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지 의식적 밀어치기로, 강백호 기습 번트로 극복…원조 테드 윌리엄스 끝까지 당겨치기 고수
시프트는 야수들을 한쪽에 몰아 배치하는 모험적인 수비 전술이다. 사진 속 수비 중인 한화는 3루수를 1, 2루 사이에 배치했다. 사진=연합뉴스
늘 긍정적인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실패의 위험이 뒤따른다. 그래서 극단적인 시프트가 등장할 때면 늘 효용성 논란이 함께 불거진다. ‘하이 리턴’을 위해 ‘하이 리스크’를 감수하는 확률 게임이 바로 시프트다.
올 시즌에는 한화 이글스 지휘봉을 잡은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이 시범경기부터 과감하고 파격적인 시프트를 시도해 화제가 됐다. 과거엔 주로 로베르토 페타지니(전 LG 트윈스), 에릭 테임즈(전 NC 다이노스) 같은 정상급 외국인 타자들이 시프트의 타깃이었다면, 최근에는 시프트를 적용하는 타자의 범위와 수가 훨씬 넓어졌다.
심지어 수베로 감독은 볼 카운트에 따라 야수진의 위치가 시시각각 변하는 변화무쌍 시프트를 쓴다. 타자에게 유리한 볼카운트가 되면 한화 유격수가 중견수와 우익수 사이로 이동해 외야수만 넷이 되는 진풍경도 펼쳐진다. “타자들은 볼 카운트가 유리해지면 더 강한 스윙을 한다”는 이유에서다.
수베로 감독처럼 메이저리그에서 지도자 생활을 한 외국인 감독들이 시프트를 적극 활용하는 경향이 있다. 시프트의 근간이 되는 스프레이 차트(타자의 타구 방향을 분석한 통계)가 빅리그에서 가장 먼저 보편화됐다. 2018년 SK 와이번스(SSG 랜더스의 전신)를 우승으로 이끌었던 트레이 힐만 감독도 첫 시즌이던 2017년 다양한 시프트를 작전으로 활용해 눈길을 모았다.
이번 시즌 KBO리그 1년 차를 맞이한 수베로 한화 감독은 적극적인 시프트 활용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시프트는 왜 생겨났나
특정 타자를 겨냥한 시프트는 1940년대 미국 메이저리그(MLB)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1946년 7월 15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더블헤더 2차전에서 클리블랜드 루 부드로 감독이 강타자 테드 윌리엄스를 막기 위해 처음 시도했다고 알려져 있다.
야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타자 중 한 명인 윌리엄스는 극단적으로 당겨 치는 스타일의 왼손 타자였다. 당시 클리블랜드를 지휘하던 젊은 사령탑 부드로는 윌리엄스 타석이 돌아오자 야수들을 일제히 그라운드 오른쪽으로 이동시켰다. 3루수가 2루 뒤, 유격수와 2루수가 1·2루 사이, 1루수가 1루 뒤로 자리를 옮기는 형태였다.
외야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중견수는 우익수 자리에 서고, 우익수는 우측 파울라인 곁으로 바짝 붙었다. 그라운드 왼쪽에는 좌익수 한 명만 남겨뒀다. 윌리엄스의 타구가 대부분 그라운드 오른쪽으로 향하는 점을 고려해 수비 위치를 극단적으로 바꾼 것이다.
클리블랜드는 부드로 감독의 묘안 덕에 더블헤더 2차전에서 윌리엄스를 꽁꽁 묶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이 수비 포메이션에는 ‘부드로 시프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다른 팀들도 윌리엄스를 상대로 같은 시프트를 쓰기 시작한 뒤로는 ‘윌리엄스 시프트’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해졌다.
#타구의 길목에 덫을 놓는다
잘 맞은 타구도 야수 글러브에 빨려 들어가면 아웃이 되고, 빗맞은 타구도 그라운드에 떨어지면 안타가 된다. 그게 야구다. 투수가 홀로 상대 타자의 약점을 공략하기 어렵다면, 야수 전체가 힘을 합쳐 상대의 강점을 무력화하겠다는 게 시프트의 기본 의도였다. 강력한 덫을 발견한 감독들은 점점 다양한 방식으로 수비 위치를 조정하면서 타자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거의 정석처럼 굳어진 시프트도 적지 않다. 접전 혹은 끝내기 상황에서 3루 주자의 득점을 막기 위해 쓰는 내·외야 전진 수비, 거포들의 장타와 그 후의 중계 플레이를 대비하는 내·외야 후진 수비가 그런 사례다. 현대 야구에선 아예 ‘2루를 기준선으로 좌우 중 한 쪽에만 내야수 3명이 몰려 있을 때’(메이저리그 스탯캐스트 통계 기준)를 시프트로 규정하기도 한다.
특정 강타자를 상대로 한 시프트 역시 점점 더 자주 등장했다. ‘윌리엄스 시프트’ 이후 ‘배리 본즈 시프트’가 메이저리그를 또 한 번 휩쓸고 지나갔고, 국내에서도 ‘이승엽 시프트’, ‘김현수 시프트’, ‘페타지니 시프트’ 등이 끊임없이 등장했다. 모두 오른쪽으로 타구를 많이 보냈던 왼손 거포형 타자다.
