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비기스트 이닝’ 3출루 타자도…두산 무안타 5득점 진기록, KT는 한 게임 8득점 두 번
한화는 7회 초 1사 후 세 타자 연속 볼넷으로 만든 만루에서 정은원이 1루수 옆을 스쳐 우측 담장까지 굴러가는 주자 싹쓸이 적시 3루타를 날려 4-9로 따라붙었다. 다시 볼넷 2개를 얻어내 두 번째 만루를 만든 뒤에는 노시환이 데뷔 첫 그랜드슬램을 폭발해 순식간에 8-9까지 추격했다. 또 이어진 2사 1·2루에서 조한민의 동점 적시타까지 터지면서 기어이 승부의 균형을 맞추는 데 성공했다.
경기 흐름을 완전히 장악한 한화는 그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8회 1득점에 이어 9회 3점을 더 추가해 승리에 쐐기를 박았다. 경기 후반의 빅 이닝(Big Inning)이 만들어 낸 대반전 드라마였다.
'대량 득점 이닝'을 뜻하는 '빅 이닝'은 천국과 지옥의 의미가 공존하는 단어다. 타자들 입장에선 짜릿한 천국이지만, 투수들에게는 1초라도 빨리 끝내고 싶은 지옥이다. 기준은 천차만별이다. 야구 용어와 은어가 총망라된 폴 딕슨의 '베이스볼 딕셔너리'는 빅 이닝을 '1이닝 3득점 이상'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KBO리그 감독과 야구 관계자들은 "체감상 5점 정도는 뽑아야 빅 이닝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 같다"고 입을 모은다. "선수층이 얇아 투수들 간 기량 격차가 큰 한국은 메이저리그보다 한꺼번에 대량 실점하는 이닝이 훨씬 자주 나온다"는 이유에서다. 한 타격코치는 "타자들 입장에서 3점 정도는 언제든 따라잡을 수 있는 점수 차로 느껴지지만, 5점 차는 우리도 빅 이닝을 한 번 만들어야 추격할 수 있다는 느낌을 준다"고 설명했다.
#한 이닝에 16점을 뽑은 팀이 있다
KBO리그 역사에서 가장 많은 점수가 나온 '비기스트(Biggest) 이닝'은 2019년 4월 7일 부산 롯데 자이언츠-한화전의 3회 초였다. 한화가 6회 말 강우 콜드로 16-1 승리를 거뒀는데, 16점을 모두 한 이닝에 뽑았다. 20명의 타자가 안타 13개를 때려 16점을 올린 거다. 역대 두 번째 '타자 이순(二巡)'을 하면서 역대 한 이닝 최다 득점·안타·타석(20타석)·타수(17타수)·타점(16타점) 기록을 모두 갈아치웠다. 또 역대 최초로 특정 타자(지성준·장진혁)가 한 이닝에 세 차례 타석에 들어서는 진기록도 만들어냈다. 장진혁은 한 이닝 최다 타수(3타수), 지성준은 한 이닝 최다 출루(3출루) 기록도 동시에 보유하게 됐다. 말 그대로 '전설의 밤'이었다.
한화는 2회 말 롯데 허일에게 선제 솔로홈런을 허용해 0-1로 뒤진 채 3회 초를 맞이했다. 얄궂게도 16득점 역사의 출발점은 한화 타자 지성준과 롯데 선발투수 장시환의 맞대결이었다. 지금은 트레이드를 통해 서로 유니폼을 바꿔 입은 주인공들이다.
이닝 시작과 함께 선두 타자 지성준의 볼넷, 장진혁의 우전 안타, 오선진의 볼넷이 이어지면서 순식간에 무사 만루가 됐다. 타석에 선 정근우는 초구를 때려 2타점 역전 적시타를 쳤다. 이어진 무사 1·3루에선 정은원이 사직구장 한가운데 담장을 넘어가는 중월 3점 홈런(비거리 125m)으로 베이스를 깨끗하게 비웠다. 여기까지가 5-1이다.
