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사전 교감설에도 친문 강경파 강력 반발…박근혜 선고 후 청와대 침묵 시 내상 불가피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가 1월 6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승부수를 던진 시점을 잘 봐라.”
이낙연발 사면론 직후 여권 한 관계자가 던진 말이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월 1일 서울 국립서울현충원 참배 후 기자들과 만나 “적절한 시기에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새해 첫날 진보진영 금기어인 MB·박근혜 사면 카드를 던진 것은 장기간 준비한 고도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여권 핵심 수뇌부도 MB·박근혜 사면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표가 구속 수감 중인 전직 대통령 사면론을 꺼낸 직후 여권 일각에선 “청와대와 사전 교감을 했을 것”이란 관측이 흘러나왔다.
사면권은 헌법이 보장한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 여당 대표가 대통령 권한을 교감 없이 승부수로 쓰는 것은 사실상 항명에 가깝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대통령을 패싱한다는 것은) 권력의 법칙상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민주당 한 당직자도 “신중한 이 대표의 스타일을 감안하면, 독단적 결정은 아닐 것”이라고 전했다. 이낙연발 사면 카드는 여권 투톱의 조율을 통해 나온 ‘국면전환용 카드’라는 얘기다.
이 대표가 사면론을 띄운 직후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실제 건의가 이뤄져야 논의할 수 있는 문제”라고 말한 것도 이 같은 관측에 힘을 싣는다. 야당 한 관계자는 “청와대가 강하게 부인하지 않았다”라며 “이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해석했다.
여권 투톱의 이해관계가 꼭 들어맞은 점도 MB·박근혜 사면 논의의 불씨를 댕겼다. 콘크리트였던 문 대통령의 지지도는 집권 4년 차 끝자락에서 심리적 마지노선(40%)의 축이 무너졌다.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얼미터가 1월 4일 공표한 지난해 12월 5주 차 결과에 따르면 문 대통령 지지도는 최저치인 36.6%까지 떨어졌다. 부정 평가는 59.9%에 달했다.
부동산값 폭등과 추(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윤(윤석열 검찰총장) 갈등, 코로나19 백신 공급 지연 등이 맞물리면서 중도층은 등을 돌렸다. 이번 조사에서 중도층(34.5%)의 문 대통령 지지도는 진보층(61.1%)의 절반가량에 불과했다. 국민통합을 매개로 한 중도층 확장 전략 없이는 정권 재창출이 어렵다는 의미다. 이 조사는 YTN 의뢰로 12월 28일∼31일까지 실시했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참조).
일부 여론조사에서 3위로 밀린 이 대표도 승부수가 절실했다. 이 대표는 ‘당권·대권 분리 규정’에 따라 차기 대선 1년 전인 오는 3월께 당 대표직에서 물러난다. 지지도를 만회할 시간이 두 달밖에 없는 셈이다. 이른바 윤석열 대망론과 이재명 대안론의 구심점이 한층 강화되면서 이 대표가 조급함을 느꼈을 것이란 추측도 나온다. 다만 이 대표와 가까운 인사들은 “지지층에 화살을 맞을 각오로 MB·박근혜 사면 이슈를 꺼냈을 것”이라고 전했다. 자기 정치가 아닌 국익을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위기돌파 카드였다는 것이다.
이낙연발 위기돌파 카드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것은 ‘김대중(DJ) 리더십’이다. DJ는 1997년 대선에서 당선된 후 ‘당선인 신분’일 때 김영삼(YS) 전 대통령에게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을 건의했다. 신한국당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 전 총재는 가장 먼저 이들의 사면을 주장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사면은 같은 당 후보가 먼저 사면을 건의한 뒤 반대편 당선자가 후에 요청, 국민통합 차원에서 갈등 없이 진행됐다. 사면 건의를 둘러싼 ‘타이밍 정치’의 대표적인 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19년 7월 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항소심 공판에 마스크를 쓰고 출석하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이낙연발 MB·박근혜 사면 건의를 둘러싼 타이밍 논란이 불거진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대표는 재차 청와대와의 사전교감설에 대해 “없었다”며 선을 그었지만, 여권 복수의 관계자들은 “교감은 있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다만 여권 내부에서도 그 교감이 ‘정치적 승부수’를 띄울 정도의 교감이었는지, ‘청와대의 단순 검토’에 불과한지를 놓고는 의견이 분분했다. 여의도 한 분석가는 “당·청이 더 조율하고 발표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소속 의원들과 사전 교감이 부족한 것도 ‘이낙연 리더십’에 적잖은 상처로 남았다. 이 대표를 포함한 당 지도부는 1월 3일 국회에서 MB·박근혜 사면과 관련한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당 지도부는 사면의 선결요건으로 국민 공감대와 당사자 반성을 꼽았다. 이낙연발 사면론에 단서를 붙이면서 ‘조건부 찬성’ 모양새는 갖췄지만, 여권 내부에서도 “사실상 사면론 철회”라는 분위기가 감지됐다.