프로야구 A 코치는 “시프트는 보통 극단적으로 당겨 치는 타자에게 많이 사용한다. 밀어 치는 타자는 언제든 당겨 칠 수 있지만, 당겨 치는 타자에게 그 반대는 어렵기 때문”이라며 “밀어 치는 데 능한 타자나 타구 방향이 부챗살처럼 퍼져 나가는 타자에게는 시프트를 적용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메이저리그보다 일본과 한국에서 과감한 수비 시프트가 적은 이유도 있다. A 코치는 “일본과 한국에는 기본적으로 스윙의 개념에 앞서 배트에 공을 맞히는 ‘콘택트’에 초점을 맞춘 타자들이 많다”며 “공격적으로 스윙하는 메이저리그 타자들과 달리 아시아 야구에선 시프트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일본과 한국 야구가 팀 배팅을 중요시하는 점도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시프트 때 자리를 옮기는 건 야수들이지만 투수의 역할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타자가 야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타구를 보낼 확률을 높이려면 먼저 투수가 그 타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코스로 공을 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B 코치는 “상대 4번 타자를 잡겠다고 수비 위치를 옮겨봤자 투수가 한가운데로 공을 던져 홈런을 맞으면 모든 게 끝 아닌가. 몸쪽이면 몸쪽, 바깥쪽이면 바깥쪽으로 투수가 전력분석에 맞게 컨트롤을 해줘야 시프트 성공률이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물론 그보다 더 허무한 상황은 아예 타자에게 타격 기회조차 주지 않을 때다. 이만수 전 SK 감독은 2013년 3월 넥센(현 키움) 히어로즈와 목동 시범경기에서 9회 말 2사 만루 끝내기 패배 위기를 맞자 중견수 김강민을 2루 뒤로 전진 배치하는 시프트를 실험했다. 그러나 투수가 밀어내기 볼넷으로 결승점을 허용해 시프트 효과는 확인하지도 못했다.
이만수 전 감독은 정규시즌 개막 후인 그해 4월 14일 NC와 창원 원정 경기에서 이 시프트를 다시 시도했다. 역시 3-3 동점이던 9회 말 1사 만루에서 중견수 김강민을 2루 근처까지 당겼다. 이번엔 타자가 타격을 했지만, 결과는 실패. NC가 기습적인 스퀴즈 번트로 끝내기 점수를 뽑아 시프트를 무력화했다.
#시프트의 진짜 효과는?
시프트의 효과는 다양하다. 타자를 아웃시킬 확률을 높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타자에게 심리적인 압박감을 주고, 나아가 타격 밸런스를 흐트러뜨리는 ‘일거양득’을 노린다. 실제로 많은 타자들은 “내 타구가 주로 향하는 곳에 야수들이 모여 있으면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토로한다. 결국 시프트를 피해 빈 공간으로 타구를 날리려다 스스로 리듬을 잃는 최악의 상황을 맞는다.
올해 시프트로 화제에 오른 수베로 감독도 아웃카운트 이외의 ‘부수적 효과’를 강조했다. 그는 “아무리 모든 방향으로 고르게 공을 보내는 타자라고 해도 장타나 강한 타구가 많이 나오는 부분이 있다. 야구는 확률의 스포츠고, 우리는 그 방향을 기준으로 시프트를 진행한다”며 “다른 팀들의 스프레이 차트를 바탕으로 반복적인 시도를 하다 보면 우리의 시프트가 성공적인지, 아니면 상대가 우리의 시프트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또 특정 타자가 시프트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중요한 데이터가 된다”고 설명했다.
반면 시프트를 맞닥뜨려야 하는 상대 팀 감독과 코치들은 타자들에게 “하던 대로 하라”고 당부할 수밖에 없다. 류지현 LG 감독은 “시프트는 상대 타자의 멘탈을 흔드는 효과가 있다. 타자가 이 부분을 의식하면 지는 것이다. 우리 타자들은 투구 타이밍만 신경 썼으면 좋겠다”고 했다.
C 코치는 “시프트를 깨기 위해 의식적으로 스윙을 바꾸면서 중심이동이 안 좋아진 타자도 봤다”며 “시프트를 피하려면 처음부터 타구가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타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또 자신의 타석에 시프트가 걸렸다면, 상대가 유인하는 특정 코스와 구종을 잘 골라내야 한다”고 조언했다. D 코치도 “시프트를 피해 밀어 친 안타 하나를 얻으려다 타격폼 자체가 무너지는 것보다는 정면승부가 낫다”고 덧붙였다.
2008년과 2009년 LG에서 뛴 외국인 타자 페타지니가 시프트로 고생하다 성적이 하락한 대표적 선수다. 첫 시즌 활약을 발판 삼아 2009년 재계약한 그는 당시 팀 내 토종 타자들의 타격 기술에도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최고의 기량을 과시했다. 국내에서 가장 큰 잠실구장을 홈으로 쓰면서도 6월까지 치열한 홈런왕 경쟁을 펼쳤을 정도다. 한 지붕 라이벌 두산 베어스와 맞대결에서는 3연타석 홈런의 대미를 끝내기 역전 만루홈런으로 장식하는 명장면도 남겼다. LG 역사상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자리매김할 기세였다.
