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통 없는 제품 개발하고도 투자유치 어려움 겪어…이주영 대표 “아르바이트 병행하며 제품 완성할 것”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기억하기 싫은 훈련이 있다. 바로 화생방이다. 화생방 훈련의 악명은 각종 군 관련 예능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남녀노소 모두에게 알려졌다. 화생방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힘들다’는 단어가 저절로 연상될 정도다. 화생방 훈련의 핵심은 방독면 착용 방식을 숙달하는 데 있다. 방독면을 쓰고 벗는 것과 더불어 꼭 해야 하는 훈련이 있다. 독성 물질을 걸러주는 ‘필터’ 역할을 하는 정화통이란 부품을 뗐다 붙였다 하는 절차다.
이 정화통은 현대 방독면 기술의 핵심이다. 정화통 기능과 크기, 무게에 따라 방독면 품질이 달라진다. 방독면과 정화통은 실과 바늘처럼 한 세트로 묶이는 것으로 취급돼 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런 고정관념이 깨지고 있다. 수년 내에 전우끼리 정화통을 바꿔 끼우며 군가를 부르는 화생방 훈련은 과거의 산물로 남을 가능성이 적지 않아 보인다.
조선일보는 7월 11일 러시아산 재호흡기 방독면(IP-5)이 침수전차 탈출 훈련에 쓰인 사례를 보도했다. 그러면서 “현재 한국군엔 실제 침수된 전차나 장갑차에서 탈출하는 훈련도, 재호흡기 방독면 같은 특수장비도 없는 상태”라고 지적했다. 조선일보는“한국군은 도하작전 개념이 러시아군과 달라 그런 장비가 없다”는 예비역 장성 발언을 인용하기도 했다.
이 보도처럼 한국군엔 러시아 같은 특수방독면이 보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기술이 없는 건 아니다. 기술은 있지만 쓰지 못하는 형국이다. 청년기업 아미코엠은 2020년 재호흡기 방독면 특허를 냈다. 재호흡기 방독면의 가장 큰 특징은 앞서 언급한 ‘방독면의 짝꿍’ 정화통이 없다는 점이다. 정화통 없이도 독성 물질을 차단하면서 정상적인 호흡을 할 수 있다는 게 이 청년기업이 연구개발한 ‘방독면 혁신’의 핵심이다.
아미코엠의 이주영 대표이사(34)는 신기술 개발에 상당한 열정을 보였다. 안보단체 산하 연구소와 협력해 방독면 연구개발에 착수한 이 대표는 자신이 개발한 방독면을 직접 착용하고 ‘생체실험’에 가까운 연구를 이어갔다. 변변한 연구 시설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맨 땅에 헤딩’ 방식으로 연구를 거듭한 셈이다.
이주영 대표는 “외부와 완벽히 밀폐된 조건을 만족하는 방독면을 만들어야 하다보니 무호흡 실험을 수도 없이 거듭했다”면서 “숨을 참느라 가슴이 먹먹한 고통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현역 군인들을 안전하게 만들 신기술을 개발하겠다는 일념으로 어려움을 극복했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재호흡기 방독면 관련 특허 취득에 성공했다. 이 대표는 “사실 특허만 내면 꽃길이 열릴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특허를 취득한 뒤에 놓인 장애물이 더 많았다. 추가적인 연구개발과 시제품 생산에 드는 비용을 조달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청년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금을 신청해봤지만 이마저 녹록지 않았다. 이 대표는 “정부 지원금을 신청하면 매출과 실적, 제대로 된 연구 시설이 갖춰져 있는지에 대한 역질문이 돌아왔다”면서 “매출과 실적, 연구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다고 솔직하게 답하자 지원금을 받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그런 게 다 갖춰져 있는 청년기업은 이미 잘나가는 곳”이라면서 “청년기업 속에서도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하는 것을 몸소 느꼈다”고 주장했다.
이 대표는 “정부에서 청년기업을 지원해주는 형태도 거의 대출에 가까워서 창업자 본인의 신용대출과 한도가 비슷한 정도”라며 “재무제표를 바탕으로 한 실적이 기반이 돼야 대출 한도도 높아지는데 이 경우에 청년기업이 정말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는 어렵다. 사실상 실효성이 없는 지원대책인 셈”이라고 덧붙였다.
민간 기업으로부터 자금을 유치하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이 대표는 “연구개발(M&A)은 맨 땅에 헤딩으로 가능한 영역이었지만 투자 자금을 유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면서 “특히 우리 기업은 기술 보안이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혹시나 기술만 쏙 빼가고 실질적인 투자를 하지 않는 경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일요신문은 2020년 아미코엠이 특수방독면 관련 특허를 취득할 때부터 취재를 요청했다. 그러나 긍정적 응답이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이 역시 기술 보안과 관련된 이슈 때문이었다. 이 대표는 “사실 언론 보도가 나면 기술에 대한 핵심적인 사항들이 외부로 유출될 우려가 있어 언론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대표는 “현재 특수방독면과 관련해 다른 특허들도 모두 취득 준비를 마친 상황이지만 아직 특허 신청을 하지 않았다”면서 “자금 유치 및 시제품 생산 등 절차에 대한 계획이 미완인 상황에서 특허만 내놓으면 거대 자본을 가지고 있는 국내외 기업들에게 기술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돌아봤다.
