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회 오너일가 독점, 퇴진 회장 여전히 최대주주, 수습 비대위원장은 부장급…회의적 시선 ‘가득’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이 지난 4일 서울 강남구 남양유업 본사에서 최근 자사 유제품 불가리스가 코로나19 억제 효과가 있다는 발표로 빚어진 논란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은 그동안 숱한 논란에도 고개를 숙인 적이 없었다. 2013년 ‘대리점 물건 밀어내기 사건’ 때는 물론 아인슈타인 우유 과대광고, 외조카 황하나 씨의 마약 범죄 혐의, 장남의 회사 돈 유용 논란 등으로 수차례 여론의 뭇매를 맞을 때 홍 회장이 직접 공식석상에 나온 적은 없었다. 이번 대국민 사과와 회장직 사퇴, 비대위 구성 등의 발표는 벼랑 끝에 몰린 홍 회장과 남양유업이 내릴 수밖에 없었던 마지막 결단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홍원식 회장과 회사의 사과, 약속은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무엇을’ 하겠다고는 밝혔지만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이 빠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번에도 다를 것 없다는 날선 비판이 나오고 있다.
‘어떻게’는 남양유업 특유의 지배구조 탓에 특히 중요하다. 남양유업의 최상위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는 사실상 오너일가가 독점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남양유업 이사회는 총 6명으로, 4인의 사내이사와 2인의 사외이사로 구성돼 있다. 사내이사는 현재 홍 회장과 장남 홍진석 상무, 모친 지송죽 씨가 자리잡고 있고, 나머지 한 자리는 홍 회장에 앞서 사임한 이광범 전 대표이사가 맡고 있다. 이 전 대표는 28년간 남양유업에서 총무, 영업 등을 거친 정통 ‘남양맨’으로 홍 회장의 복심으로 통한다. 가족으로 구성된 이사회에서 소수 사외이사가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홍 회장이 사퇴하고 자녀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는다 해도 회사의 주요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내이사, 등기임원 자리는 얼마든지 유지할 수 있다. 실제 사내에서 뚜렷한 역할이 없는 홍 회장의 모친 지송죽 씨는 올해 93세가 됐지만 9연임 중이다. 최근 3년 동안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고 있다. 장남 홍진석 상무는 회사 돈 유용 등의 이유로 지난 4월 보직해임됐지만 이사회 등기임원으로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고, 홍 회장은 올해 3월 연임을 시작했다. 이들이 사내이사에서 물러나더라도 기타비상무이사나 사외이사 등으로 이사회에 다시 진입할 가능성도 있다.
이사회를 정리하더라도 숙제는 또 있다. 지분 문제다. 홍원식 회장은 남양유업 최대주주로 절대적 경영권을 확보하고 있다. 지난해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홍 회장은 혼자 회사 지분 51.68%를 보유하고 있다. 홍 회장 아내 이운경 씨가 0.89%, 홍 회장의 형제 홍우식 씨와 홍명식 씨가 각각 0.77%, 0.45%, 손자 홍승의 씨가 증여를 통해 0.06%를 보유하면서 홍 회장 일가 경영을 뒷받침하고 있다.
직을 내놓은 홍원식 회장의 지분이 장남, 차남에게 그대로 승계될 경우 이들은 경영권이 없어도 최대주주로서 회사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결국 구체적인 쇄신 방안이 빠진 홍 회장의 선언은 두 아들에게 단순히 회장직을 물려주지는 않겠다는 뜻인지 경영 과정에서 완전히 배제하겠다는 의미인지 알 수 없다. 홍 회장이 사퇴 의사를 밝힌 지 열흘이 지났지만 오너일가가 이사회 보직 완전 포기, 지분 정리 등의 계획은 아직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견제 기능이 상실된 이사회와 압도적 지분이 있는 오너일가의 영향력은 그동안 회사에서 반복적으로 불거진 논란의 근본 원인으로 꼽힌다. 이를 의식한 듯 남양유업이 사태 수습을 위해 구성한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는 최근 경영 쇄신안 마련과 함께 대주주에게 소유·경영 분리를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마저도 가능할지 의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비대위를 이끌어갈 위원장이 내부 인사로 결정됐고, 직급도 부장급이기 때문이다. 경영에서 물러났음에도 오너일가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월급을 받는 부장급 직원이 소유와 경영 분리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남양유업이 경영 쇄신을 추진한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계획이 공개되지 않으면서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서울 남양유업 본사. 사진=일요신문DB
반대로 관련 업계 일각에선 남양유업이 처한 상황, 사내 문화 등도 함께 감안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통상 경영진과 이사회 교체, 또는 비대위 구성 과정에선 혁신적인 외부 인사를 영입하지만 회사 이미지가 크게 훼손된 상황이라 외부 수혈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란 풀이다. 여기에 남양유업은 그동안 외부 전문경영인 영입보다 소수 내부 인력을 통해 회사를 이끌어 온 만큼 대내외 인재풀이 좁다는 평가를 받아오기도 했다.
당장 내세울 수 있는 내부 인사도 현재로선 단 한 명뿐이다. 남양유업은 과거 ‘대리점 갑질 사건’ 이후로 책임자들이 사퇴하고 실적이 하락하면서 임원 수가 매년 줄고 있다. 2017년까지 16명을 유지했으나 지난해 9명으로 줄었다. 오너일가와 이광범 전 대표이사, 사외이사 등을 제외하면 현재 발탁할 수 있는 내부 인사는 박종수 연구소장(상무)과 이창원 나주공장장(상무)이다. 그러나 박종수 상무는 ‘불가리스 사태’ 당시 직접 연구발표를 진행하는 등 프로젝트 핵심 인사였다.
남양유업 안팎에선 단순 직급보다 회사 특유의 문화와 연결해서 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비대위원장은 정재연 세종공장장이 맡았는데, 남양유업의 주력 생산 거점인 세종공장의 수장은 다른 기업의 계열사 대표만큼 권위를 가진다는 게 회사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남양유업에서 첫 회사 생활을 시작해 28년째 재직 중인 정재연 공장장은 2018년 남양유업 분유 이물질 혼입 사태 당시 논란을 수습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존재감이 더욱 커졌다는 평가도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순서상 홍 회장이 이사회와 지분 등을 정리한 뒤 사퇴를 공식화했다면 문제가 지금처럼 커지진 않았을 것”이라면서도 “불가리스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면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는 일이 먼저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남양유업 관계자는 “후속 대책에 대해 신중하게 논의 중이다. 구체적인 계획들이 결정되면 공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