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전을 명승부로 바꾼 2016 안익훈의 호수비…삼중살과 끝내기 실책 각각 세 차례뿐
단기전인 포스트시즌에서 수비 집중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난 7월 10일 키움-KIA전 연장 10회 말 무사 1루에서 키움 1루수 전병우가 아웃카운트 2개를 잡아내고 미소 짓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특히 수비 집중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키움 히어로즈는 단 한 경기만 져도 가을야구가 끝나는 올해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앞두고 ‘수비 강화’를 위해 외국인 타자 에디슨 러셀을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했을 정도다. 몸을 날려 잡아낸 타구 하나, 잠깐 방심하다 뒤로 빠뜨린 공 하나가 엄청난 결과로 이어지는 무대가 포스트시즌이다. 그동안 수많은 호수비와 실책이 한 팀의 명암을 갈랐다.
#가을야구를 밝히는 ‘슈퍼 캐치’의 미학
LG 트윈스는 2016년 NC 다이노스와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연장 11회말 양석환의 끝내기 안타로 값진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양상문 당시 LG 감독은 경기 후 “내 마음속 MVP는 안익훈”이라고 했다. 이유가 있다. 양석환의 끝내기 안타가 나오기 직전인 연장 11회초 2사 1·2루에서 안익훈은 말 그대로 ‘슈퍼 캐치’를 해냈다. 우중간을 가르는 나성범의 2루타성 타구를 환상적인 러닝캐치로 잡아냈다. 대량 실점으로 이어질 뻔했던 위기를 무사히 막았다. 죽다 살아난 LG는 다음 공격에서 결승점을 뽑아내 이겼다.
사실 이 경기는 양 팀 합쳐 25개의 4사구가 나온 졸전이었다. 수많은 주자가 베이스를 밟았지만, 최종 스코어는 2-1. 역대 포스트시즌 한 경기 최다 4사구 기록까지 경신했다. 그런데 경기 막바지에 나온 두 번의 호수비 덕에 이 게임이 명승부로 탈바꿈했다.
안익훈의 호수비가 나오기 불과 한 시간 전, ‘피해자’ 나성범도 한 차례 패배 위기에서 팀을 구했다. 1-1 동점이던 8회초 2사 만루에서 채은성의 안타성 타구를 몸을 날려 잡아냈다. 그렇게 위태롭던 승부를 연장전으로 끌고 갔다. 하지만 결국 안익훈이 다시 호수비로 경기 흐름을 바꾸고 팀에 승리를 안기면서 LG가 웃었다. 단기전에서 수비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 다시 한 번 일깨웠다.
안타깝게도 호수비는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 그래서 더 쉽게 잊히기도 한다. 안익훈의 슈퍼 캐치는 플레이오프 3차전 기록지에 나성범의 ‘우익수 플라이’로 표기됐다. 기록의 가치가 그 어느 스포츠보다 중요한 야구에서 ‘기록은 진짜 보고 싶은 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는 격언이 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LG와 KIA 타이거즈가 맞붙은 그해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도 그랬다. 1차전에선 KIA 유격수 김선빈이 결정적인 다이빙캐치로 병살 플레이를 연결해 승리의 밑거름이 됐다. 2차전에선 KIA 노수광이 0-0으로 맞선 8회초 2사 1·3루에서 양석환의 타구를 몸을 날려 잡아내 실점을 막았다.
KIA 외야수 김호령은 9회말 외야로 날아온 김용의의 큼직한 타구를 끝까지 쫓아가 잡아내면서 끝내기 안타가 아닌 끝내기 희생플라이로 둔갑시켰다. 잡든 못 잡든 패배는 피할 수 없었지만 상대가 실수할 수 있는 단 1%의 확률이라도 노리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투혼을 발휘한 것이다. KIA가 패하고도 승리 팀인 LG만큼 많은 박수와 조명을 받은 이유다.
2018년엔 넥센(현 키움) 이정후가 타격만큼 수비도 잘하는 선수라는 걸 보여줬다. 그 무대 역시 KIA와 와일드카드 결정전이었다. KIA가 넥센을 5-5로 따라 붙은 7회초 무사 1루. KIA 중심타자 최형우가 풀스윙으로 타구를 외야 멀리까지 보냈다. 동시에 좌익수 이정후가 그 타구를 노려보며 전력질주했다. 좌중간을 완벽하게 가를 것처럼 보였던 타구는 낙구 지점을 정확하게 포착한 이정후의 글러브로 거짓말처럼 빨려 들어갔다. 좌익수 플라이. 여기에 안타를 확신하고 이미 3루 근처까지 갔던 1루 주자 나지완까지 2루에서 태그아웃됐다. 순식간에 아웃카운트 2개가 올라갔고, 넥센은 여세를 몰아 10-6으로 이겼다.