그는 “특허라는 게 작은 부분만 변화를 줘도 새로운 것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분야인 까닭에 투자를 유치하지 못한 상황에서 섣불리 내기 힘든 부분이 있다”라면서 “사실 얼마 전 언론에 소개된 러시아산 특수방독면 역시 러시아 측에서 과거 한국 다른 기업의 재호흡 방독면 특허를 인용한 사례라는 정황이 있다”고 주장했다.
아미코엠이 특허를 받은 방독면 ‘라이프마스크’는 정화통 없이 30분 이상을 호흡할 수 있는 재호흡 마스크다. 아미코엠 관계자는 “이 기술을 바탕으로 방독면 시제품을 생산하면 군용뿐 아니라 소방용, 민간용으로도 활용이 가능하다”면서 “현재 특허 취득을 대기 중인 기술을 접목하면 특수전과 잠수, 전염병 방역 분야에 이 방독면을 상용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현재 우리 군이 활용하는 K-1, KM9A1, K-5 방독면은 산소 비율이 18% 이하인 밀폐 공간에서는 활용이 불가능하다. 암모니아, 일산화탄소 등이 발생하는 화재발생 상황에선 무용지물이 된다. 그러나 라이프마스크의 경우엔 외부환경과 관계 없이 모든 유해 물질을 차단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아미코엠 관계자는 “이 방독면을 개발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은 외부 물질을 걸러내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제품을 착용했을 때 독립된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처럼 편안한 느낌을 받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우주선이나 잠수함에서 사용하는 호흡장치를 휴대 가능하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편하다”고 했다.
‘편안한 방독면’이라는 키워드의 연장선상에 휴대성 극대화라는 화두가 있었다. 라이프마스크는 방독면 무게를 800g까지 줄여 휴대성을 높였다. 현재 시중에 유통되는 국내외 기업 민·관·군용 방독면 무게가 1.2~5kg 사이인 것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는 셈이다.
혁신적인 기술력을 개발한 회사라기엔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하다. 외부 투자 유치를 추진할 만한 여력도 없는 상황이다. 기술만 개발한 뒤 발걸음이 멈춰선 셈이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경제가 위축된 것도 큰 장애물이 됐다. 아미코엠의 이 대표는 아르바이트를 병행해가며 ‘방독면 혁신’을 마무리 지으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 대표는 “현재 개발된 모델은 ‘프로토타입’으로 양산형 제품이 아니다”라면서 “투자가 유치되면 양산이 될 수 있도록 디자인을 세련되게 다듬고 휴대성을 더욱 보완할 예정”이라는 청사진을 밝혔다. “자금을 유치하지 못하면 지금까지 한 연구개발 활동이 모두 물거품이 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런 외부적인 환경은 모두 잊고 더 나은 방독면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만 집중하려 한다”는 게 이 대표 말이다.
그러면서 이 대표는 “새로 개발한 기술에 대한 자부심 하나로 회사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지, 당장 회사가 문을 닫아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아미코엠의 방독면 기술은 글로벌시장을 선도할 만한 혁신적인 기술이라고 자부한다”면서 “수십조 원 규모인 세계 시장을 우리 기술이 주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아미코엠과 특수방독면 개발을 협력한 안보단체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독성을 극대화한 화학무기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나라”라면서 “혹시 모를 화학전에 민·관·군이 합동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독면이 필요한 실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미코엠이 개발한 방독면 기술의 향후 활용 가치는 상당할 것으로 본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이 방독면을 소방용 등 다른 용도에 활용할 수 있어 시장성은 풍부할 것이라고 예상한다”면서 “사실 현재 이런 기술이 잘 알려지지 않고 투자 유치가 안 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한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역설적으로 현재 구형 방독면 시장에 대한 투자는 활발하게 진행되는 상황이다. 2017년 말엔 한글과컴퓨터(한컴)가 군용 방독면 제조업체인 산청을 인수했다. 한컴은 산청을 인수한 뒤 역대 최고 실적을 연이어 경신한 바 있다. 산청은 한컴라이브케어로 회사 이름을 바꾼 뒤 2021년 하반기 코스피 상장을 준비하고 있다.
한 방산업체 관계자는 일요신문이 입수한 아미코엠의 사업계획서를 본 뒤 “대기업이 주도하는 기존 방독면 산업이 부흥하는 가운데 이름 모를 청년기업이 개발한 혁신기술은 알을 깨지도 못한 채 사장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부분이 상당히 대조적이면서 아쉬움을 자아내는 대목”이라고 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