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민 의장 ‘야구놀이’가 발단, 제보자 색출도…키움 ‘이택근 코치직 요구’ 거론 등 논점 흐리기 꼼수
키움 출신 ‘레전드’로 평가받는 이택근은 최근 KBO에 구단을 향한 ‘징계요구서’를 제출했다. 사진=연합뉴스
발단은 허민 의장의 이른바 ‘야구놀이’ 파문이다. 허 의장은 2019년 6월 2일 고양 히어로즈(키움 2군)가 경기장 및 훈련장으로 대여해 사용하고 있는 고양 국가대표 야구훈련장을 방문했다. 퓨처스리그 경기가 없던 날이라 선수들은 일정상 오전 훈련을 마친 뒤 퇴근하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내야수 김은성(27)과 외야수 예진원(21)은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야구장에 남았다. ‘투수’로 나선 허 의장의 공을 타석에서 쳐 보기 위해서였다.
#사건의 발단이 된 허민의 ‘야구놀이’
허 의장은 유니폼까지 입고 마운드에 올라 포수를 앉혀 놓고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일과 외 시간에 구단 고위 관계자가 팀 훈련장에서 소속팀 선수들을 불러 놓고 야구를 하는 장면은 다른 어느 프로 구단에서도 볼 수 없는 촌극이다. 구단 소속 선수들을 개인 훈련 상대로 이용한 셈이다.
강태화 키움 홍보·마케팅 상무는 당시 이와 관련해 “(허 의장이) 야구를 하러 방문한 건 아니다. 2군 운영 현황을 보고 싶다고 해서 2군 감독, 운영팀장과 방문 일정을 조율했다. 실제로 당일 감독과 일부 선수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고충도 들었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2군 현황을 둘러보려고 했던 허민 의장이 왜 자신의 유니폼과 스파이크, 모자까지 지참했느냐’는 질문에는 마땅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다만 “허 의장이 국내에서 접하기 쉽지 않은 너클볼을 던지지 않나. 2군 타자들이 한 번 경험해 보면 어떨까 해서 타자들에게 의사를 물었고, 선수들이 ‘한번 쳐 보고 싶다’고 자발적으로 나서 자리를 마련했다. 다른 선수들에게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훈련 스케줄 종료 후 진행했다”고 해명했다.
이어 “그 후 외야수 박정음도 추가로 참여 의사를 밝혔고, 코치 한 명도 ‘나도 너클볼을 경험해 보고 싶다’고 말해 총 4명이 참여했다. 약 20~25분 야구를 하고 마무리했다”며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앞으로는 허 의장이 키움 선수들과 함께 야구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사과의 제스처를 취했다.
성공한 벤처사업가로 불리는 허민 의장은 오랜 기간 야구선수를 꿈꿔 온 야구광이다. 전설적인 너클볼 투수 필 니크로를 찾아가 너클볼을 직접 배운 일화는 유명하다. 2012년 미국 프로야구 시애틀 입단 테스트를 받았고, 2013년부터 3년간 미국 독립리그 록랜드 볼더스에서 선수로 뛰었다. 2011년 한국 최초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를 창단해 4년간 운영한 경력도 있다. 이장석 전 대표이사가 횡령·배임 혐의로 구속 수감된 뒤 끊임없이 ‘옥중경영’ 의혹을 받던 키움은 외부에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허 의장을 ‘경영 감시자’로 영입했다.
그러나 허민 의장이 키움 구단 운영에 관여하기 시작한 뒤 키움은 오히려 더 큰 논란에 자주 휩싸였다. 2군에서 ‘야구놀이’ 사건에 앞서, 2월 스프링캠프에서 이미 비슷한 월권을 행사해 빈축을 샀다. 키움 선수들이 두 팀으로 나눠 치른 자체 평가전에서 원정팀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2이닝 3피안타 2볼넷 무실점’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아마추어인 허 의장이 박병호, 서건창, 김하성, 이정후 등 내로라하는 리그 정상급 타자들을 상대로 공을 던졌다.
키움 구단은 이 부분에 대해서도 “구단이 먼저 요청했다”고 거듭 허민 의장을 감쌌다. “선수단 사기 진작을 위해 캠프지 방문을 부탁드렸다가 기왕 오신 김에 이벤트성으로 한번 경기해 보면 재밌겠다고 판단했다. 허 의장 본인도 독립구단을 운영해 봤기에 구단 제안을 거절했지만, 팀에서 재차 부탁해 어렵게 수락했다”고 부연 설명했다. ‘하는 수 없이’ 마운드에 올랐다는 허 의장은 스스로 “한 달간 몸을 만들어 등판을 준비했다”며 즐거워했고, “서건창을 삼진으로 잡으려 한 게 내 잘못”이라고 경기 내용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야구계 보기 드문 선수와 구단 간 진실공방은 허민 의장의 이른바 ‘야구놀이’가 발단이 됐다. 사진=연합뉴스
#3시간 만에 거짓으로 드러난 키움의 공식 입장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는 거다. 키움은 허민 의장의 2군 ‘야구놀이’ 장면이 한 방송사 보도를 통해 공개되자 ‘제보자 색출’에 나섰다. “구단의 판단 착오였다. 앞으로는 조금이라도 오해의 소지를 만들지 않겠다”고 고개를 숙여 놓고, 뒤에서는 다른 태도를 취했다.
