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서 승률 88.37%로 이창호 88.24% 기록 깨 ‘닮은꼴 싹쓸이 행보’
신진서 9단이 2020년 바둑대상 MVP를 수상했다. 정부지침에 따라 행사는 취소하고 수상자만 발표했다. 사진은 2018년 MVP 수상 모습. 사진=한국기원 제공
외부환경이 급격히 달라진 탓이었을까. 대국은 비교적 빨리 끝났다. 80수 만에 투석했다. 국내 도전기 사상 최단명국이었다. 1988년 이창호가 기록한 마지막 패배였다. 이후 12월 30일 승리(서봉수 9단과 치른 패왕전 도전자결정 3번기 2국)까지 3승을 더했다. 최종 전적은 75승 10패. 연간 승률 88.24%. 그해 연말 이창호는 MVP를 차지하고 다승, 승률, 최다대국, 연승까지 4개 부문을 모두 휩쓸었다.
32년 동안 깨어지지 않았던 대기록이다. 신공지능이 뛰어넘었다. 2020년 세운 신진서의 기록은 76승 10패, 승률은 88.37%다. 이창호보다 딱 1승 앞선다. 승률은 0.13% 차이에 불과하지만, 질적으로 다른 면은 있다. 대부분 국내외 대회 본선 이상에서 거둔 승리다.
12월 24일 저녁, 남은 마지막 공식대국에 승리한 신진서는 “주위에서 승률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이창호 사범님의 기록을 깨서 기쁘지만, 좀 죄송스럽다. 오늘은 기록에 연연하지 않고, 평소처럼 두었다. 돌아보면 진 기억이 더 선명하고 아쉬운 판이 많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더 열심히 하겠다”라고 말했다. 다음 날 바둑TV 스튜디오로 나온 1988년 기록자 이창호는 신진서의 인터뷰에 이렇게 응답했다. “대견합니다. 승률 90%도 넘을 수 있었었는데…. 내년(2021년)에는 더 잘할 거라 봅니다.”
2020 바둑대상 시상식은 원래 12월 29일 한국기원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정부 지침에 따라 일정을 취소하고, 기자단과 온라인 투표로 선정한 수상자만 발표했다. 신진서 외에 두드러진 수상자는 최정 9단과 문민종 3단이다. 최정은 4년 연속 여자기사상을 받았다. 2020년 여자국수전에서 4연패, 여자기성전도 3연패하며 여자기사 중 최강자로 우뚝 솟았다. 전적은 54승 26패, 승률 67.5%를 기록했다. 여자부문 다승상·승률상·연승상(16연승)을 휩쓸었다. KB바둑리그 4지명으로 뛰면서 용성전에서 16강, 맥심커피배 8강 등 남녀 통합대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2020년 7회 글로비스배 세계바둑 U-20에서 깜짝 우승한 문민종은 남자 최우수신인상을 거머쥐었다.
그 밖에 여자 최우수신인상은 여자바둑리그 우승팀 보령머드 소속선수 김경은 2단이 차지했다. 시니어바둑리그에서 서울 데이터스트림즈를 우승으로 이끈 유창혁 9단이 시니어기사상, 농심신라면배에서 판팅위 9단을 꺾었던 홍기표 9단이 기량발전상을 수상했다. 20대 국회의원으로 바둑진행법 제정에 큰 역할을 한 ‘돌아온 바둑황제’ 조훈현 9단과 호주바둑보급에 큰 힘을 보탠 고 한상대 교수(시드니대)가 공로상을 받았다. 최우수아마선수상은 허영락 선수가, 여자아마선수상은 송예슬 선수가 각각 수상했다.
2020 바둑대상에서 여자기자상을 받은 최정 9단(왼쪽)과 남자 최우수신인상을 받은 문민종 3단. 사진=한국기원 제공
2020년 신진서는 세계대회를 누비고, 국내기전에서 날아올랐다. LG배 우승, 삼성화재배 준우승에 이어 응씨배에서 4강에 진출하고 춘란배에서 8강에 올랐다. 국내는 무적 행군을 이어갔다. GS칼텍스배, 바둑왕전, 용성전, 쏘팔코사놀배를 모두 우승했다. 최고승률까지 경신한 해다. 다승상(76승 10패)·승률상(88.37%)·연승상(28연승)까지 남자기록부문 상은 싹쓸이했다. 바둑팬이 뜻을 모은 인기상까지 35.76%를 득표율로 가장 사랑받는 프로기사로 뽑혔다. 당연히 연말 바둑대상 MVP(최우수기사상)는 신진서 차지다. 순금 10돈짜리 메달을 부상으로 받는다.
1988년 이창호와 2020년 신진서의 싹쓸이는 상당히 닮아있다. 1988년 당시 바둑잡지에선 “매스컴의 호들갑은 13세 소년이 바둑계 장래를 온통 짊어진 느낌이다. 최고위전, 패왕전 도전자까지도 장한데 스승 조훈현 9단까지도 이기고 있다”라고 썼다. 이 문장에서 13세 소년을 20세 청년으로 바꾸고, 조훈현 9단을 박정환 9단으로 치환하면 지금도 똑같이 쓸 수 있다.
세대교체를 이루고 국내 정상에 선 신진서의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 자기가 세운 벽을 뛰어넘는 것도 하나다. 2020년 신진서가 아쉽게 놓친 승률 90%를 달성할 사람은 미래의 신진서일까. 1988년 이후 이창호가 승률 80%를 넘은 건 총 네 번이다. 1990년 85.1%, 1993년 81.1%, 1995년 83%, 2000년 83.3%를 기록했다. 그러나 결국 1988년 자신이 세운 최고기록을 경신하진 못했고, 32년 후 신진서에게 바통을 내주었다.
[승부처 돋보기] 크리스마스 이브 역사적 1승 ●신진서 9단 ○백현우 2단 2020.12.24. 119수 흑불계승 크리스마스 이브에 거둔 1승. 신진서(오른쪽)는 2020년 마지막 공식대국에서 승리하면서 역대 최고승률 기록을 경신했다. 사진=한국기원 제공 신진서가 2020년 75승 10패를 하고 남은 마지막 공식대국이 12월 24일 저녁에 열렸다. 2020-2021 KB국민은행 바둑리그 5라운드 1경기다. 마주한 상대는 신진서보다 한 살 어린 백현우 2단이었다. 12월 랭킹은 30위지만, 아마추어 이미 세계대회(몽백합배) 16강에 진출했던 신예 강자다. 신진서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딱 1승을 더해 이창호를 넘는 신기록을 세웠다. 장면도 #장면도(실전) 흑은 사귀생. 신진서는 초반부터 실리를 차지했다. 백현우는 중앙에 두터움을 쌓아 팽팽한 형세를 유지했다. 흑1은 실전 57번째 수. 흑3까지 중앙이 뚫리자 형세가 흑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흑13으로 날개를 쭉 펴니 좌중앙 흑돌과 은연중에 호응하는 느낌이다. 참고도 #참고도(복기) 돌을 거둔 후 두 대국자가 다시 그린 그림이다. 우상귀에선 백 두 점을 주더라도 중앙을 틀어막아 두터움을 유지하는 게 좋다. 이랬다면 유유하게 백은 흑돌(세모 표시)을 압박하며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