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KBS 다큐멘터리3일
그래서일까 고파도 주민들의 일상도 평화롭다. 그저 바다가 내어준 것들을 고스란히 받아 살아간다. 고파도에는 구멍가게 하나, 식당 하나 없다. 육지로 통하는 방법은 하루에 딱 3번 운행하는 여객선뿐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로 이마저도 운행을 멈추면 주민들은 섬으로 들어오지도 뭍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그렇기에 주민들은 서산 시내에 나갈 때마다 며칠 치, 길게는 몇 주 치 식재료와 생활용품을 사들여야 한다. 하지만 이에 불만을 토하는 이는 없다. 조금 부족할 땐 함께 나누고 난감한 상황을 서로 도와 헤쳐나간다. 편리하지 않은 섬 생활을 결핍이라 여기지 않는 이들의 삶에는 고요한 여유가 출렁이고, 따뜻한 정이 흐른다.
3월 이 조그마한 섬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여느 섬마을 주민들이 그렇듯 고파도 주민들에게도 바다는 살림 밑천이다. 고파도의 특산물은 굴과 바지락이다. 긴 겨울 동안 효자 노릇 톡톡히 해낸 굴이 바닥날 때쯤이면 바지락에 통통히 살이 오른다. 굴을 보내고 바지락을 맞이하는 3월 마을 주민들은 그 어느 계절보다 부단히 손을 놀린다.
마을 주민들이 모두 바다로 나간 한적한 마을 글 읽는 소리가 그 빈자리를 채운다. 1960년에 설립된 고파도분교는 이 섬 주민들의 요람이 되어주었다. 해가 거듭될수록 학생이 줄어 2021년 현재에는 단 두 명만이 남아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로 5학년이 된 섬마을 유일한 어린이 김아라(11세). 3월 새 학기를 맞은 아라는 야무지게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간다. 그런 아라의 곁에는 돋보기를 쓴 조금 특별한 초등학생이 학교로 걸음한다.
세월이 주름진 손으로 또박또박 이름의 적는 이는 바로 심동재 씨. 그는 글을 모르고 살아온 70년 세월이 야속해 분교의 문을 두드렸다. 이후 학생으로 정식 등록되어 현재는 3학년 과정을 밟고 있다. 그는 조새(굴 까는 도구) 대신 연필을 쥘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바다로 나가는 그를 책상 앞으로 이끈 것은 그의 남편 한상철 씨. 시장에 나가 공책을 한 아름 사 안긴 것으로 모자라 바지락 작업까지 도와가며 물심양면 아내의 공부를 돕는다. 홀로 남은 동네 어르신들이 글을 몰라 곤혹을 겪는 경우를 종종 봐왔기 때문이다.
삶의 매듭을 지어가는 시기 심동재, 한상철 부부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도전을 이어간다.
섬의 밤은 도시의 밤보다 일찍 찾아온다. 하지만 유일하게 불이 꺼지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고파도분교다. 초등학생들이 하교한 후에는 세 명의 만학도가 배움을 이어간다. 못다 한 배움의 꿈이 등불이 되어 고파도의 밤을 밝힌다.
삶의 파고를 넘으며 부지런히도 살아오느라 이름 석 자 쓰는 것도 욕심이었던 지난날. 어르신들은 인생의 온점을 찍는 날까지 즐겁게 살아가기 위해 한글을 배운다. 종일 이어진 바닷일로 지친 몸을 이끌고 학교에 간다. 허리는 굽었지만 배움에 대한 열의만큼은 꼿꼿하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