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들 ‘생존’ 주문, 버틸 ‘총알’ 두둑…고객 7만 중 3만 단골 “남이 가지 않은 길 걸어온 성과”
석채언 대표가 혜초여행사를 설립한 건 1992년이다. 그는 코로나19 장기화에도 직원들을 내보내 여행사를 반 토막 내거나 사업을 접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사진=이종현 기자
#위기 넘길 힘은 자금과 믿음
코로나19로 인한 타격에 여행업계에는 요즘 ‘11월 실업대란이다’ ‘여행사 줄초상이다’ 등등 말들이 많다. 실제로 굴지의 여행사들이 권고사직과 희망퇴직 등 사실상 직원 줄이기를 감행하고 있거나 앞두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해외 트레킹 전문인 혜초여행사도 예외는 아니다. 100명에 가까운 직원들이 대부분 정부의 특별고용유지지원금을 받으며 유급휴직 중이고 유급휴직이 끝나면 무급휴직에 들어간다. 10여 명의 인원만이 돌아가며 출근해 최소한의 업무를 보고 있다.
석채언 대표가 혜초여행사를 설립한 건 1992년이다. 그는 “28년 여행사를 운영하면서 IMF, 사드, 사스, 오일쇼크 등 산전, 수전, 공중전, 세균전까지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은 다 겪었다. 코로나 역시 그 어려움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렇게 장기화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누구나 그랬다. 올해 2월 코로나19로 인해 해외여행이 전면 중지됐을 때 여행업계에서는 여름이면 풀릴 거라고, 가을이면 괜찮아질 거라고들 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고 코로나19는 최소 2~3년간 업계의 발목을 붙잡을 거라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석 대표 역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는 요즘 다른 여행사들이 하듯 직원들을 내보내 여행사를 반 토막 내거나 사업을 접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석 대표는 “호황이었던 날들이 있었으면 불황도 있는 거다. 물론 코로나19는 기존의 악재나 불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 세계적인 악재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3~4년마다 주기적으로 호황과 불황을 거듭하는 여행업계의 사이클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사태가 10개월이 넘어가고 장기화로 접어들면서 매출은 전혀 없고 인건비와 임대료 등 지출만 있는 상황에서 석채언 대표가 대범하게 “버텨보겠다”고 말하는 이유는 아직은 버틸 만한 ‘총알’이 꽤 두둑하기 때문이다. 석 대표는 “보유현금이 아직은 70억~80억 원 남아 있다. 혜초여행사는 100여 명의 주주들이 투자한 주식회사다. 그중엔 혜초의 단골 고객들도 꽤 있고 직원들도 상당수”라고 했다. 100여 명의 주주들은 1인당 3000만 원에서 5000만 원 정도를 혜초에 투자했다고 한다.
당기순이익이 27억 원을 찍었던 해에도 석 대표는 주주들에게 배당을 짜게 줬다. 주주총회에서 그는 주주들에게 “사내 보유금이 100억 원은 돼야 갑작스런 위기를 맞았을 때 회사를 지켜낼 수 있다”며 배당이 짠 이유를 밝혔다. 고객에게 받은 여행경비보다 해외 여행지에 줘야 할 대금이 2배로 뛰어버린 IMF를 겪은 석 대표는 지금도 “그때가 가장 어려웠다”고 말한다. 그때 ‘벌어서 회사를 키우긴 어렵겠다’고 판단했고 갖은 고생 끝에 회사를 유지해 여러 주주들의 투자를 받게 됐다고 했다. 의리 있는 혜초의 주주들은 코로나19가 한창인 상황에서도 원금 회수보다는 혜초의 ‘살아남기’를 주문했단다. 저마다 어려운 시대에 주주들마저 대범하다. 그에도 나름의 이유는 있다.
#혜초의 경쟁력은 전문성, 그리고 사람
히말라야와 알프스 등의 전문적인 트레킹 상품을 취급하는 혜초에서는 적어도 2년 이상 근무하고 교육을 받아야 전화 상담이 가능하다. 사진=이종현 기자
혜초여행사의 대표 상품은 히말라야 트레킹이나 유럽과 남미의 고산 트레킹 등인데 국내에선 혜초 외에는 잘 찾을 수 없는 상품이 많다.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는 히말라야 트레킹이라도 내용의 디테일은 다르다. 혜초여행사는 네팔 현지에 직영여행사를 두고 네팔 직원들이 한국인 고객을 잘 ‘케어’할 수 있도록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공부도 시킨다. 석채언 대표는 혜초를 설립하기 전 젊은 시절 히말라야가 좋아 무작정 네팔에 머물며 직접 산악 가이드를 한 경험도 있다. 혜초의 직원들 상당수도 석 대표와 ‘같은 과’다. 산악인이라 할 만한 직원도 꽤 있다.
그래서 혜초에는 유독 단골이 많다. 열 번, 스무 번씩 혜초 상품을 구매한 고객도 상당수다. 혜초를 통해 여행을 간 고객이 7만여 명인데 그 가운데 3만여 명이 단골이라 할 만큼 단골 고객의 충성도가 높다. 그러다보니 여행 중에 자주 마주치게 되는 고객은 ‘절친’이 되기도 한다. 한번은 악천후로 인해 제대로 여행을 하지 못한 고객이 불만접수를 하고 소송까지 걸었지만 이후 다시 혜초의 상품을 선택했다. 석 대표조차 의아해 이유를 물어보니 “원하는 상품이 혜초에밖에 없어서”였단다. 혜초는 여행시장에서 다른 여행사에서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노하우와 인프라를 가지고 꽤 오랫동안 독보적인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이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길을 걸어온 성과라면 성과다.
