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익·최인철 씨 31년 만에 주홍글씨 걷어 내…재판부 “법원이 인권의 마지막 보루 역할 못해 사과”
2월 4일 부산고법 형사1부(재판장 곽병수)는 강도·살인 등 혐의로 21년간 복역하고 출소한 장동익·최인철 씨가 제기한 재심 재판에서 두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왼쪽부터 최인철 씨, 박준영 변호사, 장동익 씨. 사진=고석희 기자
‘강도살인, 강도상해, 강도강간, 특수강도, 특수감금, 공무원자격사칭,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 장동익·최인철 씨가 받은 혐의다. 이들의 변호인 박준영 변호사는 이 사건의 결정적 증거는 장 씨와 최 씨의 자백인데, 과거 수사기관에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광범위한 조작과 고문과 가혹행위 등 강압적인 수사가 있었다며 2017년 5월 재심을 청구했다.
박 변호사가 주장한 재심 사유 조항은 형사소송법 제420조 1, 2, 5, 7호 등이다. 과거 유죄 확정판결의 증거가 된 서류가 위조 또는 변조된 점(제1호), 증거가 된 증언 일부가 위증인 점(제2호), 새로 발견된 증거로 재심청구인들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점(제5호), 재심청구인들이 경찰관에게 고문 및 가혹행위를 당하는 등 사법경찰관의 직무상 범죄가 있었던 점(제7호)을 주장했다. 그리고 재심 청구 4년여 뒤인 지난 2월 4일, 부산고등법원 형사1부(곽병수 부장판사)는 박 변호사의 주장이 전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가 밝힌 무죄 판결 근거는 크게 세 가지다. △불법체포, 불법구금 △고문 등 가혹행위 △증거능력이 없는 증거들이다. 쉽게 말해 과거 수사 경찰이 불법으로 장동익·최인철 씨를 체포, 구금한 뒤 물고문 등을 통해 허위자백을 받아냈고, 수사기록 조작 등을 통해 증거를 만들어냈다는 점이 인정됐다는 뜻이다.
#불법체포 불법구금 인정
이번 재심 판결문엔 광범위한 조작과 고문, 가혹행위 등 강압적인 수사 방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재판부는 먼저 경찰이 1991년 11월 8일부터 장동익·최인철 씨를 불법으로 체포하고 가뒀다고 판단했다. 이들의 자발적 의사에 따라 적법하게 연행이 이뤄지지 않았고, 오히려 강제연행된 점이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과거 수사경찰은 처음 낙동강변 2인조를 ‘임의동행’ 형식으로 경찰서로 연행해 자백을 받았다고 했지만, 실제 수사기록에는 ‘잠복수사 중 검거했다’고 기재돼 있었다. 연행 당시엔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앞선 재심 개시 결정을 위한 심문기일에 증인으로 출석한 당시 수사 경찰관의 증언으로 확인됐다.
2인조는 경찰에 연행된 이후 구속영장이 집행될 때까지 사실상 계속 감금돼 있었다는 점도 인정됐다. 구속영장이 불법체포 다음 날인 11월 9일 발부됐지만, 경찰은 장 씨와 최 씨를 경찰서 보호실에 유치하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 뒤 조사를 진행한 사실이 확인된다고 재판부는 밝혔다.
왼쪽부터 박준영 변호사, 최인철 씨, 장동익 씨. 사진=고석희 기자
#고문·폭행 등 가혹행위 있었다
물고문 등 가혹행위는 네 가지 사유를 종합해 판단했다. 장동익·최인철 씨의 고문정황 진술이 일관되고 구체적인 점이 첫 번째다. 재판부는 장 씨와 최 씨가 경찰 수사까지는 모든 범행을 인정했지만 검찰로 송치되고 더 이상 경찰 수사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부터 일관되게 구타와 물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했다는 점을 주목했다.
재판부는 검찰 조사, 재판 과정, 무기징역이 확정된 이후에도 각종 탄원서, 당시 수사 경찰을 상대로 한 고소 등을 통해 가혹행위를 구체적으로 설명했고 출소 이후에도 일관되게 주장해 온 사실이 확인된다고 했다. 재심청구인들이 진술하는 고문 방법 및 도구, 수사관들의 발언 등은 실제로 경험하지 않고서는 묘사하기 어렵다고 보일 정도의 구체적으로 생생한 내용이 포함됐다고 밝혔다.
장 씨와 최 씨의 주장은 이들이 구속돼 있는 기간 유치장에서 함께 있었던 A 씨와 B 씨의 증언으로 뒷받침된다고 했다. 이들은 과거에도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 가혹행위 정황 사실에 대해 증언했고, 20여 년 뒤인 2018년 낙동강변 살인사건을 재조사한 대검찰청 진상조사단(검찰 과거사위원회) 면담 과정에서 같은 내용을 진술했다.
A 씨와 B 씨는 “장 씨와 최 씨가 조사를 받고 들어올 때 손목, 발목이 부어 있거나 옷이 젖어 있었다”고 말했는데, 이들은 당시 유치장에 함께 있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고 일면식도 없으며 장 씨와 최 씨와 친분관계가 확인되지 않는 만큼 그 진술들을 충분히 믿을 수 있다고 했다.
장 씨와 최 씨가 고문을 당하면서 자백을 강요받았다는 날짜와 수사기록 진술서 날짜를 비교해보면 느닷없이 앞에선 하지 않았던 말이 나왔거나 진술이 바뀌었다는 점, 두 남자가 구속되기 두 달 전인 1991년 9월 같은 경찰서 같은 장소에서 다른 사건 용의자가 고문을 당해 허위자백을 했다가 재판 과정에서 뒤집힌 사실 등은 고문과 가혹행위 등 악습이 있었음을 추단할 수 있는 간접 사실 중 하나로 평가한다고 밝혔다.