지난 5일 준플레이오프 패배로 가을 야구를 마무리한 LG 트윈스는 수비 집중력에서 아쉬운 모습을 보였다. 두산 이유찬의 득점 장면. 사진=연합뉴스
#가장 짜릿한 순간, 삼중살
박진감 넘치는 다이빙 캐치나 러닝 캐치도 멋지지만, 손발이 척척 맞는 내야진의 더블 플레이도 짜릿한 희열을 안긴다. 심지어 아웃카운트 3개를 타구 하나로 한꺼번에 잡아낼 수 있다면 더 그렇다. 하나의 타구로 세 명의 주자를 아웃시키는 삼중살은 역대 포스트시즌에서 단 세 차례만 나왔을 정도로 귀한 기록이다.
그중 하나가 2004년 현대 유니콘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펼쳐졌다. 역대 유일하게 9차전까지 맞붙은 혈전의 한복판이었다. 이미 8차전 개최가 확정된 상황에서 삼성과 현대는 7차전 선발로 각각 전병호와 정민태를 내세웠다. 삼성은 1회초 박한이와 김종훈의 연속 안타로 무사 1·2루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이때 양준혁이 때린 타구가 현대 1루수 이숭용의 글러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일단 타자 주자가 아웃되면서 원 아웃. 이숭용은 그대로 1루를 밟아 이미 2루로 출발했던 1루 주자 김종훈을 아웃시켰다. 투 아웃. 그리고 2루로 다시 송구했다. 이미 스타트를 끊었던 2루 주자 박한이가 미처 귀루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게 스리아웃이 됐다. 한국시리즈 사상 첫 트리플 플레이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삼성은 세 차례밖에 없는 삼중살 기록을 두 번이나 당한 불운의 팀이기도 했다. 그보다 1년 전인 2003년 SK 와이번스와 준플레이오프 1차전 7회말에도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무사 1·3루 풀카운트에서 타자 김한수가 삼진을 당했고, 그 사이 1루 주자 양준혁이 2루로 스타트를 끊었다가 런다운에 걸려 아웃됐다. 이어 3루 주자 마해영도 그 틈을 타 홈으로 뛰어 들다가 태그아웃됐다. 포스트시즌 최초의 삼중살이자 완벽한 작전 실패였다.
2018년 가을엔 통산 3호 삼중살이 추가됐다. 한화 이글스와 넥센의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나왔다. 넥센이 0-2로 끌려가던 2회말 무사 1·2루에서 넥센 선발 제이크 브리검이 한화 김회성에게 3루수 땅볼을 유도했다. 3루 파울라인 바로 근처에 있던 김민성이 이 타구를 잡아 3루를 밟고 첫 번째 아웃 카운트를 올렸고, 2루수 송성문에게 정확하게 송구해 1루 주자 최재훈을 아웃시켰다. 이어 송성문은 1루수 박병호에게 다시 공을 던져 발이 빠르지 않은 타자 주자 김회성까지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 내야 땅볼 타구로 삼중살이 나온 최초의 사례였다.
#호수비보다 더 오래 기억되는 치명적 실책
호수비는 상대의 득점을 막고 스코어를 그대로 유지한다. 반면 실책은 ‘우리 팀’의 실점으로 연결될 때가 많다. 그래서 야구팬들은 결정적인 호수비보다 치명적인 실책을 더 오래 기억한다. 이 때문에 매년 가을에는 영웅만큼 많은 ‘역적’들도 그라운드에 출몰한다. 한 시즌 내내 팀을 포스트시즌으로 이끄는 데 앞장선 선수가 한순간의 실수로 고개를 숙이기 일쑤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 한국시리즈부터 그랬다. OB 베어스(현 두산)와 삼성의 한국시리즈 4차전. 삼성은 4-2로 앞서다 7회말 동점을 허용한 뒤 계속된 2사 2·3루 위기를 맞았다. 여기서 김우열이 친 평범한 플라이를 투수 황규봉과 포수 이만수가 서로 잡으려다 충돌해 공을 떨어뜨렸다. 그 사이 3루주자 윤동균이 홈을 밟았다. 김이 샌 황규봉은 김유동에게 추가로 2타점 적시타까지 맞아 승기를 내줬다. 두산의 우승에 분수령이 된 경기였다.
