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사학원-엔터사’ 커넥션 “도제식→공장식 스케일만 커져”…피해자들 ‘퇴출 될라’ 냉가슴
지난 5월 8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K팝 유령 작사가 논란을 다뤘다. 사진=SBS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화면 캡처
K팝 유령 작사가 문제는 5월 3월 트위터에서 먼저 터져 나왔다. ‘익명의 케이팝 작사가 대리인’이라는 이름의 계정은 “작사에 참여하지 않은 이가 작사가로 등록되는 일이 빈번하다. K팝의 퀄리티와 참여하는 이의 의욕을 깨트리는 일이 지금 구조에서 당연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하며 현 K팝 시장에 만연한 유령 작사가 피해 사례를 공개했다.
이 사례에서 가장 크게 지적된 것은 ‘작사학원’ 문제였다. 대리인은 “최근 K팝 작사는 팀으로 이뤄지며 팀의 정체는 대부분 학원”이라며 “K팝 작사가를 꿈꾸는 작사가 지망생은 매달 30만~40만 원의 수업비를 내고 10개월가량 수업을 들으면 데모(Demo·음원 샘플)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 데모를 받지 못하면 작사를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학원을 거치지 않고서는 애초에 작사가로 데뷔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장이 된 셈이다.
대리인은 “이 과정에서 학원은 갑의 위치를 차지한다. 수강생 전체에게 가사를 받은 뒤 그 가운데 학원의 마음에 드는 가사를 채택해 조합한다”며 “그 과정에서 누가 얼마만큼 작사에 참여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작사에 참여하지 않은 이의 이름이 오르더라도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여러 명이 각자 만든 가사를 조각 내 다시 맞춘 뒤 완성본을 내는 과정을 외부에 전혀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 작사에 참여했더라도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지분이 주어지는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작사학원의 갑질과 유령 작사가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이들의 사례를 공론화한 트위터 계정은 폭로의 목적에 대해 이처럼 말했다. 사진=트위터 캡처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가사의 완성본이 엔터테인먼트사 측으로 넘겨지면 학원은 작사비를 받는다. 그런데 작사에 참여한 작사가에게는 지분만큼의 작사비가 주어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애초에 작사 저작권료의 최소 20%, 최대 40%까지 학원이 챙기면서도, 정작 작사에 기여한 이들에게는 학원이 임의대로 지분을 정하는 식이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유령 작사가’들이 등장한다. 대리인은 “많은 K팝 곡들이 퀄리티와 관계없이 학원의 이해관계로 만들어지는데 그중에는 매번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는 이들이 있다”며 “한두 글자를 고치거나 작사에 참여하지 않고도 크레딧을 이름에 올린다. 이런 유령 작사가는 학원에만 있지 않다”고 꼬집었다. 그런데 이처럼 실제 참여했는지 여부를 알 수도 없는 이들이 작사 크레딧에 올라 더 많은 저작권료를 받아가기도 한다.
‘유령 작사가’의 실체가 드러난 것은 지난 5월 6일의 일이다. SBS 시사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가 K팝 유령 작사가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SM엔터테인먼트 소속 A&R 유닛장 A 씨가 자신의 아내를 유령 작사가로 SM엔터 소속 다수의 아티스트 곡 작사 크레딧에 올린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A&R(Artists & Repertoire)은 앨범 전반을 기획, 관리하는 부서로 작사 내용을 취합하고 채택하는 업무도 담당한다. 이 점을 악용해 자신의 부인을 작사가로 올려 회사도 모르게 ‘저작권료 빼돌리기’를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SM엔터 측은 곧바로 해당 직원에 징계 조치를 했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작사학원과 엔터사 직원의 ‘커넥션’이 드러난 것으로도 주목받았다. A 씨의 부인인 유령작사가가 작사학원 소속 작사가였고, 학원 측이 A 씨 부인이 쓴 가사를 포함해 곡을 올리면 A 씨가 채택해 앨범에 수록하는 방식으로 업무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해당 작사학원의 원장은 “유령작사가로 지목된 인물은 곡에 참여하지 않은 채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분을 가져간 적 없다. 다만 이 인물이 A&R의 가족이기에 비공개로 작업한 것이고 기획사에서 학원에 의뢰한 곡 가운데 이 인물이 참여한 곡이 많지만 불법적 거래나 부당한 일은 없었다”라고 해명했다.
유령 작사가의 문제는 가요계 내부에서 꾸준히 불거졌으나 ‘관행’이라는 이유로 묵살돼 왔다. 사진=SBS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화면 캡처
이 같은 유령 작사가의 문제는 2016년에도 피해자의 공개 지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바 있다. 작곡가 겸 가수 정의송이 당시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평의원 직을 맡고 있던 서 아무개 씨에게 자신이 작사한 곡의 권리를 빼앗겼다고 주장하면서다. 정의송은 1994년 발매돼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서울대전대구부산’ ‘참아주세요(뱀이다)’의 작사를 자신이 했으나, 서 씨가 무명이었던 자신에게서 작사 저작권을 가져갔다고 밝혔다.
당시 정의송은 “유명 가수나 매니저들 중 일부는 무명이나 신인 작가들에게 작사권을 요구하고 이를 통해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있다”며 가요계의 관행처럼 여겨지던 저작권 빼앗기를 꼬집었다. 현재 정의송의 두 곡은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모두 정의송의 작사곡으로 기재돼 있는 것이 확인됐다.
정의송의 경우 그가 어느 정도 유명세를 가지고 나서야 사안이 공론화되고 저작권의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런 만큼 인지도가 아예 없다시피 한 무명 작사가나 지망생들의 피해는 반짝 스포트라이트조차 받지 못하고 논란이 숙지면 함께 사그라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 문제가 도제식에서 공장식으로 그 ‘스케일’만 바뀌었을 뿐, 내부적으로 곪아 들어간 관행은 전혀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지적도 일었다. 데뷔할 수 있는 문은 여전히 좁고, 그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진 이들은 한정돼 있기 때문에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도돌이표라는 지적이다.
한 가요계 원로는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작사가 지망생들은 유명 작사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일을 배우는 것 외에는 작사가로 데뷔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다”라며 “무상으로 가르침을 받는 입장이라는 이유로 노래는 노래대로 빼앗기고 푼돈만 받으면서 매니저 일까지 하는 등 사실상 착취 상태에 놓여있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도제식으로 운영되다가 ‘프로듀싱팀’으로 이름만 바뀐 비슷한 형태로 또 착취당하고, 이제는 작사학원이라고 거창하게 이름을 내걸고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라며 “연예인들은 표준계약서가 만들어지면서 법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있지만 무명 작사가나 작곡가 혹은 지망생들은 희망이 거의 없다. 이미 업계 유명인들과 연예기획사들 사이에 커넥션이 존재하는데 부당함을 지적하고 법적 대응하겠다는 이들이 설 자리가 있겠나”라고 우려하기도 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