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창흠 경질론’부터 ‘대통령 책임론’까지 당청 갈등 양상…윤석열 전 총장에겐 호재 작용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이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01차 국토교통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 질의에 답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이걸 누가 받아들이겠느냐. 나부터도 믿지 못하겠는데.”
정세균 총리가 정부합동조사단 1차 조사 결과를 발표한 직후 통화한 민주당 한 초선 의원의 말이다. 이날 정 총리는 국토교통부 및 LH 직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1차 조사에서 20명의 투기 의심자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기존 시민단체에서 제기한 사례 13명 이외에 자체조사를 통해 7명을 추가로 발견한 것이다. 이 초선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의혹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데 조사는 수박 겉핥기에 그친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성난 민심을 달래기는커녕 오히려 부채질만 했다. 차명, 또는 법인을 활용한 투기 사례가 적지 않은 것으로 의심되는데 이 부분은 전혀 잡아내지 못했다. 그동안 제기됐던 조사의 한계점이 재확인된 것이다. 추후 언론이나 야당 등이 새로운 사례를 공개하면 부실 조사를 했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야당에서는 날선 반응을 내놨다. 김은혜 국민의힘 대변인은 “오늘 문재인 정부는 국민들에 큰 헛웃음을 주었다. 그러나 수확도 있었다. 문재인 정부가 이쯤에서 부동산 투기를 덮고 싶은 의지는 분명하게 확인했다”고 했다. 정호진 정의당 수석대변인도 “국민의 분노와 의혹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맹탕 발표”라면서 “빙산의 일각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채 변죽만 요란했다”고 꼬집었다.
3월 2일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 LH 투기 사례를 폭로한 이후 여권에선 연일 강경 발언이 쏟아져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다음 날인 3일부터 10일까지 6차례나 ‘발본색원’을 주문했다. 문 대통령이 특정 사안에 대해 거의 매일 메시지를 내는 것은 이례적이다. 정세균 총리는 3월 8일 “사생결단의 각오로 파헤쳐 비리행위자를 패가망신시켜야 할 것”이라고까지 했다.
인천시 계양구 동양동 한 도로변에 ‘계양신도시 보상반대 대책위원회’가 신도시 사업에 반발하는 내용이 담긴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진=임준선 기자
1차 조사 결과를 두고 ‘빈 수레가 요란했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런 정부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여권 인사들은 복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투기 사례가 적게 나온 부분은 안도하면서도 정부 조사에 대한 불신이 퍼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어차피 욕을 먹을 거 차라리 투기 의심자가 많이 나오는 게 나을 뻔했다’는 얘기도 공공연히 나돈다. 여권으로선 딜레마에 빠진 셈이다.
LH 사태가 불거진 후 여권에선 활용할 수 있는 카드들은 거의 다 꺼내다시피 했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전수조사 범위를 2013년 때까지로 넓힌다고 하자 ‘박근혜 정부 물타기 프레임’이라는 지적이 나왔고, 여야 국회의원 300명 전수조사 제안 역시 비슷한 반응이었다. 민주당 재선 의원은 “부산 엘시티 특혜 분양, MB(이명박) 정권 사찰 의혹 등 여권에 호재일 수 있는 대형 이슈들이 거론됐지만 LH에 밀려 전혀 이목을 끌지 못하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이는 그만큼 LH 투기 논란의 파괴력이 크다는 의미다. 집값 폭등, 전세난 등에 대한 불만이 ‘공정’이라는 가치 훼손과 맞물리면서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여기에 전직 LH 사장 출신이자 주무부처 수장인 변창흠 장관의 ‘감싸기’ 발언과 LH 직원들의 안이한 인식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계속 터져 나오는 여권 관련 인사들의 투기 사례, 정부 조사에 대한 불신 등도 마찬가지다.
민주당 재선 의원은 “그야말로 총체적인 난국이자 절체절명의 위기”라면서 “뾰족한 수가 없다는 점은 더욱 절망적”이라고 귀띔했다. 비문으로 분류되는 한 전직 의원은 “청와대의 초반 대응에 문제가 있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유일한 출구전략은 검찰을 포함한, 특별수사팀을 꾸려 투기 의심자를 조기에 색출, 엄단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오히려 문 대통령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면서 “지금은 뭘 해도 청와대가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형국이 됐다”고 했다.