아직 아웃카운트는 하나도 올라가지 않은 상태. 다음 타자 송광민마저 우전 안타를 치고 출루하자 롯데 벤치는 부랴부랴 투수를 장시환에서 윤길현으로 교체했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제라드 호잉이 또 볼넷을 골랐고, 김태균이 또 중전 적시타를 쳤다. 노시환이 삼진으로 돌아서면서 9타자 만에 첫 번째 아웃이 나왔지만, 타순 한 바퀴를 돌아 다시 타석에 선 지성준이 우중간 적시 2루타로 한 점을 더 뽑았다. 이어 장진혁이 2루수 내야안타로 3루 주자 김태균을 불러들였다. 스코어는 8-1까지 벌어졌다.
그러고도 계속된 1사 1·2루. 오선진이 유격수 쪽 땅볼을 쳤다. 무난하게 병살타로 이어졌다면, 한화의 득점은 원래의 절반인 8점으로 끝났을 터였다. 그런데 롯데 유격수 강로한이 2루로 공을 던지다 실책을 범했다. 1루 주자 장진혁이 2루에서 살아남고, 타자 주자 오선진마저 1루에 나갔다. 롯데 입장에선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한화 다음 타자 정근우가 우익수 플라이로 아웃됐지만, 아직 아웃카운트 하나가 남아 있었다. 한화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2사 만루에서 다시 정은원이 2타점 좌전 적시타를 날렸다. 롯데 강로한이 앞선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 몸을 날려 수비하는 투혼을 보였지만, 공은 아슬아슬하게 강로한의 글러브 옆을 스치고 외야로 빠져나갔다. 정은원에게는 한 이닝 5타점째. 곧바로 송광민도 적시 2루타로 화답해 한 점을 보탰다. 그리고 끝나지 않은 2사 2·3루에서 호잉이 오른쪽 담장을 넘기는 3점포를 쏘아 올렸다. 스코어는 14-1. 롯데가 전의를 상실하기에 충분한 점수 차였다.
한화는 녹다운된 롯데를 상대로 2점을 더 뽑았다. 김태균과 노시환이 연속 안타를 쳤고, 지성준의 2타점 중월 2루타로 두 명이 차례로 홈을 밟았다. 투수 소모를 최소화하고 싶었던 롯데는 투아웃 이후에도 이닝이 끝날 기미가 안 보이자 김건국으로 투수를 바꿨다. 장진혁이 김건국의 초구를 쳐 좌익수 플라이로 아웃되면서 한화의 화력쇼에 마침표가 찍혔다.
공교롭게도 한화의 공격이 이어지는 동안 부산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심판진이 노게임을 선언하기엔 부담이 따르는 경기였다. 5회 말까지 끝내 정식 경기 성립 요건을 채운 뒤 우천 중단이 선언됐다. 40분 뒤 비가 잦아들면서 경기가 재개됐지만, 7회 초를 앞두고 다시 빗줄기가 굵어져 결국 우천 콜드게임이 선언됐다. 6회까지 마운드를 지킨 한화 선발 장민재는 이보다 더 확실할 수 없는 득점 지원을 등에 업고 데뷔 첫 완투승을 올렸다.
#한국시리즈에서 한 이닝 12득점한 두산
두산 베어스의 화력은 예나 지금이나 강했다. 2001년 삼성 라이온즈와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시리즈 역사상 가장 큰 점수 차 역전승을 만들어냈다. 삼성이 2회 초 먼저 8점을 뽑으면서 완벽하게 기선을 제압하는 듯했지만, 두산은 3회 말 무려 12점을 쓸어 담아 일거에 분위기를 바꿨다.
두산은 1회 말 타이론 우즈의 2점 홈런이 터지면서 앞서 나갔다. 그러나 2회 초 삼성의 화력이 먼저 폭발했다. 이승엽의 2루타를 포함해 안타 7개, 몸에 맞는 공 2개가 연이어 나왔다. 당황한 두산 야수들은 실책까지 보태 삼성을 도왔다. 반면 두산은 2-8로 뒤진 2회말 무사 만루에서 단 1점만 뽑았다. 승기는 일찌감치 삼성 쪽으로 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진짜 '기회'는 3회 말에 찾아왔다. 우즈와 심재학이 연속 볼넷으로 걸어 나가면서 역사가 시작됐다. 김동주의 안타로 무사 만루가 됐고, 안경현이 밀어내기 볼넷을 얻어 1점을 만회했다. 4-8까지 쫓긴 삼성은 선발 투수 발비노 갈베스를 내리고 김진웅을 구원 투입했다. 그러나 두산 홍성흔이 기다렸다는 듯 2타점 적시타를 쳐 6-8을 만들었다. 이어 전상열의 적시타와 정수근의 역전 2타점 적시타가 이어졌다. 장원진이 적시타로 한 점을 더 보태면서 두산은 10-8까지 달아났다.
