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행정부의 입김·위기감이 합의 배경 꼽혀…글로벌 경쟁 심화 속 ‘입지 굳히기’ 과제 당면
배터리 분쟁을 놓고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던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이 2조 원 규모의 합의안을 전격 발표했다. 사진=연합뉴스
#날 세우다 급히 내놓은 2조 합의안, 그 배경엔 조 바이든?
LG엔솔과 SK이노는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서 진행 중인 배터리 분쟁을 모두 종식하기로 합의했다고 11일 공동 입장문을 발표했다. 이로써 2019년 4월부터 진행된 모든 소송절차가 2년 만에 마침표를 찍었다. 합의 내용은 △SK이노가 LG엔솔에 현재가치 기준 총액 2조 원(현금 1조 원, 로열티 1조 원) 지급하고 △관련 국내외 쟁송 모두를 취하하며 △향후 10년간 추가 쟁송을 하지 않는 것이 뼈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양사는 상대를 향해 날을 세웠다. 지난 2월 ITC는 LG엔솔의 영업비밀 침해 주장을 받아들여 SK이노에 ‘미국 내 10년 수입 금지’ 결정을 내렸고, 최종 결정 이후 60일 동안 대통령의 승인 절차를 밟았다. LG엔솔은 SK이노에 3조 원 이상의 배상금을 제시했다. 그러나 SK이노는 수천억 원대를 주장하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ITC 판결 거부권 행사를 기대한다며 맞섰다. 공격적 태세를 유지하던 양사가 거부권 행사 시한 하루를 앞두고 합의안을 도출해 냈다.
이번 합의의 배경을 두고 미국 행정부의 입김이 꼽는 이들이 많다. 기술 유출이라는 ITC 판단이 나온 상황에서 그간 지식재산권 보호를 강조했던 미 행정부의 입장과 거부권 행사 사례가 드물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바이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렇다고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SK이노의 조지아주 배터리 공장 건립과 제품 생산에 차질이 불가피해진다. 이 경우 SK이노의 미국 완성차업체 배터리 공급과 지역 내 2600개 일자리 창출 계획이 엎어질 수 있다.
정치적 이해관계도 걸려있다. 민주당 소속 바이든 대통령은 선거 때마다 공화당 우세지역으로 꼽히는 조지아주의 표심을 잡아야 한다. 또 자신의 공약이자 주요 정책인 친환경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는 LG엔솔과 SK이노 모두 필요한 기업이다. 따라서 미국 조지아주 정·관계 인사는 물론 미국과 한국 정부까지 나서서 양사의 합의를 종용했다는 해석이다. 해외 매체들이 양사 합의의 최대 승리자는 바이든 정부라고 표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우리나라 국무총리가 수차례 언급했음에도 꿈쩍 않던 양사가 극적으로 합의한 모습은 미국이 나서 합의를 압박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양사도 GM과 포드 등 미국 내 고객사가 많아 조지아주와 백악관 입장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거부권 행사 기간이 끝난 뒤 합의해도 되는데 굳이 하루 전날 합의한 것도 이런 이유 아니겠느냐”고 봤다.
기업분석 전문가인 박주근 전 CEO스코어 대표는 “여러 정황상 바이든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거부권 시한 막바지에 SK이노에서 협상에 나선 듯하다. 거부권 행사가 없으면 10년간 생산을 못하기에 공장 건립비와 포드, 폴크스바겐에 배터리 공급계약을 지키지 못한 배상금 등으로 5조~6조 원 이상 날아갈 수 있다”며 “손실을 덜 보고, 미국에서 입지를 굳힐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2조 원대 수준에서 합의를 본 것 아니겠느냐”고 해석했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이 2조 원의 합의안을 전격 발표하면서 배경과 득실, 향후 과제에 관심이 쏠린다. 서울 LG 본사 건물 모습. 사진=연합뉴스
#합의 득실과 최종 승자는? ‘윈윈’ or LG
이번 합의로 양사 모두 불확실성을 해소하며 ‘윈윈’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소송을 길게 끌면 잃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테슬라는 물론 폴크스바겐이 배터리 내재화를 발표하는 등 완성차업체들의 배터리 내재화 흐름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또 중국과 일본 배터리업체들의 투자 강화로 K-배터리가 위협받는 상황이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2월 기준 중국 CATL의 점유율은 31.7%로 LG엔솔(19.2%)과 격차가 크다. SK이노도 5%로 일본 파나소닉(17.2%)은 물론 중국 BYD(7%)에도 미치지 못했다. 적극적인 사업 투자가 시급한 상황에서 장기 소송으로 발목이 묶였다간 자칫 배터리 시장 주도권 쟁탈전에서 밀릴 수 있다.
개별적으로도 SK이노는 미국 내 사업이 가능해졌고 더는 기술유출 문제로 소송에 얽매일 우려가 사라졌다. LG엔솔 역시 명분과 실리 모두 챙겼다. 기존 요구 금액보다는 낮지만 2조 원 합의금으로 현대차 코나의 배터리 화재 배상금 지불에 따른 부담을 해소하고, 배터리 투자에 드라이브를 걸 수 있다. LG엔솔 상장을 앞두고 불확실성이 해소돼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도 있다.
물론 손익계산서만 보자면 SK이노가 잃는 것이 많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처음부터 돈 주고 끝냈으면 좋았는데 합의금을 1조 원 이하로 깎으려다 기술유출을 인정하고 합의하게 된 모양새”라며 “배터리라는 명확한 기술을 유출했다면 패소와 배상은 당연히 감내해야 할 리스크인데 자존심으로 버티면서 불확실성을 키우고 이미지도 실추됐다”고 지적했다.
한편 양사 모두 글로벌 시장에서 입지를 굳히는 것이 직면한 과제로 꼽힌다. 전기차 수요 급증으로 배터리 공급 부족이 심화하는 가운데, 양사 모두 2년간의 소송으로 생산능력 확장에 발목이 잡혔다는 지적이 많다.
배터리 업계 한 관계자는 “소송 중 K-배터리 이미지가 크게 훼손됐고 LG엔솔은 CATL로부터 점유율 1위 자리를 빼앗겼다. 적극적인 투자와 수주로 시장의 파이를 키우는데 집중해야 한다”며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연구개발과 설비 증설로 역량을 키워 완성차 업계가 내재화보다 배터리 업체와의 협업을 택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김예린 기자 yeap1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