혜초의 경쟁력이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보통의 패키지 여행사들처럼 단순히 여행상품을 만들어 현지 여행사에 넘겨주는 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답사를 통해 처음부터 끝까지, 식사 하나하나 스케줄을 기획하고 관리한다. 흔히 여행사의 핵심은 인력이라고들 한다. 특별한 자본이나 기술이 필요 없는 여행업에서 사람만큼 중요한 자산은 없다는 뜻이다. 직원 개개인의 노하우와 경험이 모여 여행사의 역량을 만든다. 타사에 없는 전문적인 상품을 직접 기획하고 꾸리는 혜초 같은 여행사에 직원 한 명 한 명은 그야말로 자산이자 자원이다.
그만큼 직원 한 명 키우는 데에 상당한 공을 들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함부로 내보낼 수도 없는 직원들이다. 100명의 직원들 역시 유급휴직과 무급휴직을 하며 평소보다 적은 월급을 가져가면서도 퇴사할 의사를 밝힌 직원은 아직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직원의 고용유지를 위해서는 정부의 고용유지지원금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회사가 직원을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가 더 중요해 보인다.
혜초에는 유독 단골고객이 많다. 열 번, 스무 번씩 혜초 상품을 구매한 고객도 상당수다. 혜초를 통해 여행을 간 고객이 7만여 명인데 그중 3만여 명이 단골이라 할 만큼 고객의 충성도가 높다. 사진=혜초여행사 제공
#제주, 울릉도를 혜초 스타일로
현재로서는 전혀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코로나19로 인한 여행시장의 전망은 어둡지만 석채언 대표는 “코로나19 백신이 올해 말부터 조금씩 나온다는 가정 하에 내년 6월쯤부터는 아주 조금씩이라도 여행시장이 풀릴 거라 기대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때를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인기 있는 트레킹 지역의 상품은 한두 달 전에 준비해서는 꾸려지지 않는다. 호텔과 차량 등 기본적인 것들을 6개월 전부터는 준비하고 있어야 제대로 상품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해외가 풀릴 때까지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이 국내여행 상품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마저도 수익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꾸준한 일거리를 통해 직원들을 교육하고 이탈을 방지해 사업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직원들이 고객의 여행을 리드하는 것에 감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사실 국내 상품은 개별여행이 왕성하고 상품 자체가 손바닥 보듯 뻔한 부분이 있어서 판매가 저조할 수밖에 없다. 마진율도 약해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그럼에도 현재 제주와 울릉도, 남해, 신안, 지리산 등 국내 트레킹 위주의 상품을 개발하고 여행을 진행하고 있다. 11월부터는 제주에 직접 캠프를 꾸려 올레길과 한라산 트레킹 상품에 힘을 쏟는다. 울릉도 상품도 한창 개발 중이다. 국내여행을 패키지화시키되 혜초만이 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누군가에게는 일생의 단 한번이 될지도 모르는 여행을 ‘진짜여행’으로 만들어 주고 싶다는 석채언 대표는 “그래도 한국에 혜초 같은 여행사 하나쯤은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며 여행의 미래를 이야기했다. 사진=혜초여행사 제공
석 대표가 말하는 혜초의 상품들은 해외건 국내건 ‘줄 만큼 주고’ 떠나는 여행이다. 저가 상품은 당연히 없다. 전문가의 안내와 질 좋은 식사, 합리적인 호텔 등이 더해진 상품가는 싸지 않다. 저가를 위해 감내해야 하는 정당하지 않은 요소들은 빠진다. 대신 내 가족의 여행 계획을 짜듯, 어디 가면 무엇은 꼭 먹어봐야 하고, 바닷가에 가면 씨뷰 객실에서는 자야 한다는 등 고객의 입장에서 ‘돈 내고 가도 아깝지 않은’ 제대로 된 상품을 만든다.
석채언 대표는 “혜초의 상품이 싸지는 않다. 하지만 비싸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정품을 정가에 사듯, 꼼수 없는 괜찮은 여행상품을 정가에 사는 것이다. 우리는 전체 여행자 가운데 상위 10%의 고객을 혜초의 고객으로 만들려고 한다. 돈 많은 상위 10%가 아니라 자존심이 있는 상위 10%다”고 설명하며 “혜초의 상품은 프리미엄 상품이라기보다는 누구나 누릴 권리가 있는 정상적인 상품”이라고 말했다.
누군가에게는 일생의 단 한번이 될지도 모르는 여행을 ‘진짜여행’으로 만들어 주고 싶다는 석 대표는 “그래도 한국에 혜초 같은 여행사 하나쯤은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며 여행의 미래를 이야기했다. 석채언 대표와 인터뷰를 끝내며 그가 28년 동안 넘었던 전 세계의 수많은 산들처럼 이번에도 어려운 산을 넘어가듯, 결국엔 잘 넘어갔으면 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일었다. 그의 사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코로나19가 끝난 후 우리가 가게 될 여행을 위해서.
이송이 기자 runaindi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