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 서린빌딩, CJ제일제당센터 등 줄줄이 매물로…전략적 자산 유동화·투자금 회수 등 이유
SK그룹이 20년째 본사 사옥으로 쓰고 있는 종로 서린동 ‘SK 서린빌딩’ 매각 작업이 최근 본격화됐다. 지난 7월 건물 운용 주체인 하나대체투자운용이 매각 자문사들에 입찰제안요청서를 보냈고, 최근 세빌스-에비슨영을 주관사로 선정해 잠재 인수자들을 대상으로 입찰 의사를 확인하고 있다. 입찰은 오는 10월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서린빌딩은 SK그룹의 상징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선친인 고(故) 최종현 회장이 그룹사를 한 곳에 모으기 위해 1992년 설계 작업을 시작했다. 1999년 준공됐지만 SK그룹은 6년 뒤인 2005년 뱅크오브아메리카(BoA)메릴린치에 4400억 원을 받고 매각했다. SK인천석유화학(옛 인천정유) 인수 자금 마련을 위해서였는데, 당시 아무리 어려워도 본사 사옥은 지켜왔던 재계에선 이 방식이 흔한 일이 아니라 관심을 끌었다. 이후 SK는 세일즈앤리스백(매각 후 재임대) 방식을 통해 본사로 사용해왔다.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 전경. 사진=일요신문DB
2011년 5500억 원을 들여 다시 재매입했지만 부동산 펀드를 이용해 산 탓에 소유권은 SK그룹에 없다. SK(주)가 펀드로부터 건물을 임차한 뒤 다시 계열사들에게 재임대하는 방식으로 쓰고 있다. 현재 임대차 계약은 2021년 3월까지다.
부동산 업계에선 SK그룹이 아닌 제3자가 빌딩을 살 가능성은 낮게 보고 있다. SK그룹이 우선매수권을 갖고 있다. 다만 단순 직접 매입은 하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SK그룹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 그룹 차원에서 부동산투자회사(리츠·REITs) 설립을 추진 중이다. 지난 7월부터 SK(주)를 중심으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고 최근 국토교통부에 사업 인가를 받기 위해 심사를 신청했다. 법인 설립을 위한 절차와 함께 이곳에서 근무할 인력도 채우고 있다.
SK그룹은 SK(주) 산하에 리츠를 두고 이 회사가 계열사의 사옥 등 부동산을 매입한 뒤 계열사로부터 임대료를 받는 방식을 추진 중이다. 계열사들의 부동산 매각 대금을 투자나 연구개발 등에 활용할 계획이다. 건물을 소유하면서, 이 자산으로 자금을 굴리는 전략인 셈이다. 지난해 3월 설립된 롯데리츠가 이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롯데리츠는 롯데그룹의 백화점, 마트, 아웃렛 등 부동산 자산 유동화를 목적으로 출범했다. 업계에선 SK그룹 새 리츠 회사의 첫 자산이 서린빌딩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자본시장의 큰손들은 대기업 사옥 또는 그 지분을 매각해 차익 실현을 했거나 시도 중이다. 국민연금은 최근 서울시 중구 CJ제일제당센터를 매각했다. 이 빌딩은 지하1층과 지상1층에 위치한 일부 판매 시설을 제외하고 모두 CJ그룹이 쓰고 있다. 국민연금이 100% 지분을 가진 리츠가 2010년부터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 매입 당시 국민연금은 3374억 원을 투자했다.
매물로 나왔을 때 시장 예상보다 더 많은 인수 후보가 달려들었다. 본입찰에만 20곳 이상이 응찰한 것으로 알려졌다. CJ그룹이 장기 계약을 체결하면서 투자 가치가 높은 곳으로 평가 받았다.
최종 승자는 이지스자산운용이다. 시장에선 3.3㎡(약 1평) 당 2000만 원선에서 우선협상대상자가 결정될 것으로 전망했으나 이지스자산운용은 2400만 원씩 총 5840억 원을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시장 예상치에서 1000억 원가량이 오른 셈이다. 이지스운용은 최근 본계약을 체결하고 잔금 납입도 마무리했다. 이에 따라 국민연금은 10년 만에 투자금을 전액 회수했을 뿐만 아니라 2000억 원에 달하는 시세 차익도 냈다.
