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 지주사 밖‧해외법인 형태로 CVC 두는 까닭은
쿠팡의 뉴욕증시 상장과 신세계그룹의 ‘그랩’ 투자 소식이 알려지면서 대기업의 기업형 벤처캐피털(CVC)의 향방에 재계의 관심이 쏠린다. 사진=일요신문 DB
정부는 대기업의 벤처투자 활성화를 목적으로 일반지주회사의 CVC보유를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지난해 12월 국회 본회의에서는 이 같은 내용을 포함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그러나 대기업CVC의 등장은 아직까지 요원한 상황이다. 주요 대기업들은 여전히 지주사 체제 내 CVC 보유를 검토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신세계그룹은 16일 벤처캐피탈(CVC) 시그나이트파트너스를 통해 그랩에 투자했다고 밝혔다. 시그나이트파트너스는 그랩이 수백만 명의 일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서비스라는 점과 동남아시아지역이 모바일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부분에 주목해 이번 투자를 결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랩은 2012년 차량 호출 서비스로 시작해 음식 및 식료품 배달, 금융서비스까지 사업을 확장한 동남아시아 대표 ‘수퍼앱’(다양한 생활 서비스가 가능한 앱)이다. 동남아 8개국에서 서비스되고 있으며 2억 1400만 건 이상의 모바일 다운로드를 달성했다.
시그나이트파트너스는 지난해 첫 해외 투자처로 유망 패션기업 ‘인타이어월드’를 선정하고 투자를 단행한 바 있다. 이 같은 해외 기업에 대한 투자 경험을 바탕으로 향후 글로벌 투자에도 본격적으로 나설 계획이다.
시그나이트파트너스는 정부가 대기업CVC의 제한적 보유 허용을 검토하겠고 밝힌 직후인 지난해 7월 출범했다. 신세계그룹은 신세계인터내셔날과 (주)신세계, 신세계센트럴시티 3개 회사의 공동 투자를 통해 그룹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신규사업 모색 및 선제적 투자를 통한 미래 성장동력 확보를 목적으로 CVC를 설립했다. 그러나 지주사 격인 (주)신세계 대신 신세계인터내셔날이 설립을 주도하면서, 지주사 체제 밖에 CVC 시그나이트파트너스를 두고 있다.
다른 대기업들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롯데(롯데액셀러레이터)와 CJ(타임와이즈인베스트먼트)는 여전히 지주사 체제 밖에 CVC를 두고 있고, LG(LG테크놀로지벤처스)는 해외법인 형태로 CVC를 운영 중이다. 지주사 체제가 아닌 삼성(삼성벤처투자)과 두산(네오플럭스), 네이버(스프링캠프), 카카오(카카오벤처스) 등은 계열사 형태로 CVC를 운영 중이다.
특히 롯데의 경우 2017년 10월 지주사를 출범하는 과정에서 금산분리(산업자본의 금융 소유 금지) 원칙에 따라 금융계열사와 함께 CVC인 롯데엑셀러레이터를 정리한 바 있다. 롯데지주는 2019년 9월 보유 중이던 롯데액셀러레이터 지분을 호텔롯데로 매각했다. 지주사 체제 내에 두고 있던 CVC를 규제에 의해 떼어낸 셈이다.
재계에서는 대기업 지주사들이 직접 CVC를 설립해 운영하는 것은 여전히 부담스럽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부가 CVC 보유를 허용해줬지만, 단서조항이 많은 탓이다. 대기업 지주회사는 지분 100%를 보유한 완전자회사 형태로만 CVC를 보유할 수 있고, 외부자금 차입은 자기자본의 200% 내외로 제한된다. 또, CVC가 조성하는 펀드의 경우 외부자금은 조성금액의 최대 40% 이내로 허용되는데다 해외투자는 CVC 총자산의 20%로 제한된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지주사 외부에 합자방식으로 설립했던 CVC를 지주회사 체제 내로 옮기는 작업은 지분 정리 등의 문제로 쉽지 않다”며 “CVC 보유를 허용한 정부의 취지는 좋지만 해외투자 비율 등 제약이 많은데다 일각의 부정적인 시각도 여전해 실제로 CVC 설립에 나서기에는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전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