핑크의 멤버 리사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팬들에게 많은 비판을 듣기도 했다. 사진=리사 인스타그램 캡처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비판의 목소리도 높았다. 이들의 공식 입장이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할리우드의 흑인 연예인과 유명인들이 ‘BLM’(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는 뜻을 담은 흑인인권운동) 슬로건을 걸고 신속하게 입장을 밝혔던 것처럼 태국 스타들도 자국민들을 위해 당연히 사태의 처음부터 동참해야 했다는 것이다.
한 태국인 팬은 “우리는 이보다 훨씬 먼저 태국 K팝 스타들에게 이번 사태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 줄 것을 요구해 왔다. 태국 K팝 스타들은 한국보다 자국에서 더 큰 인기와 사랑을 누리고 또 받아왔기 때문에 스타들이 그런 팬들의 마음에 보답해줄 것을 믿었다”며 “그런데도 침묵을 지켜 오다가 늦게나마 밝힌 글마저도 그들의 입장을 명확하게 밝혔다고 보긴 어려웠다. 기대만큼 실망이 클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홍콩 민주화 운동을 두고 중화권 출신 K팝 스타들이 홍콩을 탄압한 중국을 지지하는 입장을 앞다퉈 낸 것과 비교하며 “애매한 늑장 입장문은 결국 태국 정부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라는 비난도 이어졌다.
태국 팬들의 이 같은 실망감은 아직 입을 열지 않은 다른 태국 스타들을 향하기도 했다. 특히 태국 팬들의 압도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았던 걸그룹 블랙핑크의 리사에게 집중포화가 쏟아졌다. 리사의 인스타그램에는 “왜 입장을 내놓지 않느냐. 지금이야말로 팬들의 사랑에 보답할 때”라는 태국 팬들의 비판 댓글과 “K팝 아티스트들은 정치적 이슈에 적극적으로 말을 하지 못하게 돼 있다. 태국 팬들은 제발 리사를 압박하지 말고 자유롭게 놔 달라”는 다른 해외 팬들의 댓글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팬들간 갈등이 커지자 태국의 한 연예인이 직접 리사의 인스타그램에 “태국 국민들이 이 같은 증오를 멈춰 줄 것을 촉구한다”는 댓글을 달았다. 그는 “리사에겐 당연히 목소리를 높일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 말이 곧 그가 ‘특정 주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없다’는 계약을 맺지 않았다는 말이 되진 않는다”며 “리사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또한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하길 바란다”고 일침을 놨다.
아르메니아의 방탄소년단(BTS) 팬들은 한글로 적힌 전쟁 반대 슬로건을 든 사진을 해시태그와 함께 올리는 운동을 벌였다.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해외 팬들이 자국 K팝 스타에게 직접 정치적 입장을 밝혀줄 것을 요구하는 일은 최근 들어 보이는 새로운 움직임으로, 업계 관계자들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이미지’를 중시하는 국내 연예기획사들의 특성상 예민한 국제 문제를 깊숙이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해외 팬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중심을 잡는 것이 이전보다 어려워졌다는 게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한 걸그룹 매니지먼트 관계자는 “최근 해외 K팝 팬들의 동향을 살폈을 때 각국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태들을 놓고 ‘K팝 팬덤’으로 뭉쳐서 세계인들의 관심을 촉구하는 집단행동을 자주 보이고 있다”며 “이전까지는 영어로만 자국의 현실을 알려왔다면 현재는 한국어로도 소통하고, K팝 노래를 자신들의 민중가요처럼 사용하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태국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펼쳐진 반정부 집회에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 퍼지는가 하면, 자국 내 K팝 팬덤이 집회를 위한 거액의 성금을 모금해 전달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지난 9월 27일부터 불거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보이그룹 방탄소년단(BTS)의 아르메니아 팬들이 한글로 “전쟁을 멈춰라”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역사가 되풀이되도록 놔두지 마!” “우리가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 전쟁이 우리를 끝낼 것이다”라는 팻말을 들고 전 세계 K팝 팬들을 향해 호소한 바 있다.
다만 이 같은 행동에 대해 국내에서 활동 중인 외국인 K팝 멤버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것은 현 상황에선 다소 어려운 일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업계 또 다른 관계자는 “해외 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계약서에 ‘정치‧사회적인 발언을 하지 말 것’이라고 명시된 것은 아니지만, 극단적으로 양분화한 우리 사회 속에서 공인의 입장에 있는 연예인들은 웬만하면 어느 한 쪽에 흠 잡힐 발언을 하지 않도록 교육받아 왔다”며 “특히 아이돌의 경우는 멤버 한 명의 발언이 그룹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이슈에 더 신중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도 해외 팬들의 이 같은 움직임을 국내 엔터업계도 주목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단순히 노래하고 연기하는 연예인이 아니라 자신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우상이라는 의미 그대로의 아이돌을 원하는 게 현재의 K팝 팬들인 것 같다”며 “결국 K팝이 문화적 영역에서 선도하는 입장에 선 지금, 이들의 선하고 긍정적인 영향력을 어느 정도까지 미치게 할 수 있을지가 국내 엔터업계의 새로운 숙제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