다만 페타지니는 극단적으로 당겨 치는 풀스윙 히터였다. 시즌이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페타지니 타석에 특화된 시프트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우익수가 펜스 근처까지 뒤로 물러나고 2루수가 외야 잔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수비하는 형태였다. 페타지니의 타구가 가장 많이 날아가는 오른쪽 외야를 집중적으로 차단하겠다는 의도였다. 얼마 뒤엔 거의 전 구단이 이 시프트를 사용할 정도로 보편화됐다.
그러자 페타지니는 시프트에서 벗어나기 위해 밀어 치는 안타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조차 여의치 않을 때는 기습 번트를 대 후진 수비를 펼치던 상대 야수들을 교란시켰다. 그러나 그 후 다른 구단들은 ‘소극적인’ 페타지니 시프트로 맞불작전을 놓았다. 원래는 2루 뒤까지 옮겼던 유격수의 이동폭을 좁혀 밀어 치는 타구에 대응하면서 오른쪽 외야에는 변함없이 철벽을 쳤다. 외롭게 시프트와 싸우던 페타지니는 결국 4할 도전에 실패했고, 시즌 후반 들어 타율이 3할대 초중반까지 떨어지는 아쉬움을 맛봤다.
#양의지·강백호의 비책
덫을 피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상대가 덫을 놓지 못하게 하거나 덫에 걸리지 말아야 한다. 삼성 라이온즈에서 은퇴한 왼손타자 박한이는 밀어 치는 능력이 뛰어나 좌전 안타도 곧잘 만들어 냈다. 다른 팀이 3루수와 유격수를 왼쪽으로 이동시키는 수비 시프트를 시도해봤지만, 곧바로 비어 있는 중견수 쪽으로 연이어 안타를 때려내 시프트를 원천 봉쇄했다.
현역 최고 공수겸장 포수인 NC 양의지도 그랬다. 그는 지난 12일 대전 경기에서 한화가 야수들의 수비 위치를 왼쪽으로 옮기는 시프트를 가동하자 의식적으로 밀어 쳐 1루와 2루 사이를 꿰뚫는 안타를 만들어냈다. 정상 수비였다면 2루 땅볼로 아웃될 타구였는데, 중전 적시타로 연결됐다. 한화에는 두 배로 뼈아픈 안타였다. 양의지가 마지막 타석에서 결정적인 홈런까지 치자 더그아웃에서 그를 유심히 쳐다보는 수베로 감독의 모습이 TV 중계 화면에 잡히기도 했다.
양의지는 이와 관련해 “수비가 비어 있는 쪽으로 몸이 반응하는 것 같다. 볼카운트가 유리하면 (시프트에 관계없이) 과감하게 치지만, 득점권 상황이나 불리한 카운트에선 빈 곳으로 가볍게 친다는 생각으로 임한다”고 설명했다.
올 시즌 타격에 물이 오른 KT 위즈 강백호도 롯데 자이언츠의 수비 시프트에 ‘야구 천재’다운 방식으로 맞대응했다. 15일 부산 경기 첫 타석에서 롯데 래리 서튼 감독이 3루 쪽을 아예 비우는 시프트를 걸자 바로 그 3루 쪽으로 향하는 기습 번트 안타를 만들어내 허를 찔렀다.
다음 타석도 마찬가지였다. 4회에도 같은 시프트로 밀고 나온 롯데에 또 다시 3루 방향 기습 번트 안타로 응수했다. 올 시즌 1호 두 타석 연속 번트 안타였다. 그는 주자가 있는 상황이라 상대가 시프트를 쓸 수 없던 8회 호쾌한 스윙으로 동점 2점 홈런까지 터트려 기싸움에서 완승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시프트의 ‘원조’인 테드 윌리엄스는 어땠을까. 그는 끝까지 힘껏 잡아당기는 타격을 고수한 걸로 유명하다. 당시 시프트 포화를 맞던 그를 걱정하는 동료들에게 “난 한 번도 밀어 치는 타격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풀스윙에 자부심이 컸다.
윌리엄스는 자신의 저서 ‘타격의 과학’에서 당시를 떠올리면서 “980g의 약간 무거운 배트를 짧게 쥐고 치니 여러 방향으로 날카로운 타구들을 날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극단적인 수비 시프트 탓에 휑하니 뚫려 있던 좌익수 방향으로 많은 안타를 때려냈다”고 회고했다.
또 “얼마 후 ‘테드 윌리엄스가 나이 때문에 더 이상 잡아당기지 못하는 모양’이라고 판단한 다른 팀들이 시프트를 풀고 정상수비로 돌아갔다. 그때부터 난 다시 가벼운 배트를 들고 경기에 나섰고, 그해 여름 무렵부터 다시 마음껏 공을 잡아당겨서 우익수 쪽으로 안타를 쳤다”고 뿌듯해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