두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삼성의 실책과 볼넷을 묶어 다시 1사 만루를 만들었다. 여기서 김동주가 나섰다. 만루홈런을 쳤다. 팀 선배 김유동 이후 19년 만에 나온 한국시리즈 그랜드슬램이었다. 삼성의 추격 의지가 완전히 꺾였다. 그랜드슬램의 파괴력이 아직 가시지 않은 사이, 안경현은 연속타자 홈런으로 점수를 추가했다. 전광판에 찍힌 스코어는 15-8. 두산의 완승이었다.
한국시리즈는 최고의 팀들이 최고의 투수들을 릴레이로 투입하는 최고 무대다. 대량 득점을 하기가 정규시즌보다 훨씬 어렵다. 그런데 두산은 이날 한 이닝에만 타자 16명이 나서 12득점을 했다. 불과 하루 전인 3차전에서 자신들이 세운 포스트시즌 한 이닝 최다 득점(9점) 기록을 하루 만에 갈아 치웠다. 한국시리즈 최다 점수 차 역전승과 팀 최다 득점 기록도 새로 나왔다. '미러클 두산'이라는 별명을 또 한 번 입증했다. 당시 삼성 사령탑이던 백전노장 김응용 감독은 "원래는 5점만 줘도 지는 게 한국시리즈다. 한국시리즈를 많이 해봤지만 10점을 뽑고도 진 건 처음"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두산에 '무안타 빅이닝' 헌납한 LG의 볼넷쇼
두산은 역대 한 이닝 무안타 최다 득점 신기록도 갖고 있다. 2019년 6월 16일 잠실 LG 트윈스전에서 2회 말 한 이닝에만 사사구 8개를 얻어내 안타 없이 5점을 뽑았다. 사실상 LG 트윈스 투수들이 만들어 준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LG 마운드에는 최악의 하루였다. 2회 말이 시작되기 전까지 LG는 3-0으로 앞서 있었다. 그런데 LG 선발 임찬규의 제구가 급격하게 흔들리면서 사달이 났다. 임찬규는 첫 타자 박건우에게 볼넷을 허용하더니 오재일에게 스트레이트 볼넷을 내줬다. 다음 타자 박세혁이 초구에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해 무사 만루가 됐고, 임찬규가 김재호 타석에서 등 뒤로 날아가는 폭투를 던져 첫 실점이 나왔다. 설상가상으로 이어진 무사 2·3루에서는 김재호에게 다시 볼넷을 허용해 또 다시 만루를 만들었다. LG 벤치는 결국 선발투수 조기 교체를 단행했다.
하지만 무사 만루 위기 상황에서 급히 마운드에 오른 임지섭도 좀처럼 공을 컨트롤하지 못했다. 첫 타자 류지혁에게 볼넷을 내줘 밀어내기 점수를 허용했다. 다음 타자 정수빈을 1루 땅볼로 유도해 홈에서 주자를 잡아냈지만, 이어진 1사 만루에서 다시 호세 페르난데스에게 동점을 허용하는 밀어내기 볼넷을 던졌다.
악몽은 2사 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임지섭은 이어진 만루에서 김재환에게 밀어내기 몸에 맞는 공을 던졌고, 다음 타자 박건우에게 또 밀어내기 볼넷을 내줬다. 2회 말 들어 여섯 번째로 나온 볼넷이었다. 결국 세 번째 투수 김대현이 투입되고 오재일을 우익수 플라이로 잡아내면서야 두산의 공격이 끝났다. 스코어는 5-3으로 2점 차였지만, LG가 체감하는 점수 차는 그보다 훨씬 컸다. 결국 양 팀은 추가 득점 없이 그대로 경기를 끝냈다.
