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커리어 최고의 순간은 한국생활 2년…당시 베프는 김민호, 소맥 등 한국음식도 즐겨”
그러나 두 번째 시즌은 부상으로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시즌 초반 경기 중 왼쪽 무릎 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으로 62경기만 소화했고, 타율 0.250 홈런 3개 17타점 도루 2개를 기록하면서 더 이상 OB 베어스와 인연을 이어가지 못했다. 1998년 준플레이오프에서 끝내기 실책의 장본인이기도 한 에드가 캐세레스는 한국을 떠난 후 은퇴했고, 지금은 미국 플로리다주 브랜든턴에 자리한 IMG 아카데미에서 타격 코치로 활약 중이다.
1998년 KBO리그 외국인 선수 제도 도입 이후 OB 베어스 최초 외국인 선수였던 에드가 캐세레스를 만났다. 사진=이영미 기자
3월 초 플로리다 IMG 아카데미에서 에드가 캐세레스 코치(57)를 만났다. 그는 한국 취재진을 보고 “안녕하세요”라고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며 크게 반가워했다. 에드가 캐세레스 코치와의 인터뷰를 정리한다.
―두산의 오랜 팬들은 타이론 우즈와 함께 뛰었던 에드가 케세레스를 기억할 것이다.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소개해 달라.
“나는 IMG 아카데미에서 13년째 일하고 있다. 두산(OB) 베어스에서 2년을 뛰었고, 다음 해에도 더 그곳에 머무르고 싶었지만 당시 외국인 선수 보유 제한 문제로 더 이상 두산과 인연을 잊지 못했다. 그 후 미국으로 돌아와 코치 생활을 시작했는데 첫해에는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그리고 신시내티 레즈에서 5년을, 이후 워싱턴 내셔널스에서 2년을 더 보냈다. 집을 떠나 오랫동안 지도자 생활을 하다 보니 가족들이 너무 힘들어 해 이곳 아카데미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하며 자리를 잡았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선수가 42명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230명까지 늘어났다. 대단한 발전이다.”
―그렇다면 은퇴 후 코치로 보낸 시간들이 어떻게 되나.
“한국에서 선수 생활 마치고 바로 시작했으니 한 20년 정도 됐을 것이다. 나는 한국 말고 다른 리그에서 뛰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서 커리어를 끝내고 싶었다.”
―1983년 LA 다저스의 지명을 받았지만 이후 13년 동안 마이너리그 생활을 전전한 것으로 알고 있다.
“힘든 시기였다. 마이너리그에서도 오래 뛰었지만 매년 겨울이 되면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열리는 윈터리그에서도 16년 동안 활약했다. 1년 12개월 중 한 달 정도의 휴식만 보내고 11개월은 야구장에서 산 셈이다. 매년 200경기 이상 뛰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고군분투하다 마이너리거 13년 차에 캔자스시티 로열스에서 빅리그 무대에 데뷔했다. 이후 2년 정도는 트리플A 팀에서 뛰다 이듬해(1998년) 한국으로 가게 된 것이다.”
캐세레스는 OB 유니폼을 입고 2년간 유격수와 2루수를 오가며 활약했다. 사진=연합뉴스
―당신이 한국에서 뛸 시기는 KBO리그에 외국인 선수 제도가 처음 도입됐을 때다. 한국이란 나라 자체도 생소했을 것 같은데.
“나라, 야구 환경, 문화 등은 생소했지만 내 커리어에서 최고의 순간을 꼽으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한국에서 보낸 2년의 시간을 꼽을 것이다. 무엇보다 동료 선수들이 나를 잘 챙겨줬다. 동료들과 함께 원정 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니고, 함께 야구했던 순간들을 잊지 못한다. 당신은 내 말을 믿지 못하겠지만 난 지금도 그 선수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내 마음 속의 ‘넘버 원’이기 때문이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 꼭 다시 가고 싶다.”
―혹시 당시 함께했던 선수들 중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이 있나.
“한동안 자주 연락을 하다 사람들의 전화번호가 바뀌면서 연락이 끊겼다.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람은 지금 두산 베어스 감독인 김태형이다. 물론 그의 연락처는 모른다(웃음).”
―같은 팀의 타이론 우즈가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그와 친하게 지냈는지 궁금하다.
“제법 친했다. 김민호가 유격수였고, 내가 2루수였기 때문에 우즈와 항상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우즈를 ‘T’라고 불렀다. 마지막으로 그와 연락했던 게 한국 생활 마치고 한 번도 없었다. T는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다 일본으로 향했고, 나는 미국에 왔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야구하며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무엇이었나.
