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효세율 낮고 각종 감면 혜택에 과세 대상자도 소수…정치권도 현행 유지 ‘한 목소리’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발인이 진행된 28일 오전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운구차량이 나오고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한국이 상속세가 많다고?
재벌 3·4세 시대가 열리면서 상속세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 10월 25일 별세한 고 이건희 회장의 재산은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아들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 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등에게 상속될 예정이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10월 23일 종가 기준 이 회장의 보유 주식 평가액은 18조 2251억 원이다. 상속세는 약 10조 6000억 원으로 추산된다. 지난 9월 28일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과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은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으로부터 각각 약 3200억 원, 1680억 원 상당의 지분을 증여받았다. 증여세는 총 3000억 원으로 추산된다.
이건희 회장 별세를 계기로 증여·상속세가 지나치게 높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네 번째로 명목상속세율이 높다. 증여액이 30억 원 이상이면 최고세율 50%가 적용된다. 특히 앞서의 재벌 3세들은 주식 평가액의 60%를 증여·상속세로 내야 한다. 주식회사의 최대주주 혹은 특수관계인이면 평가액에 20%를 할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상속세는 실효세율(각종 공제 후 실제 세금 비율)이 낮고 내는 사람도 소수에 불과하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2018년 상속세 실효세율은 27.9%다. OECD 국가 평균 상속세 26%와 비교해 별 차이가 없다. 특히 상속 재산 상위 10%의 실효세율은 16%대로 평균에도 미치지 못한다.
감면 혜택으로 과세 대상자도 소수다. 2018년 기준 상속세가 부과된 인원은 8002명뿐이다. 총 피상속인 35만 6109명 중 2.25%만 상속세를 낸 셈이다. 2018년 기준 납부된 상속세는 2조 5197억 원으로 전체 국세 수입에서 0.9%밖에 되지 않는다. 각종 공제 혜택이 많다. 상속세 공제 혜택으로는 △기초공제·인적공제와 일괄공제(5억) 중 큰 금액 △배우자공제 △가업·영농 상속공제 △금융재산 상속공제 △재해손실 공제 △동거주택 상속공제 등이 있다.
OECD 37개국 가운데 13개 국가는 상속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식을 물려받은 뒤 배당소득, 소득세 등이 높아서 전체적인 세금 부담이 높다. 캐나다의 소득세 최고세율은 60%에 달한다. 스웨덴, 포르투갈, 이스라엘 등도 한국보다 소득세율이 높다. 한국의 소득세 최고세율은 42%다. 근로소득세 면세 비율도 높다. 2018년 기준 전체 근로자의 39.8%는 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고 있다.
실제 한국은 OECD 평균 조세부담률과 국민부담률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국회예산정책처의 ‘2020 조세수첩’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국민부담률은 27.3%로 OECD 평균(34%)보다 낮았다. 2018년 기준 OECD 평균 조세부담률은 24.9%로 우리나라(19.9%)보다 높았다. 국민부담률은 한 해 국민들이 내는 세금(국세+지방세)과 사회보장기여금(국민연금보험료, 건강보험료, 고용보험료 등)을 더한 뒤 이를 그해 국내총생산(GDP)으로 나눈 값이다.
지난 6월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을 받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 하고 있다. 사진=임준선 기자
#상속세 완화에 싸늘한 여론
여론과 정치권의 움직임 등을 종합하면, 상속세율이 바뀔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제로’에 가깝다. 한국 대기업 집단을 대표하는 ‘재벌’이란 용어는 다른 나라에는 없다. 외국 사전에도 재벌(Chaebol)이 고유명사로 등재됐다. 기업의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은 채 가족경영을 하는 것이 재벌의 특징이자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특히 재벌들이 불법·편법을 동원해 경영권을 승계하면서 법정에 선 경우도 적지 않다. 상속세율 변화에 대한 여론이 싸늘한 이유 중 하나다. 지난 10월 29일 미디어리서치가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건희 회장이 생전에 에버랜드 전환사채를 저가 배정해 이재용 부회장에게 불법적으로 경영 승계를 도모한 데에 ‘잘못했다’고 응답한 비율이 53.8%에 달하기도 했다.
정치권의 입장도 단호하다. 지난 10월 29일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상속세율 완화여부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검토할 필요 없다”며 “법으로 정해져 있기에 국세청 절차에 따라 부과하면 된다”고 말했다. 전날 정의당은 삼성전자에 과도한 상속세 부담을 낮춰야 한다는 정·재계 일각의 목소리에 대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도 상속세 인하에 대해 단호한 입장이다. 재벌 대기업의 상속‧증여세에 대한 잇따른 탈루 의혹으로 국민 정서가 부정적인 상황에서 구태여 논란을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