일단 2군 구장 CCTV 영상부터 확인했다. 그 결과 구단 관계자들 사이에도 잘 알려진 이택근의 오랜 팬이 그 영상을 찍었다는 걸 알아냈다. 이택근은 징계 요구서에 “애초에 고양 국가대표 야구훈련장은 사회인 야구단들도 종종 사용하는 공공시설이다. 구단이 CCTV를 임의로 설치하면 안 되는 장소다. 그런데 구단은 불법적으로 설치한 자체 CCTV로 야구팬을 사찰했고, 그 후 나를 불러 그 팬의 영상 제보 여부와 그 배후를 말하라고 강요했다”고 썼다.
언론을 통해 이택근의 ‘품위손상 징계’ 요청이 알려지자 키움은 12월 9일 오후 5시 보도자료를 냈다. 일단 “이택근이 두 차례에 걸쳐 내용증명을 보내 CCTV 사찰과 부당한 지시에 관한 공개 사과를 요구했다. 자신의 명예 실추와 정신적 피해를 회복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요구했다”며 “그러나 구단이 제보 영상을 촬영한 분을 사찰하거나 이와 관련해 이택근에게 (제보자의 신상 공개를) 지시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부인했다.
이어 “당시 구단이 CCTV를 확인한 이유는 일반인 출입금지 구역에서 제보 영상이 촬영된 것으로 추측했기 때문이다. 방송 보도 내용을 보니 영상이 촬영된 곳은 2군 운영을 담당하고 있는 운영2팀 사무실 주변공간이었다”고 부연 설명했다. 또 “운영2팀 사무실은 지난해 1월 선수단 여권이 들어 있던 여행 가방 도난 사고가 발생했던 곳이다. 이후 필요에 따라 구단이 자체적으로 CCTV를 설치한 것뿐이다. 보안 점검 차원에서 CCTV를 돌려봤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CCTV 확인 후에는 보안상 추가 조치가 필요 없다고 판단해 구단은 영상을 촬영한 분에게 어떠한 행위도 취하지 않았다”는 입장도 밝혔다. “구단과 선수는 양측간의 계약을 통해 이뤄진 관계다. 따라서 구단이 선수에게 야구와 관련되지 않은 일을 지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이택근과 같은 프랜차이즈 선수에게 지시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고 하소연했다.
그러나 키움 구단의 이토록 장황한 해명은 보도자료가 배포된 지 3시간 만에 거짓으로 드러났다. 또 다시 한 방송사에서 김치현 키움 단장 목소리가 담긴 녹취록을 공개했다. 김 단장은 지난해 6월 이택근과 대화에서 “(촬영자가) 너의 팬이라서 (허민) 의장님은 화가 많이 나셨다. ‘명예훼손’으로 경찰 조사를 요청하겠다고 한다”며 팬의 이름과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요구를 했다.
김 단장은 또 허민 의장의 최측근 하송 대표이사가 막 취임한 지난해 11월, 이택근과 다시 면담했다. “(대표가) 혹시 (배후를) 확인해줄 수 있느냐고 개인적으로 부탁하신다. (하 대표가) 의장님을 모시지 않나. 그 분은 A나 B가 (제보의 배후에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촬영자가) 네 개인 팬이니까 충분히 너를 위해 말해줄 수 있을 거 같다”며 설득을 시도했다. 키움이 발표한 ‘공식입장’과 상반되는 증거였다. 그럼에도 키움은 “김 단장이 개인적인 궁금증 차원에서 물어본 정도였다”고 했다.
물론 키움의 보도자료 안에 담긴 다른 내용도 석연치 않다. 키움은 과거 이택근이 후배 폭행 사건에 연루됐던 점을 굳이 언급하면서 “이택근이 시즌 초 김 단장에게 코치직을 요구했다. 10월에는 대리인을 통해 유학비 지원을 요구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또 “7월 면담 때 본인이 은퇴 의사를 밝혀 은퇴식을 세 차례에 걸쳐 제안했다. 하지만 본인이 거부해 더 이상 협의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택근은 전화 인터뷰를 통해 즉각 반박했다. “키움의 현 시스템 속에서 내가 코치로 일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오히려 구단이 내게 코치직을 제안해 ‘우리는 할 만큼 했다’는 명분을 찾으려 할까봐 부디 그러지 않기만 바랐다. 오히려 손혁 당시 감독님께 은퇴 인사를 드리면서 ‘지금 코치들이 대부분 나보다 후배들이다. 행여 구단이 코치를 제의하더라도 나는 그 자리를 빼앗을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리기까지 했다. 구단이 끝까지 코치 제의를 하지 않은 게 나로서는 다행”이라고 했다.
