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로 아내 딸 잃어 “나는 블랙홀로 빨려들어갔다”…성추행? 다정함? 지나친 스킨십 논란 휩싸이기도
가족력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말을 더듬었고, 또래 친구들은 이런 그를 놀리면서 모스부호인 ‘대시(dash)’ 혹은 ‘조 임페디멘타(장애)’라고 불렀다. 하지만 언어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던 그는 거울 앞에서 시를 암송하는 방법으로 이를 극복했다(관련기사 진짜 적은 트럼프가 아니다? 77세 바이든 향한 건강 염려 시선).
넉넉지 못한 가정환경 탓에 어릴 때부터 학교 창문을 닦거나 정원을 손질하는 등 잡일을 하면서 학비를 마련했다. 꿈에 그리던 명문 ‘아치미어 아카데미’ 고등학교에 입학한 바이든은 착실한 학생이었고, 작은 몸집에도 불구하고 미식축구팀에서는 눈에 띄는 활약을 했다.
델라웨어대학에서는 역사와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훗날 학창 시절에 대해 바이든은 “나는 대학생활 처음 2년 동안 공부보다는 미식축구, 여자, 파티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1961년 존 F 케네디의 취임식을 보고 자극을 받아 정치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고도 말했다.
1987년 민주당 역사상 두 번째로 젊은 대선 경선 후보였던 조 바이든은 2020년 역대 최고령 대통령으로서 백악관 입성을 앞두고 있다. 1987년 6월 경선 출마 발표 모습. 사진=연합뉴스
대학 2학년 때 바하마로 여행을 떠났던 바이든은 그곳에서 시라큐스대학에 재학 중이던 네일리어 헌터를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연인이었던 헌터의 학교로 편입하기 위해 뒤늦게 학업에 전념했던 바이든은 1965년 델라웨어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시라큐스대 로스쿨에 입학했다. 바이든과 헌터는 이듬해인 1966년 결혼했으며, 슬하에는 보, 헌터, 그리고 나오미, 2남 1녀를 낳았다.
로스쿨 시절 바이든의 성적은 눈에 띄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첫 해에는 법률 검토 기사에 대한 인용을 잘못했다는 이유로 낙제하기도 했다. 1968년 로스쿨을 졸업한 뒤 델라웨어주 윌밍턴으로 건너가 로펌에서 일했으며, 민주당에 입당해 왕성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970년 뉴캐슬 카운티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그리고 마침내 1972년 29세의 젊은 정치인이었던 바이든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공화당의 명망 높은 현역 상원의원이었던 J 칼렙 보그스의 대항마로 신출내기와 다를 바 없던 바이든이 낙점된 것이다. 바이든의 당선을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가족들의 열렬한 후원과 조직적인 선거운동에 힘입어 바이든은 치열한 접전 끝에 역전승을 거두면서 미국 역사상 다섯 번째로 젊은 연방상원의원에 당선됐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해 12월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두고 아내와 세 자녀와 함께 크리스마스트리를 사러 나가던 길에 그만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고로 아내와 당시 겨우 한 살이었던 딸은 숨졌고, 아들 보와 헌터는 중상을 입었다.
바이든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신이 나에게 끔찍한 장난을 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너무 화가 났었다”고 말하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단지 블랙홀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가슴 속에서 텅 빈 구멍이 자라나는 것을 느꼈다”며 슬퍼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와 딸을 기리기 위해서 바이든은 매년 12월 18일 하루 동안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추모하는 마음으로 보내고 있다.
가족의 격려로 다시 일어선 바이든은 상원의원으로서 임무를 다하기 위해 정가로 돌아왔다. 다만 워싱턴에서 취임선서를 하는 대신 두 아들이 입원해있는 윌밍턴 병실에서 취임선서를 했다. 그리고 가능한 두 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워싱턴으로 이사를 가지 않고 윌밍턴에서 살기로 결정했으며, 상원의원 시절 내내 매일 워싱턴으로 출퇴근하는 관행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1977년 상원의원 시절 만난 영어 교사 질 제이콥스와 재혼했다.
2008년까지 36년 동안 연방상원의원으로 일한 바이든은 특히 외교문제에 있어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으며, 외교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대표적인 외교정책 전문가로서 존경 받았다.
1987년 워싱턴에서 가장 유망한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한 바이든은 그해 대선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민주당 역사상 두 번째로 젊은 경선 후보였던 바이든은 젊고 활기찬 이미지로 민주당 유권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영국 노동당 당수인 닐 키녹의 연설문을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고 중도 사퇴하면서 꿈을 접어야 했다.
선거 운동 기간 심한 두통을 겪었고, 중도하차 직후 받은 건강 검진 결과 치명적인 뇌동맥 파열을 진단받았다. 목숨을 건 뇌수술 후 7개월 동안의 재활을 거쳐 상원의원으로 복직했다.
첫 번째 대선 도전에 실패하고 20년 만인 2007년 다시 한번 대통령 출마를 결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민주당 내 쟁쟁한 두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의 대결 구도로 치러졌던 경선에서 이렇다 할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 채 또 한 번 고배를 마셨다. 당시 바이든은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1% 미만의 득표율을 보인 후 중도 하차했다.
2015년 6월 25일 조 바이든 부통령(왼쪽)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로즈가든 연설을 마치고 오벌오피스로 돌아가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그러나 몇 달 후, 민주당 대선후보로 지명된 오바마가 바이든을 러닝메이트로 지목하면서 다시 선거에 뛰어들었다. 당시 오바마 선거캠프는 노동자 계층 가정에서 자란 바이든이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등 부동층이 많은 블루칼라 유권자들에게 경제회복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힘이 되길 바랐다.
결국 2008년 11월 2일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 차이로 승리하면서 오바마와 함께 백악관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으며 오바마는 44대 미국 대통령에, 그리고 바이든은 47대 부통령에 취임했다. 부통령 시절 바이든은 주로 대통령의 막후 참모 역할을 했지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과 관련된 연방 정책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는 특히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2012년 오바마와 바이든은 재선에 성공해 연임했으며, 그해 말 바이든은 그가 얼마나 영향력 있는 부통령인지를 다시 한 번 전 미국인에게 보여주었다. 당시 미국의 재정절벽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증세와 예산 삭감에 대한 초당적인 합의를 이뤄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2013년 1월 1일 수개월간의 힘든 협상 끝에 마침내 재정절벽 법안이 상원에서 통과됐다. 그리고 하원은 같은 날 오후 이를 승인했다. 퇴임 후 2016년 대선에 출마할 것으로 예상됐으나, 결국 출마하지 않았다.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술은 전혀 입에 대지 않고 있으며, 호탕한 성격으로 사람들과의 유대감은 높은 편이다. 다만 지나치게 긴밀한 스킨십을 하는 통에 몇 차례 성추행 논란에 휩싸인 바 있으며, 이 때문에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소름끼치는 조’라고 불리기도 했다. 가령 여성의 어깨에 손을 얹거나 머리 냄새를 맡거나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를 두고 다른 한편에서는 친밀감의 표시라고 두둔하면서 ‘다정한 할아버지’라고 여기고 있기도 하다.
이런 논란에 대해 생전에 친분이 두터웠던 존 매케인 전 공화당 상원의원의 딸인 메건은 “바이든은 좋은 사람이다. 또 품위가 있는 사람이다. 그가 나를 불편하게 만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며 두둔하기도 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