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G 정용진 도발하자 롯데 신동빈 야구장 방문…과거 LG 구본무·두산 박정원도 남다른 야구 애정
정용진 부회장은 음성 기반 SNS인 클럽하우스에 등장해 직접 야구단 인수 배경을 설명했고,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야구단 명칭과 상징색 등의 힌트를 던져 궁금증을 유발했다. 별명이 된 '용진이형'도 그 과정에서 생겼다. 정 부회장은 "야구팬들이 NC 다이노스 구단주인 김택진 NC소프트 대표를 '택진이형'이라고 부르는 게 부러웠다. 앞으로 나를 '용진이형'이라고 불러달라"며 친근함을 어필했다.
'세상에 없던 야구'를 모토로 출범한 SSG는 '세상에 없던 구단주'를 앞세워 연일 화제몰이를 하고 있다. SSG의 첫 시즌이 두 달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렇다.
#'용진이형 상'과 롯데를 향한 도발
올 시즌을 앞두고 SSG로 이적한 최주환은 시즌 개막전 다음날인 4월 6일 자신의 SNS에 정 부회장이 보낸 한우와 상장 사진을 공개했다. "생각지 못했던 정용진 구단주님 깜짝 서프라이즈. '용진이형 상' 정말 감사합니다. 맛있게 먹고 힘내서 야구 잘하겠습니다"는 인사말도 함께 적었다.
이유가 있다. 최주환은 SSG 창단 첫 경기였던 4월 4일 인천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홈런 두 방으로 3타점을 올려 승리의 주역이 됐다. 최주환이 공개한 상장에는 "위 선수는 2021년 개막전에서 눈부신 활약으로 SSG 랜더스 창단 첫 승리를 견인하였기에 '용진이형 상'을 수여하고 매우 매우 칭찬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같은 경기에서 SSG 창단 첫 홈런을 친 최정도 '용진이형 상'을 공동 수상해 역시 한우와 상장을 받았다. SSG 관계자는 "구단주가 자신의 이름을 딴 상을 만들어 수훈선수를 직접 챙기는 모습에 선수 사기도 한껏 치솟았다"고 귀띔했다.
그보다 먼저 화제가 됐던 건 유통업계 라이벌 롯데그룹을 향한 파격적 도발이다. 정 부회장은 클럽하우스에서 "롯데는 야구단의 가치를 본업에 연결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는 롯데와 달리 잘 연결할 거다. 게임에서 질 수는 있어도 마케팅에서만큼은 반드시 이기겠다. 앞으로 걔네(롯데)는 울며 겨자 먹기로 우리를 쫓아와야 할 것"이라고 선전포고를 했다.
롯데 측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인터넷몰 '롯데온'을 통해 롯데 개막전 응원 이벤트를 진행하면서 '원정 가서 쓰윽 이기고 온'이라는 홍보 문구를 내걸었다. '쓰윽'이라는 표현으로 개막전 상대인 SSG를 직접적으로 저격한 거다. 이 소식을 홍보하는 롯데 보도자료의 제목은 '야구도, 유통도 한 판 붙자'였다.
정 부회장은 오히려 태연하게 반응했다. "내가 의도한 결과가 나왔다. 롯데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 판을 키우고 싶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개막전에서 롯데를 꺾은 주역들에게 '용진이형 상'을 보내면서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정 부회장은 바로 그날 인천 SSG랜더스필드를 찾아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면서 경기를 끝까지 '직관'했다.
#구단주의 애정,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한 '애정 표현'이었다. 전례 없이 활력 넘치는 구단주의 등장을 야구계도 반겼다. 그러나 그 다음 행보를 놓고는 찬반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야구계의 '이슈 메이커'가 된 정 부회장은 한 발 더 나아갔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지난 4월 27일 잠실구장을 찾아 롯데와 LG 트윈스의 경기를 직접 관람한 뒤였다. 신동빈 회장이 야구장을 찾은 건 2015년 9월 11일 부산 삼성 라이온즈전 이후 6년 만이었다.
정용진 부회장은 그날 밤 늦게 다시 클럽하우스에 나타났다. "내가 롯데를 도발하니까 동빈이 형이 야구장에 왔다. 동빈이 형은 원래 야구에 관심이 없었는데, 내 도발 때문에 (야구단에 애정이 있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롯데 측은 이와 관련해 "신 회장은 지난해 1월 신격호 전 롯데그룹 명예회장 별세 이후 롯데 야구단의 새 구단주가 됐지만, 코로나19 여파로 야구장을 찾지 못하다가 올해 구단주 자격으로 처음 방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동시에 신세계에 맞불을 놓겠다는 의지도 숨기지 않았다. 신동빈 회장 방문 직후 "선수단의 선전을 기원하고자 선수 모두의 자택으로 한우 정육세트를 보낼 예정"이라고 했다. 수훈선수 두 명에게만 한우를 선물한 정 부회장보다 더 큰 '한 턱'을 내겠다는 거다.
물론 정 부회장의 도발이 진짜로 '싸우자'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는 이미 "롯데는 우리의 30년 동반자다. 롯데 덕분에 우리가 크고, 롯데도 우리 덕분에 컸다"고 말한 바 있다. 이날도 "롯데랑 사이가 안 좋은 건 아니다. 이런 라이벌 구도를 통해 야구판이 더 커지길 원한다. 지금이라도 동빈이 형이 연락해서 '너 그만하라'고 얘기하면 그만하겠다"고 했다.
