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조선의 한국형 구축함 기술 탈취 의혹, 인수 반대 목소리 비등…현중 “아직 입장 밝히기 어려워”
이전부터 대우조선 내부에서는 현대중공업으로 매각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았다. 지난 3월 전국금속노동조합 대우조선지회(대우조선 노조)는 “2008년 한화그룹에 6조 3000억 원에 매각 절차가 진행됐던 대우조선을 불과 4000억 원에 넘기고 있는데 부채를 감안하더라도 명백한 현대중공업 자본에 대한 재벌 특혜”라며 “대부분 조선 기자재를 지역 중소기업을 통해 공급받기에 현대중공업으로의 매각은 지역경제 몰락을 의미한다”고 매각을 반대했다. 이에 KDB산업은행과 현대중공업은 대우조선의 자율 독립 경영과 기존 거래선 유지를 약속했지만 대우조선 노조 측은 “현대중공업그룹 체계에서 불가능한 일”이라고 맞서고 있다.
최근 현대중공업이 대우조선해양의 기술을 탈취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현대중공업의 대우조선 인수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서울 중구 대우조선해양 서울사무소. 사진=박정훈 기자
최근 현대중공업의 한국형 차기구축함(KDDX) 관련 기술 탈취 의혹이 불거진 후 인수 반대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지난 8월 방위사업청은 KDDX 기본설계 사업 제안 평가에서 현대중공업에 대우조선보다 0.0565점 높은 점수를 주며 사실상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다. 방위사업청의 KDDX 사업 규모는 7조 원에 달한다.
앞서 2018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보안감사에서 현대중공업 직원이 해군 간부로부터 빼돌린 대우조선의 KDDX 개념 설계도를 몰래 촬영해 보관하다가 적발된 바 있다. 관련 의혹을 받고 있는 12명의 현대중공업 직원 중 9명이 현재 기소된 상태. 기소 사실이 알려지면서 현대중공업이 이번 방위사업청 수주전에 대우조선의 설계도를 참고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왕정홍 방위사업청장은 지난 20일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규정에 의해서 후순위자로 통보된 측(대우조선)이 이의를 신청하면 검증위원회에서 제대로 평가를 했는지 본다”며 “최대한 외부인을 많이 넣고 (검증을) 해봐도 결과를 뒤집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전했다. 그러나 왕 청장은 “사법부 판단에 따라서 (우선협상대상자가) 달라질 수 있다”고 밝혀 현대중공업이 탈락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겼다.
2019년 5월 서울 감사원 정문 앞에서 대우조선 노조원들이 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과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에 대한 국민감사를 청구하는 청구서를 접수할 당시 모습. 하지만 감사원은 이를 기각했다. 사진=이종현 기자
논란이 불거지면서 현대중공업이 대우조선의 자율 경영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대우조선 노조 관계자는 기술 탈취 논란에 대해 “현대중공업이 대우조선을 희생시켜 회사 규모를 키우려는 시도로 보고 있다”며 “많은 투자를 통해 만든 기술을 현대중공업에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가져가는 건 대우조선의 자율 경영 보장에도 어긋난다”고 전했다.
대우조선 본사가 위치한 경남 거제시도 이번 논란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 변광용 거제시장은 지난 9월 청와대 국가안보실, 방위사업청 등에 이의를 제기하고 재평가를 요구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대우조선 측에서 거제시에 재평가를 원한다는 뜻을 전했고, 이에 거제시가 정부에 재평가를 요구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거제시 관계자는 “기존에도 대우조선 매각 반대 입장이었고, 현대중공업의 기술 탈취가 사실이라면 더욱 반대할 것”이라며 “현대중공업은 대우조선의 기술을 활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겠지만 누가 봐도 개연성이 충분히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정치권에서도 현대중공업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서일준 국민의힘 의원실 관계자는 “현대중공업은 도둑 촬영한 KDDX 개념설계 모형을 수주에 활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과거 마덱스(국제해양방위산업전)에서 전시한 두 회사의 개념설계 모형이 거의 같은 것으로 확인됐다”며 “거의 같은 모형을 전시한 것은 설계를 베꼈다는 합리적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서 의원은 또 지난 19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번 인수합병(M&A) 과정 전후에 기술유출 등 심각한 방산비리 문제가 발생했다면 대우조선 매각은 즉각 중단돼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종철 정의당 대표 역시 지난 20일 경남도의회 기자회견에서 “대우조선의 이익을 떨어뜨려 인수와 구조조정을 편하게 하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고 전했다.
기술 탈취 논란이 대우조선 매각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앞의 조선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정책적으로 대우조선 매각을 진행하고 있기에 지역민들의 항의가 쉽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다”면서도 “방산비리와 같은 큰 건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정부도 좌시할 수는 없을 것이기에 매각에도 일정 부분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조선업계 다른 관계자는 “기술 탈취 논란이 사실로 드러나도 정부는 매각과 별개의 문제로 여길 것”이라며 “더불어민주당 경남도당 내에서도 대우조선 매각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고는 있지만 청와대나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이 이를 안건으로 수용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고 전했다.
대우조선 노조와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 등은 경상남도 측에도 대우조선 관련 입장을 요구하고 있다. 경상남도는 대우조선과 관련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매각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은 아닌 것으로 전해진다. 경상남도 관계자는 “대우조선 매각 후 고용 안정 및 기존 거래선 유지 등 대책 마련에 대해 전방위적으로 요구하고 있고, KDDX 입찰에서도 대우조선이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서도 “기술 탈취 논란과 매각을 연결시켜 검토하고 있지는 않다”고 밝혔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우조선 매각을 강행하면 야권과 거제시, 대우조선 구성원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거래 당사자인 현대중공업과 KDB산업은행은 예정대로 매각 작업을 진행 중이지만 기술 탈취 논란과 향후 계획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다. 현대중공업과 KDB산업은행 관계자 모두 “아직 재판 결과가 나오지 않았기에 입장을 밝히기 어렵다”고 전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