또 다른 민주당 의원은 사석에서 “정부 조사로 투기 사례를 잡아낸 뒤, 이를 바탕으로 수사하겠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아마추어적 발상이다. 초반부터 강제 수사권을 동원해 자금을 따라가야 했다. 국민들이 의심스런 눈으로 봐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면서 “청와대와 친문이 검찰을 배제한다는 원칙을 이번만큼은 예외로 했어야 했다”고 했다. 그는 “LH 사태로 검찰 수사의 필요성이 오히려 높아졌다. 향후 검찰개혁 동력이 약화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사퇴를 표명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3월 4일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을 나서고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이러한 민주당 기류는 ‘변창흠 경질론’과 맞물리면서 당청 간 갈등으로까지 번질 조짐이다. LH 사태 초기 당내에선 변창흠 장관 경질이 불가피하다는 여론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청와대에선 이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냈다. 김태년 원내대표 등 당 지도부 역시 선을 그었다. 변 장관 경질로 부동산 정책이 차질을 빚을 수 있고, 또한 인사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으로까지 불똥이 번질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변 장관이 LH 투기 직원들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한 이후 당심은 싸늘하게 변했다. 야당 후보에 비해 근소하게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던 서울시장 보궐선거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이 줄을 이었다. 그러자 당내에선 변 장관 경질을 청와대에 요구해야 한다는 의견이 빠르게 퍼졌다. 비문뿐 아니라 친문계에서도 공감대가 형성됐다. 문 대통령 방침에 대해 사실상의 항명성 움직임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포스트 문재인’ 후보들이 공개적으로 청와대와 결이 다른 목소리를 냈다는 부분에 관심을 두는 이들이 많다. 정권 말 통상 나타나는 차기 주자들의 ‘마이웨이’가 시작됐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지는 해’인 현직 대통령의 국정 주도권은 급격히 빠질 수밖에 없다.
민주당 전 대표인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상임선대위원장은 3월 11일 “자리에 연연할 분이 아니라고 믿는다”며 변 장관 거취를 압박했다. 같은 날 4월 재보선 후 대권 출사표를 던질 정세균 총리도 “변창흠 장관은 이번 사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정치권에선 정 총리가 변 장관 사퇴를 문 대통령에게 건의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잠룡군인 김부겸 전 의원도 3월 10일 “국토부 장관이 여기 책임을 져야 된다. 그래서 사퇴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고 했다. 이재명 경기지사의 경우 변 장관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3월 11일 자신의 SNS에 “생선가게를 지키는 점원이 알고 보니 고양이였다”면서 LH 사태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낙연 선대위원장 측으로 분류되는 한 정치권 관계자는 “지금은 청와대 눈치를 보거나 사정을 고려할 때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민주당, 차기 주자들이 이런 스탠스를 취하는 것은 우선 LH 사태가 대선 전초전인 4월 보선에 악역향을 미칠 것이란 판단에서다. 일각에선 투표율이 낮은 보궐선거 특성상 위기를 느낀 민주당 지지층이 결집할 경우 오히려 승산이 있다는 얘기도 나오긴 한다. 하지만, 정치권에선 LH 투기 의혹에 따른 중도층 이탈로 민주당이 어려운 싸움을 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LH 투기가 대선 레이스 내내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우려도 팽배하다. 새로운 의혹들이 공개될 때마다 타격은 불가피하다. 야당이 연루될 수도 있겠지만 집권당 리스크가 훨씬 크다. ‘청와대와 선을 그을 때’라는 얘기가 물밑에서 거론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읽힌다. 실제 일부 초선 의원들은 “문 대통령이 직접 사과한 뒤, 당적을 버려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당의 또 다른 초선 의원은 “LH 사태는 일회성 악재가 아니다. 대선 내내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곤혹스럽게 할 것이다. 엄정한 수사도 필요하겠지만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과연 지금의 민심을 변창흠 장관 경질로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문 대통령 임기는 1년밖에 남지 않았지만, 민주당은 정권을 재창출해야 하고 앞으로 남은 개혁 과제도 완수해야 한다”고 했다. 문 대통령 ‘책임론’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민주당의 또 다른 고민은 LH 사태가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겐 호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부분이다. 윤 전 총장은 현재 야권의 가장 유력한 차기 주자다. 총장직을 던진 후 대선 후보 선호도가 상승 추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몇몇 여론조사에선 이재명 경기지사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일요신문이 조원씨앤아이에 의뢰해 2월 28일부터 3월 2일까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윤 전 총장을 지지하는 이유 1위는 ‘정당에 휘둘리지 않을 듯해서(43.7%)’였고, 2위는 ‘부정부패가 없어서(19.6%)’였다(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자세한 사항은 조원씨앤아이 또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국민들이 LH 투기를 심각한 부정부패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윤 전 총장의 이러한 이미지는 향후 대선에 출마할 경우 큰 이점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실제 윤 전 총장은 몇몇 언론을 통해 “공적 정보를 도둑질해 부동산 투기하는 것은 망국의 범죄” “LH 투기 사태는 게임룰이 조작되고 있어 아예 승산이 없다는 걸 보여준 것”이라면서 강하게 비판했다.
윤 전 총장 자신의 ‘주특기’를 적극 활용해 선택적 메시지를 낸 셈이다. LH 사태에 대한 정부 조사와 수사가 신통치 않을 경우 윤 전 총장 위상은 더욱 부각될 전망이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