다만 타 구단을 향한 발언의 수위가 지나치게 높았던 게 문제다. 정 부회장은 롯데 이야기가 끝난 뒤 '그 외에 라이벌로 생각하는 다른 구단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키움 히어로즈를 언급했다. 과거 자신이 키움 인수를 시도했다가 실패했던 비화를 공개하면서 "상대가 나를 X무시하고 구단을 팔지 않았다. 키움이 SSG에 졌을 때 'XXX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움을 발라 버리고 싶다"고 여과 없이 과격한 표현을 썼다. 서서히 "정 부회장이 선을 넘고 있다"는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최근 SSG 소속 선수를 개인적으로 격려한 일도 야구계의 찬반이 엇갈린 에피소드 중 하나다. SSG의 스무 살 왼손 투수 오원석은 지난 23일 LG 트윈스전 선발 등판을 앞두고 모르는 사람이 보낸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정용진입니다. 상대 선발 앤드루 수아레즈를 의식하지 말고, 자신의 공을 던지면 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오원석은 "누군가 구단주님을 사칭한다고 생각해서 당일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진짜' 정 부회장이었다. 이미 정 부회장과 연락을 주고받은 팀 선배 추신수가 다음날 오원석에게 다가와 "구단주께서 직접 네게 응원 메시지를 보내셨다더라"고 귀띔했다. 오원석은 깜짝 놀라 바로 "응원 감사하다. 믿음에 보답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그날 6이닝 5피안타 6탈삼진 무실점으로 호투해 데뷔 첫 선발승을 거뒀다.
정용진 부회장의 특별한 관심에서 시작된 SSG의 새로운 스토리는 최상의 결말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일부 야구 관계자들은 "팀 성적이 좋을 때는 괜찮을지 몰라도, 반대 경우 구단주와 선수들의 개인적 연락이 자칫 팀 내 위계질서를 흐트러뜨릴 수 있다. 과거 비슷한 일 때문에 팀워크가 깨지거나 감독이 권위를 잃은 팀들도 종종 있지 않았나"라고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SSG가 첫 해부터 선두권을 유지하면서 마케팅도 대박을 치는 지금은 모든 게 훈훈하고 장밋빛이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야구단 운영 기틀을 다지고 향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은 이벤트였다는 의미다.
#LG와 두산 구단주는 어떻게 애정을 표현했나
정용진 부회장 이전에도 야구단에 남다른 애정을 쏟은 구단주가 적지 않았다. 잠실구장을 함께 쓰는 LG와 두산 베어스 오너 일가가 대표적이다. LG 야구단의 '아버지'인 고 구본무 전 LG그룹 회장은 1990년 MBC 청룡을 인수해 LG로 재창단한 뒤 2007년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18년간 야구단에 남다른 애정과 지원을 보낸 구단주로 유명하다. 매년 수차례 야구장을 찾아 직접 LG 경기를 봤다. 매년 초에는 일본 스프링캠프를 방문해 감독과 선수단을 격려했다. 경남 진주 대곡면 단목리에 있는 외가로 LG 선수단을 초청하는 '단목 행사'를 열어 우승 기원 고사를 지내기도 했다.
지금 LG 구단 사무실 금고에는 고인의 애정을 보여주는 유산 하나가 22년째 잠들어 있다. 구 전 회장이 1998년 해외 출장을 갔다가 LG의 세 번째 우승을 기원하면서 산 롤렉스 시계다. 당시 가격이 8000만 원 상당이던 고가의 시계다. 고인은 이 손목시계를 구단에 전하면서 "다음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에게 이 시계를 선물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끝내 이 시계를 LG 선수의 손목에 채워주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올해 LG 선수들은 결정적인 활약을 한 뒤 왼쪽 손목을 오른손으로 감싸 쥐면서 기쁨을 표현하는 일명 '롤렉스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올해 꼭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해 23년 묵은 롤렉스의 주인을 찾아주겠다는 목표를 세웠기 때문이다. 단순히 '비싼' 시계가 아니라 LG 야구단의 역사와 전통이 서린,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보물을 손에 넣겠다는 의지다.
2009년부터 두산 구단주를 맡은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역시 야구를 무척 좋아하고, 야구장을 가장 많이 찾는 구단주로 꼽힌다. 바쁜 일과 속에서도 매일 야구 결과와 뉴스를 체크할 정도로 애정이 깊다는 후문이다. 특히 포스트시즌 때면 잠실구장에서 열리는 모든 경기를 직접 찾아와 관전한다. 야구단 운영에 불필요한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점도 박 회장의 가장 큰 강점으로 꼽힌다.
박정원 회장은 VIP석이 아닌 관중석에서 야구를 보고, 두산 팬과 어울려 응원가를 부른다는 점에서 더 특별하다. 두산 팬들이 쓰는 응원 머리띠를 직접 착용하고 환호하는 모습이 사진기자들의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팀이 초반부터 크게 뒤져 패색이 짙을 때도 경기 종료 순간까지 야구장을 지켜 더 박수를 받았다. 2014년 루 게릭 병 환자들을 위한 '아이스 버킷 챌린지'가 이어질 때는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거리낌 없이 릴레이에 참여했다. 구단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지만, 팬들의 눈높이에서 함께하는 구단주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