“심판들의 스트라이크존이었다. 메이저리그나 트리플A 심판들은 스트라이크존이 좁은 반면에 한국 심판들의 스트라이크존은 매우 넓게 느껴졌다. 당시 T(타이론 우즈)한테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심판한테 말을 붙이면 좀 봐주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 후 실제로 심판들한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하면 그들이 웃으면서 농담도 건넸다. 그랬더니 진짜로 스트라이크존이 조금씩 줄어들더라. 그렇게 나의 스트라이크존을 만들어야 했다. 여기도 마찬가지다. 선수 경험에 따라 심판의 스트라이크존이 달라진다.”
―한국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생새우를 먹었을 때다 어떤 선수가 내게 먹어보라고 했을 때 안 먹겠다고 거부했다. 그런데 막상 먹어보니 정말 맛있더라. 한국 음식을 아주 좋아한다. ‘소맥’도 즐겨 마셨다. 한 번은 상대 팀 선수와 다툰 적이 있었다. 내가 타석에 섰을 때 상대팀 포수가 한국어로 욕을 하더라. 그래서 나도 한국 욕으로 받아쳤더니 그가 흥분해서 일어서더라. 그 다음 타석에서 상대팀 투수가 내게 몸에 맞는 볼을 던졌다. 그래서 몸싸움이 일어났고, 난 그 경기에서 퇴장을 당했다. 정말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었다.”
―OB 베어스에는 전설의 ‘우-동-수(우즈-김동주-심정수) 트리오’가 있었다. 이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체격이 큰 선수들이었다. 김동주는 이후 선수 생활을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OB에 있을 때 김동주 나이가 19세인가, 20세인가 그랬다. 나는 심정수를 ‘에그맨’이라고 불렀다. 그가 몸을 키우려고 매일 달걀 한 판을 먹었기 때문이다. OB 시절 나의 베스트 프렌드는 김민호였다. 그와 유격수, 2루수를 번갈아 보며 많은 대화를 나눴고, 같이 시간을 보냈다. 서로 영어를, 한국어를 알려주며 더 친하게 지냈다.”
―한국에서 생활한 시간이 길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한국 음식을 즐겨 먹고,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다는 게 인상적이다.
“2년 동안 많은 걸 배우고 경험했다. 좋은 친구들을 사귀고 정을 느끼면서 한국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아, 참! 나랑 같은 베네수엘라 출신의 선수 중 한 명이 지금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있더라. 카를로스 수베로와 친하다. 그 친구가 한국 팀에서 감독을 맡았다는 게 신기하다. 베어스 팀에는 팬들이 많았다. 어떤 팬들은 지방까지 따라와서 응원을 해줬다. 정말 재미있는 시간들이었다.”
―1999년 현대 유니콘스와 경기에서 무릎 부상을 당했다. 이후 저조한 성적을 나타냈다.
“어쩌겠나. 그게 야구인걸. 야구하면서 그런 부상을 당한 적이 없었는데 하필이면 한국에서 큰 부상을 당해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 때문에 모든 게 멈춰버렸으니까. 다행인 건 열심히 재활한 덕분에 다시 경기에 나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김인식 감독이 내게 더 기회를 주려고 노력하셨지만 구단은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한국에서 더 뛰고 싶었지만 내게 더 이상 자리를 줄 수 없다고 하더라. 아쉽긴 해도 한국에서 보낸 시간들을 후회하진 않는다. 당시 멕시코나 트리플A 팀에서 오퍼가 왔는데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어 거절했다.”
―황재균 선수가 메이저리그 진출을 앞두고 이곳 IMG 아카데미에서 당신한테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맞다. 바로 여기서 훈련했다. 그와 땅볼 처리 훈련도 하고, 타격 훈련할 때 내가 공을 던져줬다. 그는 지금 어디에서 뛰고 있나. (KT 선수로 활약 중이라는 이야기에) 그는 정말 훌륭한 선수다. 우리 둘의 합이 잘 맞았다. 황재균 이전에 다른 한국 선수들도 여기 와서 훈련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한국 선수들은 ‘KIM’이 너무 많다(웃음).”
―당신을 기억하는 베어스 팬들에게 인사 메시지를 남겨 달라.
“나는 항상 한국을 그리워하고 있고, 한국에서 보낸 시간들을 기분 좋게 추억한다. 열정적으로 응원을 보내준 팬들을 떠올리면 행복해질 때가 많다. 팬들, 선수들 외에 코치, 트레이너, 구단 직원들, 버스 기사 등 모든 사람들이 보고 싶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두산 베어스를 응원하고 있다.”
에드가 캐세레스 코치에게 “만약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할 의향이 있느냐”라고 물었다. 그는 “그런 변화를 도모하기엔 내 나이가 너무 많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캐세레스 코치는 IMG 아카데미에서 메이저리그 선수를 꿈꾸는 유망주들을 육성하는 일이 자신한테 더 맞는 자리라는 말도 덧붙였다.
미국 플로리다주 브래든턴=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