그 밖에 대검 진상조사단이 재조사 결과 당시 고문이 이뤄졌다고 결론 내린 점, 2020년 12월 10일 재심 결심공판에서 검찰이 “장 씨와 최 씨의 자백이 경찰서 수사관들의 가혹행위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다”며 무죄 구형을 한 점도 고문이 있었다고 판단하는 근거가 됐다고 했다.
최인철(왼쪽)·장동익 씨. 사진=고석희 기자
#불법체포와 가혹행위로 만든 증거들, 증거능력 없다
이에 따라 불법체포, 구금 과정 및 고문과 가혹행위가 있었던 시기 작성된 기록과 확보한 증거는 모두 증거능력이 없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검찰 송치 이후 장 씨와 달리 최 씨는 세 번째 조사부터 경찰에서 가혹행위를 받았다고 진술하며 범행을 전면 부인했는데, 앞선 사정에 비춰보면 검찰 조사 과정에서 범행을 인정한 진술들이 경찰서에서 고문을 받아 자백했던 심리상태가 그대로 이어져 작성된 것으로 보이고, 이를 검사가 확인하지 않았다고 했다.
특히 재판부는 낙동강변 살인사건 재심 쟁점의 또 다른 한 축이었던 ‘현직 경찰관 강도사건’의 피해자인 경찰관의 진술도 전부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현직 경찰관 강도사건은 낙동강변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1년 전, 장 씨와 최 씨가 검거되기 2년 전인 1989년 12월에 발생했는데 물적 증거 없이 피해를 당했다는 경찰관의 진술만으로 유죄가 확정됐다.
재판부는 과거 재판과 재심 재판에서 진술이 일관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반대의 내용으로 진술을 바꾸는 등 믿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과거 검찰 조사에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윤곽은 확인했다”고 했지만 재심 재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해 “얼굴을 확실히 봤다. 제압하기 위한 기회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똑똑히 봤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피해를 주장한 경찰관이 범행을 당한 당시 타고 있던 차량의 차종이나 소유자에 관한 진술이 모두 거짓말이었던 점, 피해를 당하고도 2년이 지날 때까지 신고도 하지 않았던 점, 같은 피해자인 함께 있던 여성의 신원을 밝히지 못한 점 등도 ‘매우 부자연스럽고 이례적’이라 진술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 밖에 재판부는 낙동강변 살인사건 수사과정 전반에서 경찰이 압수한 압수물도 모두 증거능력이 없거나 직접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반면 장 씨와 최 씨의 ‘억울하다’는 진술은 믿을 수 있다고 밝혔다.
4일 무죄 선고를 받고 취재진 앞에 선 장동익(왼쪽)·최인철 씨. 사진=고석희 기자
#다시 쓰는 판결 이유
재판부는 판결문에 ‘다시 쓰는 판결 이유’라는 소제목을 통해 장 씨와 최 씨에 대한 판단을 새로 했다. 장동익 씨에 대해선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최인철 씨는 살인사건과 현직 경찰관 강도 사건 등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하지만, 운전면허 없이 자동차를 운전한 이유로 도로교통법위반 혐의, 이 사건의 발단이 된 교통경찰관 자격 사칭과 함께 운전연습을 하던 남녀로부터 3만 원을 받은 혐의 등은 유죄로 인정된다고 했다.
다만 최 씨가 재심 법정에서 이 혐의들은 모두 인정하고, 피해액이 소액이며 무엇보다 허위자백으로 인해 장기간 복역하며 고초를 겪은 점 등을 참작해 선고유예를 하기로 했다. 선고유예는 비교적 가벼운 범죄를 저질렀을 때 일정 기간 형의 선고를 유예했다가 이 기간이 지나면 처벌하지 않는 판결로, 법원이 피고인에 대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처다.
재판부는 지난 2월 4일 재심 법정에서 준비해 온 판결문만 보고 읽는 대신 장 씨와 최 씨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설명을 마친 재판부는 그들에게 “경찰에서 가혹 행위와 제출된 증거가 법원에서 제대로 걸러지지 않았고, 그로 인해 21년이 넘는 오랜 기간 수감 생활을 하는 고통을 안겼다”며 “법원이 인권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점에 대해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재심 판결로 인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피해가 회복되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전했다.
박준영 변호사는 이번 판결에 대해 “장동익·최인철 씨가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는 사실이 법적으로 확인됐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러나 이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인철 씨의 알리바이를 증언했다가 구속됐던 아내와 처남에 대한 재심 청구부터, 사건 수사 과정에서 조작에 가담한 경찰관들이 재심법정에서의 증인으로 출석해 위증한 것에 대한 형사 책임, 국가배상 소송 등을 진행할 것”이라며 “남은 절차를 통해 이 사건을 바로잡아가겠다”고 덧붙였다.
낙동강변 살인사건은 1990년 1월 낙동강변에서 데이트하던 남녀가 괴한들에게 납치돼 여성은 살해되고 남성은 상해를 입은 사건이다. 장동익·최인철 씨는 이 사건 범인으로 지목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약 21년간 복역했다. 2013년 모범수로 출소한 뒤, 과거 경찰 고문으로 살인 누명을 쓰게 됐다며 재심을 청구했다.
2019년 4월 이 사건을 재조사한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과거 경찰의 고문으로 범인이 조작됐다”는 결과를 냈다. 과거사위의 조사 결과가 발표 이후 법원은 재심 개시 여부 결정을 위한 심문기일을 총 6차례 열었고, 2020년 1월 재심을 결정했다. 재심 결정 1년 1개월 만인 지난 2월 4일, 재심 재판부는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