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증권위 ‘공시 없이 줄매도’ 기소 타격…국내 거래소 관망, 전문가 “투자 신중해야”
2018년 한국을 방문한 브레드 갈링하우스 리플 최고경영자(CEO)의 말이다. 그가 했던 이 말이 그의 발목을 잡을 스모킹 건이 될지도 모른다.
세계 3대 암호화폐로 꼽히는 ‘리플’의 최고경영자 브래드 갈링하우스가 2018년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리플의 사업전략과 금융권 기술혁신 분야의 성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엄밀히 따지면 리플과 리플이 사용하는 디지털 자산인 ‘XRP(엑스알피)’는 다르다. 하지만 리플이 전체 1000억 개의 XRP 가운데 약 600억 개를 보유하고 있어 사실상 XRP가 곧 리플로 인식된다. XRP는 블록체인 기술의 핵심인 분산원장을 기반으로 국경 없는 송금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암호화폐다. 건당 수수료가 저렴하고, 결제 처리 시간이 2~3초에 불과한 것이 강점이다.
XRP는 암호화폐 시가총액 3위로 현재 가치가 약 30조 원에 달한다. 최고가로 올랐던 2018년 1월에는 시가총액이 약 140조 원이었다. XRP는 시가총액에서 이더리움과 2위 다툼을 하며 2위와 3위 자리를 오갔다. 특히 한국은 2019년 국내 투자자들이 비트코인보다 XRP를 더 많이 사 암호화폐 가운데 매수 1위 자산이기도 했다.
이런 XRP가 큰 위기를 맞았다. 12월 22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XRP 발행사 리플을 기소하면서다. SEC는 리플 재단과 브래드 갈링하우스 CEO, 크리스 라르센 공동 설립자를 기소했다. 갈링하우스 CEO는 아메리칸 온라인(AOL) 소비자 앱 부문 대표, 야후 선임 부사장, 파일공유 서비스 기업 하이테일 등 다양한 IT 기업을 거친 인물이다. 2018년 한국을 방문해 기자회견을 열고 XRP의 가치를 설파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리플에 대한 SEC의 소송은 예견됐다는 것이 중론이다. 리플이 직면한 문제는 암호화폐 시장 전체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어 주목이 된다. 바로 암호화폐의 근본적인 성격이 화폐인지, 증권인지 혹은 리니지 속 아이템 같은 디지털 자산인지를 두고 재판에서 다툴 예정이기 때문이다.
SEC는 기소문에서 갈링하우스와 크리스 라르센 등 공동 창업자들이 2013년부터 별다른 공시 없이 XRP를 판매한 현황을 공개했다. SEC 측에 따르면 적어도 이들은 약 146억 개 이상의 XRP를 판매했다고 추정됐다. SEC는 공동 창업자들이 XRP를 판매하면서 증권신고서를 작성하지 않았고 투자자에게도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혐의를 지적했다. 이렇게 리플 공동 창업자들이 판매한 XRP 규모는 약 13억 8000만 달러고 개인적으로 얻은 이익도 약 6억 달러로 파악됐다.
SEC에 따르면 리플사의 수익도 그동안의 설명과 달리 이들이 공시 없이 판매한 XRP가 절대적인 비중이었다. 리플은 엑스래피드(xRapid)나 엑스커런트(xCurrent) 사업으로 수익을 발생시킨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SEC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다른 사업의 수익은 거의 없었다.
앞서 SEC는 시가총액 1위인 비트코인과 2위인 이더리움은 화폐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리플 창업자들이 판매한 XRP는 증권이라고 봤다. 따라서 증권인 XRP가 증권신고서 없이 판매되면 불법이라는 게 SEC의 주장이다. 리플이 증권인 이유는 하위 테스트(Howey Test)를 근거로 봤다. 하위 테스트는 해당 사업에 돈을 투자하고, 투자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등의 조항으로 구성된다. 하위 테스트에 모두 해당되면 증권으로 본다.
특히 SEC는 갈링하우스 CEO의 인터뷰에서 XRP 가격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는 발언을 지적했다. 앞서 소개한 갈링하우스 CEO의 한국 방문 발언처럼 2017년, 2018년 그는 여러 나라를 방문하거나 미국 주요 경제 방송에 출연해 XRP 가격을 긍정하며 낙관론을 펴고 있었다. 하지만 낙관론을 폈던 그 시점에 리플은 6700만 개 XRP를 매도하고 있었다. 앞에서는 긍정론을 펴면서 내부에서는 매도한 것이 사기에 가깝다는 평가다.
SEC 소송 직후 미국 암호화폐 거래소들은 XRP 거래 중지를 선언했다. 미국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 코인베이스, 오케이코인 등 순위권 거래소들도 2020년 1월부터는 거래와 입금을 중단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한국 거래소들은 일단 관망하겠다는 분위기다. 한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 관계자는 “소송 결과가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내 암호화폐 거래소도 일단은 ‘거래에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암호화폐 거래를 오랫동안 해온 한 투자자는 “SEC 소송을 당한 암호화폐 중에서 제대로 살아남은 프로젝트가 없다. 한때 메이웨더가 홍보한 센트라도 현재 가치가 제로다. SEC 기소를 당한 프로젝트는 센트라를 필두로 모두 패소했기 때문에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SEC가 승소할 경우 XRP는 암호화폐 거래소가 아닌 인가를 받은 증권거래소에서만 거래할 수 있게 된다.
반면 법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으리란 지적도 있다. 국내에서 암호화폐 관련 소송을 진행하기도 했던 한 변호사는 “이번 기소로 타격이 있겠지만 XRP가 아예 끝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벌금을 내고 리플 재단이 본사를 미국에서 다른 나라로 옮기거나 미국 내 거래만 종료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까 싶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다만 리플이 이번 사태로 종료되진 않는다 하더라도 결정적 타격인 만큼 투자에는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리플이 기소되면서 XRP 가격은 600원대에서 200원까지 수직 낙하했다가 8일 350원대까지 상승해 거래 중이다. 비트코인, 이더리움이 초강세장을 보이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암호화폐 투자로 큰돈을 벌어 업계에서 유명한 한 암호화폐 트레이더는 “XRP는 리플사가 절대 다수를 보유하고 있는 데다 시시 때때로 이익 실현을 하고 있다”며 “한국 사람들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사랑하는 암호화폐가 리플(XRP)이다. 송금 수수료나 전송이 빨라 단타 치기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재단이 암호화폐를 판매하는 프로젝트는 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