2회 말 타석에 들어선 두산 타자 수는 11명. 안타 없이 타자 일순한 역대 최초의 사례였다. 힘 한 번 들이지 않고 5점을 가져간 두산은 쌍방울의 4점(1996년 7월 26일 OB전)을 넘어 23년 만에 한 이닝 무안타 최다 득점 기록을 경신했다.
#KT의 첫 가을을 만든 두 번의 8득점
KT 위즈는 2015년 1군 진입 후 3년 연속 최하위에 머물렀다. 2018년에도 정규시즌 9위에 그쳤다. 그러나 이강철 감독이 부임한 2019년 6위까지 올라섰고, 지난해 10월 22일 잠실 두산전 승리와 함께 창단 첫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했다. KT는 그 감격을 자축이라도 하듯 가을야구 확정 경기에서 두 차례나 한 이닝 8득점을 기록하는 화력쇼를 펼쳤다.
폭발적인 드라마였다. KT는 1회 초 선취점을 뽑았지만, 3~4회 말 반격을 허용해 역전당했다. 그러나 1-3으로 뒤진 6회 초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선두 타자 유한준이 상대 우익수 실책으로 출루한 뒤 장성우의 안타가 이어져 무사 1·2루 기회가 생겼다. 두산이 부랴부랴 선발 유희관을 불펜 이승진으로 교체했지만, KT 대타 멜 로하스 주니어가 8구 승부 끝에 볼넷을 골라 무사 만루를 만들었다. 배정대 역시 7구까지 끈질기게 맞서 밀어내기 볼넷을 얻었다. 대타 문상철은 3루 주자를 불러들이는 동점 좌익수 희생플라이로 임무를 완수했다.
심우준이 3구 삼진으로 물러나면서 KT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나 투아웃은 진짜 득점 릴레이의 신호탄이었다. 1·2루에서 다시 조용호가 9구 승부로 볼넷을 골랐고, 이어진 만루에서 황재균이 2타점 좌전 적시타를 쳤다. 두산 투수가 다시 홍건희로 바뀌었지만, KT 타선의 기세는 식을 줄 몰랐다. 강백호의 볼넷으로 다시 만든 만루에서 유한준이 초구를 때려 외야 좌중간을 갈랐다. 주자 싹쓸이 적시 2루타였다. 장성우도 질세라 우전 적시타로 화답했다. 결국 로하스의 대타 강민국이 유격수 땅볼로 아웃된 뒤에야 기나긴 6회가 끝났다. 두산은 한 이닝에만 투수 넷을 기용했다.
순식간에 9-3 리드를 잡은 KT는 멈추지 않았다. 두산 강속구 투수 김강률을 상대로 8회 초 다시 한 번 릴레이 안타쇼를 펼쳤다. 6회 초와 분위기도 비슷했다. 이번에도 두산이 실책으로 선두 타자 조용호를 출루시켜 대량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고, 투아웃 이후 점수를 쓸어 담았다. 2사 1루에서 유한준과 장성우의 연속 안타가 나왔고, 장성우의 안타 때 두산 좌익수 포구 실책까지 겹쳐 주자가 한 명 더 홈을 밟았다. 계속된 2사 3루에선 강민국의 안타와 배정대의 내야안타로 1점을 추가했다. 송민섭의 2타점 적시 3루타와 심우준의 적시타도 차례로 이어졌다.
끝이 아니었다. 홍현빈이 8구 승부 끝에 볼넷을 고르자 황재균과 강백호가 연속 적시타로 화답했다. 결국 2사 만루에서 대타 허도환이 3구 삼진으로 돌아서면서 '두 번째 8득점 이닝'에 마침표를 찍었다.
KT 타선은 이날 장단 18안타를 때려냈다. 유한준이 4타점, 황재균이 3타점, 장성우·배정대·송민섭이 2타점을 고르게 올렸다. 17-5 승리. 그렇게 창단 이후 가장 뜨겁고 기념비적인 하루를 만끽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