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스 1조 원 베팅하자 SK는 우선매수권 ‘만지작’…리츠 활용 가능성 “아직 결정된 것 없어”
SK그룹 사옥인 서울 종로구 서린빌딩 예비 인수자로 이지스자산운용이 선정되며 SK그룹이 되살지 이목이 집중된다. 사진=일요신문DB
하나대체투자운용이 매각작업 중인 서린빌딩의 예비 인수자로 지난 10월 15일 이지스자산운용(이지스)이 선정됐다. 이지스가 시장이 예측하지 못한 가격을 입찰가로 써내며 서린빌딩을 둘러싼 셈법이 복잡해졌다. 이지스는 1조 원에 육박하는 액수를 베팅했다. 3.3㎡(약 1평)당 3900만 원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최근 오피스 중심지 거래가격이 평당 3000만 원 수준으로 평가받는 것을 고려하면 이지스가 시장 기대를 뛰어넘는 가격을 부른 셈이다.
재계는 SK그룹이 서린빌딩을 눈 앞에서 넘겨줄 리 만무하다고 보고 있다. SK그룹 본사 사옥인 서린빌딩은 SK에 빌딩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고 최종현 SK 회장은 계열사를 한 곳에 모으기 위해 서린빌딩을 새로 짓고, 설계 과정에도 많은 의견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유명 건축가 김종성이 설계한 서린빌딩은 1992년 착공해 1999년 완공했다. 서린빌딩은 지금까지 SK그룹과 성장의 역사를 함께해왔다.
SK그룹은 준공 6년 뒤인 2005년 서린빌딩을 뱅크오브아메리카(BoA)메릴린치에 매각했다. SK인천석유화학 인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재벌기업이 본사 사옥을 유동화하는 경우가 흔치 않을 때였다. 이후 SK는 세일즈앤리스백 방식으로 서린빌딩을 임차해 사용해왔다.
서린빌딩은 2011년 다시 하나대체투자자산이 운용하는 부동산 펀드로 주인이 바뀌었다. 이 부동산 펀드는 SK(주)와 SK이노베이션, SK E&S 등이 지분 65.2%를 보유하고, 나머지 지분은 국민연금이 갖고 있다. SK그룹은 임대차 계약을 통해 사옥을 빌려 쓰고 있는데 연간 임대료가 300억 원 이상이라고 알려졌다. 다만, SK그룹은 서린빌딩 손바뀜 과정에서 우선매수권도 보장받았다.
시장에서는 SK그룹이 서린빌딩을 되살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서린빌딩에 입주해 있는 SK그룹 계열사들이 사옥이전 등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SK그룹의 임대차 계약은 2021년 3월까지다. 현재 서린빌딩에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집무실을 비롯해 그룹 공동 의사결정기구인 수펙스추구협의회, SK그룹의 지주회사와 SK이노베이션, SK E&S, SK루브리컨츠 등이 입주해 있다.
SK그룹은 2018년 사옥 리모델링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사진=SK이노베이션 홈페이지 캡처
SK그룹이 최근 대대적으로 사옥을 리모델링하면서 수백억 원을 투자한 점도 사옥 이전 의사가 없다는 데 힘을 싣는다. 2018년 사옥 리모델링에 나선 SK그룹은 서린빌딩 14~20층을 개방형 오피스로 바꾸는 작업을 마쳤다. 당시 직원들은 서린빌딩 맞은편 그랑서울빌딩을 임차해 사용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비용을 생각해도 사옥 이전은 SK그룹의 선택지에 들어 있지 않을 것”이라며 “사옥 리모델링 공사비뿐 아니라 그랑서울 임차료에 들어간 돈이 상당했다”고 말했다.
SK그룹이 서린빌딩을 되사기 위해 우선매수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 우선매수권을 행사하려면 이지스가 제시한 입찰가 이상을 지불해야 한다. 부동산업계에서는 SK그룹이 우선매수권 행사를 위해 부동산간접투자(리츠)를 활용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SK그룹 지주사인 SK(주)는 장기간 리츠를 비롯한 빌딩 매입 관련 선택지를 고민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리츠를 활용하면 부동산투자회사를 설립해 서린빌딩 등 자산을 매입하고 계열사로부터 임대료를 받을 수 있다. 이 경우 계열사들은 여유 자금을 부동산 매입 대신 다른 투자에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일요신문 취재 결과, SK그룹은 현재까지 리츠를 위해 필요한 자산관리회사(AMC) 설립 심사 신청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AMC를 설립하려면 국토교통부 심사를 통해 예비인가와 설립인가를 받아야 하고 이 과정에만 두 달가량 소요된다.
사실 SK그룹으로선 9년 만에 가격이 2배 가까이 오른 빌딩을 매입하는 건 부담스러울 수 있다. 특히 국내 부동산 시장은 코로나19 사태 등으로 해외로 나가지 못한 투자금이 몰리며 과열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린빌딩의 투자자이자 임차인인 SK그룹은 건물이 비싸게 팔리면 한편으로 수익을 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건물을 되사려면 그만큼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해 있다.
서린빌딩 부동산 펀드에 국민연금이 SK 계열사들과 함께 투자한 것도 변수로 작용한다. SK그룹이 입찰전에서 공격적으로 입찰가를 낮추기 위한 전략을 펼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극단적 전략으로는 SK그룹이 서린빌딩 임대차 계약을 갱신하지 않고 사옥 이전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예비 인수자인 이지스가 공실 부담으로 입찰 의사를 접게 해 진행 중인 입찰을 유찰로 이끄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 선택은 결과적으로 부동산 펀드 투자자인 연기금의 투자수익률을 낮추게 돼 비난 가능성이 크다.
부동산투자업계에서는 “우선매수권 행사 시기와 임대차 계약만료 시점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임대차 계약에 대한 SK그룹의 의사결정이 입찰 유찰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SK그룹 측은 “서린빌딩과 관련해 여러 가지 방향을 고려하고 있지만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리츠 설립 등은 그 다음 단계에 대한 부분이라 현재로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SK그룹이 우선매수권을 행사하려면 11월 중순까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
금재은 기자 silo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