한 최고위원은 “1월 14일 대법원 재상고심 판결까지는 기다리자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여권의 유력한 대권 잠룡인 여당 대표가 새해 쏘아 올린 사면 승부수가 이틀 만에 자충수로 전락한 셈이다. 이 대표도 간담회 후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겠다”며 속도 조절 의사를 내비쳤다.
이낙연발 사면론의 후폭풍은 컸다. 친문 강경파뿐 아니라 중도 성향에 가까운 의원들도 반발했다. 친문계인 김종민 최고위원은 “사면은 국민적 동의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불만을 표출했다. 정청래 의원은 “용서와 관용은 가해자의 몫도, 정부의 몫도 아니다”라며 “오로지 피해자와 국민의 몫”이라며 이른바 ‘5대 불가론’을 제시했다.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우상호 의원도 “시기적으로도, 내용 면에서도 적절하지 않다”며 “탄핵과 사법처리가 잘못됐다는 일각의 주장을 의도치 않게 인정하게 될 수도 있는 데다, 자칫 국론분열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다”고 가세했다. 이 대표의 청와대 사전 교감 여부와 관계없이 당과는 충분한 논의가 없었다는 점을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대표는 MB·박근혜 사면론 제기 직후 한 측근에 전화해 “사전에 상의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관전 포인트는 이낙연발 사면론이 향후 정국에 미칠 충격파다. 도화선을 만든 이 대표의 차기 대선 레이스는 먹구름이다. 당장 친문 강성 인사들은 당 게시판에 “이 대표를 몰아내자”는 글을 쏟아내고 있다. “이 대표 대신 이재명 대안론을 밀겠다”는 글도 많다.
이 대표가 정치적 내상을 입은 사이, 이 지사는 “나까지 입장을 밝히는 것은 사면권을 지닌 대통령께 부담을 드리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친문 지지층을 끌어안기 위한 전략적 거리두기 전략으로 읽힌다. 이 대표 지지도의 핵심 축이었던 친문 지지층의 민심 이반 여부에 따라 양측이 희비가 엇갈릴 것으로 보인다. 최악 땐 이 대표가 여권의 대선 레이스에서 이탈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분기점은 1월 14일 이후다. 이날은 박 전 대통령의 대법원 재상고심 선고기일이다. 일각에선 선고 직후 청와대가 ‘모종의 발표를 할 것이란 전망이 조심스럽게 나온다. 만에 하나 문 대통령이 이낙연발 사면론에 힘을 실어줄 경우 당내 논란은 잦아들 것으로 보인다. 이낙연발 사면론이 되레 문 대통령의 부담을 더는 일종의 ‘방패막이 역할’을 해서다. 문재인 정부 들어 극심한 보혁 갈등을 중재할 징검다리 역할로 이어질 수도 있다.
반대로 청와대가 침묵하거나, 원론적인 입장 표명에 그친다면 이 대표의 정치적 내상은 한층 깊어진다. 친문계 권리당원의 강한 반발이 지속된다면, 이 대표가 퇴임 시기를 앞당길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 참모진과 당 친문계 의원들이 이 대표에게 등을 돌린다면, 이 대표의 차기 대권 본선행은 물 건너간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할 말이 없다는 게 공식 입장”이라고 함구했다. 진보진영 한 관계자는 “MB·박근혜 사면 문제야말로 여권 투톱이 공동 운명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