1990년 해태 타이거즈(현 KIA)와 삼성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는 천하의 선동열 카드마저 실책 앞에 무너졌다. 선동열은 0-0으로 맞선 5회초 무사 2루에서 이강철에게 바통을 이어받아 마운드에 올랐다. 타석에 있던 김용국은 볼카운트 1B-2S서 포수 머리 위로 뜨는 파울플라이성 타구를 날렸다. 그러나 이 공을 포수 장채근과 1루수 김성한이 서로 미루다 놓쳤다. 위기를 넘긴 김용국은 바로 다음 공을 받아쳐 선제 결승 2점 홈런을 쳤다. 선동열의 몇 안 되는 포스트시즌 패배가 그날 나왔다.
2014년 넥센과 삼성의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는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일도 벌어졌다. 2승 2패로 팽팽하게 맞선 상황에서 넥센은 9회말 1-0 리드를 지키기 위해 마무리 투수 손승락을 올렸다. 먼저 3승을 올려 우승에 가까이 다가갈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1사 후 나바로의 평범한 유격수 땅볼 타구를 현역 최고 유격수였던 강정호가 놓치면서 흐름이 달라졌다. 이 실책은 결국 넥센의 1-2 끝내기 패배로 이어졌다. 유리한 고지를 점할 뻔했던 넥센은 6차전에서 대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세 번뿐인 끝내기 실책의 아픔
물론 끝내기 실책은 이보다 더 뼈아프다. 역대 포스트시즌 끝내기 실책은 세 번밖에 없었다. 1998년 준플레이오프 1차전이 최초였다. 두산 외국인 2루수 에드가 케세레스는 연장 10회말 1사 2루에서 LG 김재현의 강한 2루수 땅볼 타구를 뒤로 빠트렸다. 팽팽하던 승부에 허무하게 종지부를 찍는 포스트시즌 첫 끝내기 실책이었다.
두 번째 끝내기 실책도 역시 두산. 이번엔 아예 시리즈를 끝내는 실책이었다. 2012년 롯데와의 준플레이오프 4차전. 3-3으로 맞선 연장 10회말 1사 2루 홍성흔 타석 때 두산 투수 스캇 프록터의 3구째가 양의지의 미트를 맞고 뒤로 굴러 나갔다. 롯데 2루 주자 박준서가 3루까지 내달렸다. 공을 잡은 양의지는 박준서를 아웃시키기 위해 3루로 공을 던졌다. 그러나 이 송구가 3루수 이원석의 글러브에 맞고 외야로 굴러갔다. 박준서는 홈까지 달려왔고, 끝내기 결승점을 뽑았다.
2015년 도입된 최초의 와일드카드 결정전도 끝내기 실책으로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넥센과 SK가 4-4로 팽팽하게 맞선 연장 11회말 2사 만루. SK 구원투수 박정배는 넥센 윤석민을 유격수 플라이로 유도했다. 그러나 투수, 2루수, 유격수 가운데 누구도 이 공을 잡지 못했다. 결국 SK 유격수 김성현의 끝내기 실책으로 기록됐고, SK는 힘겹게 올라온 가을 잔치를 1경기 만에 마감했다.
실책 퍼레이드 속에 악몽 같은 하루를 보낸 선수들도 있다. 태평양 돌핀스 정진호(1989년 준플레이오프 3차전), 두산 홍성흔(2000년 한국시리즈 2차전), 현대 박종호(2000년 한국시리즈 6차전), 두산 이대수(2007년 한국시리즈 3차전) 등은 한 경기에서 3개씩 실책을 범하는 지옥을 경험했다. 특히 수비 잘하기로 이름났던 이대수는 6회 한 이닝에만 평범한 타구를 3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패닉에 빠졌다. 이대수는 훗날 “그때는 정말 귀신에 홀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신 차려야지’ 하고 집중하려 할수록 긴장이 돼 더 실수가 나왔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 이닝에만 실책 3개가 나와 무너진 팀들도 역대 7번이나 나왔다. 2001년 두산과 한화의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선 한 경기에서만 양 팀 합계 실책 7개가 쏟아지는 졸전이 펼쳐졌고, OB는 1987년 해태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만 무려 6개의 실책을 범해 역대 한 경기 한 팀 최다 실책의 불명예를 안았다. ‘실책은 전염된다는 속설’도 포스트시즌에는 확실히 유효하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