서울 중구 CJ제일제당센터. 사진=CJ제일제당
행정공제회는 오는 2021년 하반기 완공되는 판교 알파돔 6-1블럭 오피스빌딩 지분 절반을 매물로 내놨다. 이 빌딩은 판교 알파돔시티 복합개발의 마지막 개발 프로젝트다. 향후 카카오의 뿌리가 될 곳이다. 카카오는 올해 초 10년간 책임 임차 방식으로 건물 전체에 대해 장기 임차 계약을 맺었다. 완공되면 전 계열사를 이곳에 모을 계획이다. 장기 우량 고객이 있는데다, 6-2블록에는 네이버가 입주할 예정이라 안정적인 임대수익을 원하는 기관투자자들이 줄곧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앞서 행정공제회는 미래에셋운용이 설정한 부동산 펀드에 출자자로 참여했다. 투입된 자금은 대출을 포함해 약 8000억 원이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알파돔 프로젝트가 좌초될 위기를 겪었으나 행정공제회와 현대백화점이 구원투수로 등판해 건물을 미리 사는 선매입 계약을 맺고 개발비를 투자했다. 미래에셋이 설정한 펀드 만기는 오는 2022년이다. 행정공제회가 투자금 조기 회수 차원에서 매물로 내놓은 것으로 보인다.
서울 여의도 증권사 사옥들은 손바뀜이 가장 활발한 곳이다. 우선 KTB투자증권이 입주해 있는 KTB빌딩이 매물로 나왔는데, 최근 마스턴투자운용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낙찰가는 3500억 원 이상이었고, 마스턴투자운용이 가장 높은 금액을 써냈다. KTB빌딩 소유권은 국민연금에 있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의 펀드를 통해 갖고 있다. KTB투자증권과 KTB자산운용이 10여 년간 빌려 사용했다. KTB투자증권은 2021년 3월 여의도우체국 신사옥으로 옮길 계획이다.
KTB투자증권 바로 옆 건물을 쓰고 있는 NH투자증권도 내년 상반기 한국거래소 교차로에 위치한 파크원타워로 옮긴다. 지금의 사옥은 지난해 5월 마스턴투자운용에 매각했다. 마스턴투자운용은 NH투자증권이 이전하면 이곳을 허물고 재건축에 나선다. 초고층 주거 시설을 지을 계획이다. 그 밖에 한화투자증권의 투자은행(IB) 사업부는 63빌딩으로 옮겼다. 한화자산운용과 한화생명과 사업 시너지를 위한 전략적인 선택이다.
증권사 빌딩의 손바뀜과 본사 이전 등은 지난해부터 시작됐다. KB국민은행 여의도 본점 별관(옛 현대증권 사옥), 메리츠화재 여의도 사옥 등도 이때 매물로 나왔다. 이는 지난 7월 포스코가 준공한 여의도 파크원 때문이다. 여의도 최고 높이(318m)인 이 빌딩은 오피스 2개 동, 호텔, 백화점 등이 들어선 복합문화시설이다.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신축을 선호하는 입주 기업들이 파크원 오피스동으로 대거 자리를 옮길 가능성이 높았던 만큼 공실률이 높아질 것을 우려해 일찌감치 제값을 받을 수 있을 때 매물로 내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험사들도 일제히 사옥과 부동산 등을 매각하고 있다. 2022년 도입이 예정돼 있는 새로운 지급여력제도인 킥스(K-ICS)가 주된 이유다. 부채를 기존의 원가 평가에서 시가 평가로 바꾸는 과정에서 보험 부채가 급격히 늘어나 건전성 지표 하락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돼서다. 신한생명, 한화생명, 푸본현대생명, 교보생명, 현대해상 등이 부동산을 매각했거나 추진 중이다.
이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끄는 건 현대해상 강남사옥 매물이다. 현대해상이 지분 100%를 가지고 있는데, 올해 초 주요 임차인이었던 법무법인 태평양이 이전했는데도 관심을 보인 곳은 40여 곳으로, 이 중 10곳 이상이 본입찰에 참여했다. 강남권역의 알짜 매물인 만큼 투자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됐다. 여기에 구본진 전 LF 부회장이 개인투자자 자격으로 70억 원가량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눈길을 끌었다. 구 전 부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다. 현대해상 사옥 우선협상대상자는 한국토지신탁이다. 현대해상과 본계약을 체결했고, 잔금을 치르면 매입이 완전히 마무리된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