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지명 박진솔 바둑계 유일 대기만성…팀 모토는 ‘자율’ 스스로 역량 끌어올려야”
수려한합천 감독: 고근태 바둑리그 선수: 박정환(1지명), 박진솔(2지명), 윤준상(3지명), 송지훈(4지명), 강유택(5지명) 퓨처스리그 선수: 현유빈(1지명), 김형우(2지명), 이현준(3지명) |
[일요신문] 입구에서 소독약 세례를 받고, 체온 측정과 QR코드 전자출입명부 체크인을 거쳐 한국기원으로 들어갔다. 바둑계엔 코로나 확진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KB바둑리그 대국장과 검토실은 한국기원 지하 1층에 있다.
12월 20일 KB바둑리그 4라운드 4경기, 이번 시즌 우승 후보로 꼽히는 수려한합천과 셀트리온 두 팀이 대결한 날이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를 조금 넘겼다. 검토실 모니터엔 이미 시작한 1국 수순이 10여 수 진행되었다. 각자 2시간을 주는 장고대국이라 템포는 아주 느리다. 이른 시각이라 다른 선수들은 안 보이고, 고즈넉한 검토실은 감독 두 명만 지키고 있었다. 찾던 사람이 바로 앞에 있었다. 수려한합천 고근태 감독이다.
고근태 감독은 수려한합천에서만 2년 연속 사령탑을 맡았다.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마침 낮부터 벌어진 갑조리그 플레이오프 준결승도 종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공교롭게 박정환 9단과 신진서 9단이 함께 출전했던 날이다. 이 둘은 갑조리그 대국을 마치면 이날 8시 반부터 열릴 KB바둑리그 4국에서 맞대결을 펼칠 예정이었다. 두 감독이 바둑리그 검토실에서 갑조리그 종반 수순을 열심히 지켜보던 이유다.
박정환이 중앙에서 대형 수상전 끝에 판팅위 9단 대마를 잡는 걸 확인하고 고근태 감독이 환한 미소를 짓는다. 이 승리로 박정환은 남해 7번기 이후 국내외 공식대회 10연승을 이어갔다. 신진서는 한 살 많은 쉬자양(장시) 8단에게 패했다. 중국랭킹 15위, 신진서가 최근 상대전적에서 4연승했던 상대라 아픔이 더 쓰라렸다. 신진서의 2020년 통산전적은 72승 9패, 1패가 더해지면서 목표였던 승률 90% 달성은 실패했다.
저녁 8시 30분, 박정환은 평온한 얼굴로, 신진서는 아픔이 남은 표정으로 대국장에 나왔다. 결국 낮에 나온 승리와 패배는 밤까지 이어졌다. 1시간 29분 동안 치열한 접전 끝에 드디어 박정환이 이겼다. 지난 6월부터 신진서에게 공식대국 12연패 중이었다. 국후 박정환은 기쁜 표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팀이 져서 좋아할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팀이 1 대 4 스코어로 패했기 때문이다.
수려한 합천의 1지명 박정환 9단. 박정환은 20일 신진서에 불계승을 거뒀다.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그래도 고근태 감독은 마냥 느긋했다. “이번 라운드 결과는 아쉽지만, 아직 시즌 초반이다. 무엇보다 박정환 선수가 이긴 게 기분 좋다. 지지 않는 1지명이 있으면 팀원들에게 좋은 영향이 간다. 한국바둑계 전체를 볼 때도 뜻깊은 승리다”라고 말했다.
고근태 감독은 수려한합천에서만 2년 연속 사령탑을 맡았다. 지난 리그에선 박영훈이 주장이었다. 마침 2지명 이지현이 2020년 입대했기에 다섯 명 선수를 모두 새로 뽑았다. 선수 선발에 관해선 “순번 1번을 뽑아 박정환을 데려오는 건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확률이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박정환을 1지명으로 놓고 구상한 시뮬레이션이 없어 이후 순번 선발에 아주 고심했던 기억이 난다. 주로 예전 내가 선수 시절 겨뤄보면서 강하다고 느꼈던 선수를 위주로 뽑았다. 박진솔 선수가 대표적이다. 바둑계에서 대기만성이라는 표현을 붙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사다”라고 설명했다.
고근태 감독은 2006년 한중천원전 3번기에서 당시 중국 최강 기사였던 구리 9단을 꺾었다. 사진=한국기원 제공
이후 세계대회 본선에서 활약했지만 대학입학, 군 생활, 결혼 등 인생의 대소사로 승부세계와 조금씩 멀어졌다. 2015년에 9단에 올랐고, 작년부터 바둑리그 감독대열에 합류했다.
취임 당시 소감을 다시 묻자 “마치 한참 바둑계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느낌이었다. 지금도 경험과 역량을 쌓는 단계다. 처음에는 선수 시절 거친 감독님 모습을 많이 떠올렸다. 양상국 사범님을 시작으로 양재호, 김영환, 김영삼, 이정우 사범님까지 다양한 감독님과 만났다. 그리고 내 선수 시절 경험을 녹였다. 리그 선수들이 가장 괴로운 순간은 본인이 지고, 결과적으로 팀이 졌을 때다. 성적이 좋아지면 팀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부드러워진다. 가장 중요한 건 성적이다”라고 말한다.
고근태 감독은 대국실을 나오는 선수들을 가벼운 말로 위로해준다. 절망적인 형세의 대국도 끝까지 함께 복기하며 4라운드를 마감했다. 수려한합천의 모토는 ‘자율’이다. 지더라도 감독은 결과에 대한 코멘트를 하지 않는다. 스스로 변화하고 역량을 끌어올리는 과정을 감독은 따스한 시선으로 지켜본다. 마지막 인사말도 간명했다. “모두 고생했다. 무엇보다 건강 조심하고, 다음 주에 또 보자.”
[승부처 돋보기] 역전을 만든 팻감 2020-2021 KB바둑리그 4라운드 4경기 ●신진서 ○박정환 216수 백불계승 장면도 #장면도 초반 신진서는 대마(흑 세모표시)를 버리는 놀라운 사석작전을 통해 중앙에 완벽한 세력을 쌓으며 앞서갔다. 우세를 느끼고 있었지만, 우하귀 팻감이 많다고 본 신진서는 좌변 패(X표시)를 만들어 승부를 끝장내려고 했다. 백1의 팻감에 불청하고 흑2로 따낸 건 실수였다. 참고도와 같이 막았다면 절예(덤6.5 설정) 기준 흑승률이 71.4%다. 백3을 두자 절예 백승률이 80.3%로 역전되었다. 참고도 #참고도 흑2로 막고 패를 계속했다면 여전히 좋은 형세였다. 이후 흑에겐 A와 C(백이 B로 받아주면 C가 단수가 된다)의 팻감이 남아있다. 승자 박정환은 대국장에서 돌아오자마자 핸드폰을 꺼내 절예의 승률과 참고도를 하나하나 살폈다. 마치 금방 시험을 치르고 나온 학생이 정답지를 보고 채점하는 느낌이었다. “패싸움 이후 형세가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응수를 잘못해 후반에는 계속 만만치 않은 형세였다. 어렵게 이겼다”라고 총평했다. |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