유학비 지원 요구에 대해선 “코로나19 시국 아닌가. 유학을 갔던 사람들도 귀국하는 시기에 내가 갑자기 왜 유학을 가겠나. 나는 이미 은퇴 후에 어떤 삶을 살지 여러 계획을 세워 놓은 상태였다. 유학 얘기는 꺼낸 적도 없다”고 코웃음을 쳤다. 은퇴식 제안과 관련한 얘기에 대해선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 은퇴식 다음 스텝은 뭐냐’고 물으니 ‘그게 끝’이라고 해서 ‘그럼 은퇴식도 안 열어줘도 된다’고 하고 팀을 나왔다”고 설명했다.
#걸핏하면 논점 흐리고 불리하면 입 닫는 키움
이쯤에서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이 진실 공방의 본질은 ‘키움이 제보자를 찾아내기 위해 CCTV를 확인했는지 그리고 그 영상을 언론에 보낸 배후를 캐내기 위해 선수에게 영상 촬영자(팬)의 정보를 요구했는지’ 여부다. 이택근이 은퇴하면서 키움에 어떤 요구를 했는지는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많은 프랜차이즈 선수가 은퇴할 때 구단과 향후 진로에 대해 협상하는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그런데도 키움이 이 부분을 굳이 언급한 건 논점을 흐리기 위한 전형적인 꼼수다. “구단에 무리한 요구를 하다 거절당한 선수가 보복을 위해 1년 6개월 전 일을 이슈화한다”는 프레임을 씌우기 위한 걸로 보인다.
이택근도 이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구단에 요구했다는 내용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거짓말이다. 하지만 만약 그게 다 사실이라 해도, 이게 대체 2군 ‘야구놀이’ CCTV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나. 내가 문제 삼고 싶은 건 오직 하나다. 구단이 CCTV로 팬을 사찰했고, 선수인 나에게 ‘그 배후를 공개하라’며 무리한 요구를 했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는 또 “그 사건으로 나는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고, 은퇴 후 ‘더 이상 후배들까지 이런 환경에서 야구하는 걸 방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프런트도, 코칭스태프도, 현역 선수도 구단과 이렇게 싸울 수는 없다. 그래서 내가 나섰다”고 했다.
더 이상 ‘외로운 싸움’은 아니다. 이택근과 키움의 진실공방을 알게 된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가 팔을 걷어 붙였다. 12월 11일 보도자료를 내 “키움 구단이 계속되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프로야구 선수들에게 이른바 ‘야구놀이’를 강요하고 있는 데 대해 유감을 표한다. 키움 구단은 (선수에 대한) 갑질 및 비상식적인 지시를 당장 멈출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며 “프로야구 팬을 사찰하고 기만하는 등 프로야구 근간을 흔드는 행위를 자행하는 키움 구단에 강력한 징계를 내려줄 것을 KBO에 요청한다”고 촉구했다.
선수협은 이 사태와 관련해 “사적인 목적으로 소속 선수들을 소집해 캐치볼과 투구 훈련을 수차례 지시해 온 행태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수차례 논란이 되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버젓이 갑질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 분노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프로야구 팬을 감시하고 불법으로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행위는 프로야구 팬을 배신하는 행위다. 팬의 신상 정보를 알아낼 것을 선수에게 사주하는 행위 역시 팬과 선수를 이간질하고 더 나아가 신뢰관계를 무너뜨리는 행위”라고 반기를 들었다.
반드시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 선수협은 “KBO가 ‘클린 베이스볼’을 표방하고 있는 만큼 프로야구 선수들의 권익을 짓밟고 프로야구 팬을 기만하고 있는 키움 구단을 철저하게 조사를 하고 이와 관련해 엄중한 징계를 해 달라고 요청한다”고 전했다.
어쨌든 키움은 또 한 번 구단 명의의 보도자료로 공개적인 거짓말을 하다 들통났다. 그러자 다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침묵을 택했다. 상황이 불리해지면 늘 입부터 닫고, 사태가 잠잠해지길 기다리는 게 ‘키움식’ 해결책이다. 구단의 잘못된 운영에 철퇴를 내릴 모기업이 없어서 그렇다. KBO와 메인 스폰서 키움증권이 나서지 않으면, 키움은 달라지지 않는다. 허민 의장이 “괜찮다”고 하면 정말 모든 게 다 괜찮은 팀이 바로 지금의 키움이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