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범종목으로 근근이, 바르셀로나서 첫 정식종목…런던·리우 메이저리거 불참으로 제외
#쉽지 않았던 진입
근대 올림픽은 1894년 그리스 수도 아테네에서 처음 열렸다. 초대 올림픽 육상 110m 허들에서 금메달을 딴 토마스 커티스는 1932년 ‘스포츠맨’이라는 잡지와 인터뷰에서 야구와 관련된 일화 하나를 공개했다. 그리스 왕세자 콘스탄티노스 1세와 동생 게오르기오스 왕자가 커티스와 만난 자리에서 "야구란 어떤 경기냐?"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커티스로부터 설명을 들은 두 왕족은 실제로 야구를 체험해보겠다고 나섰다. 왕세자가 포수, 왕자가 투수, 커티스가 타자를 각각 맡았다. 야구공 대신 테이블 위에 있던 오렌지를 사용했다. 이때 왕자가 던진 오렌지를 커티스가 지팡이로 받아쳤는데, 오렌지가 허공에서 터지면서 과즙과 과육이 사방으로 튀었다. 커티스는 껄껄 웃는 왕세자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그리스에서 야구를 볼 일은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야구는 한동안 올림픽에서 배제된 스포츠였다. 올림픽보다 23년 빠른 1871년 미국에서 최초의 프로야구 리그가 출범했지만, 야구가 처음 올림픽 무대에 등장한 건 1904년 세인트루이스 대회로 알려져 있다. 그해 올림픽 조직위원장이 메이저리그 명투수 출신인 스포츠사업가 앨 스폴딩이었던 덕이다. 그해 조직위 연감에도 '6월 올림픽 기간에 야구 토너먼트 대회가 열렸다'고 적혀 있다.
다만 그때의 야구 대회를 실제 '올림픽 경기'로 분류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자체가 당시 시카고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의 부속 행사로 개최됐기 때문이다. 이 대회의 경기 상당수는 미국 선수들만 출전한 이벤트 성격이 짙었다. 저명한 올림픽 역사가 빌 말론은 1904년 올림픽 리뷰에 야구를 포함하지 않았다.
야구는 1912년 스톡홀름 대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올림픽 무대에 데뷔했다. 정식 종목 도입 전 테스트 과정과도 같은 '시범 종목' 제도가 처음 생겼는데, 야구가 아이슬란드 전통 레슬링인 글리마와 함께 가장 먼저 채택됐다. '미국의 국기' 야구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가길 원했던 사업가 스폴딩이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때마침 그해 올림픽이 열린 스웨덴에는 1910년 탄생한 야구팀이 하나 존재했다.
결국 미국과 스웨덴 두 팀만으로 올림픽 야구 경기가 열렸다. 당연히 선수가 턱없이 모자랐다. 미국 야구 대표팀은 참가를 자원한 육상 선수들이 포함됐는데도 스웨덴 팀보다 기량이 월등히 좋았다. 스웨덴 팀은 미국 팀에서 선수를 임대해 대회를 치러야 했다. 경기는 미국의 13-3 승리로 끝났다. 역사적인 첫 올림픽 야구 경기 심판은 당시 65세였던 신시내티 레즈 유격수 출신 조지 라이트가 맡았다. 라이트는 훗날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스폴딩은 미국이 이 올림픽에서 종합 1위(금메달 25개)에 오른 뒤 다시 한 번 "야구를 정식 종목으로 올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른 국가도 야구를 해야 미국을 따라올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후 1936년 베를린 대회가 시작되기 전까지 올림픽에서 야구는 다시 볼 수 없었다. 미국에서 개최된 1932년 LA 올림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히틀러 탓에 찍힌 쉼표
야구는 베를린올림픽에서 다시 시범 종목으로 채택됐다. 메이저리그 선수 출신인 레슬리 만이 대회 조직위원들을 열정적으로 설득했다. 트라이아웃을 열고 야구 국가대표 21명을 뽑았다. 당시 투수로 출전했던 빌 세일리스는 나중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 팀과 대결하기로 했던 일본이 야구 종목 출전을 포기하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할 수 없이 미국 팀을 '월드 챔피언 대표'와 '미국 올림픽 대표'로 나눠 7이닝 경기를 치렀다.
재미 있는 점은 이 경기가 당시 야구 역사상 최다 관중을 동원했다는 거다. 관중 9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베를린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경기를 치른 덕분이다. 물론 야구가 어떤 스포츠인지 잘 알고 보러 온 관중은 많지 않았다. 당시 승리 투수였던 카스 톰슨은 훗날 "외야 플라이가 나오면 관중의 환호가 터지고, 적시 2루타가 나오면 조용했다"고 회고했다.
톰슨은 또 "경기가 끝나고 며칠 뒤 올림픽 공식 기록 영화의 내레이션을 맡은 여성에게 오후 내내 야구 경기 규칙을 설명해줘야 했다"고 기억했는데, 그 여인은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의 연인인 에바 브라운이었다고 한다.
바로 그 히틀러가 3년 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야구의 올림픽 역사에 다시 쉼표가 찍혔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공식 리포트에는 "1940년 도쿄올림픽 시범 종목에도 야구가 포함될 예정이었다. 미국과 일본 외에 중국, 필리핀, 하와이, 영국, 독일, 멕시코, 쿠바 등 9개국이 참가할 예정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사상 최대 규모의 야구 경기를 치르기 위해 1938년 국제야구연맹도 창설됐다. 그러나 전쟁으로 대회 자체가 무산됐다.
이후 야구는 1964년 도쿄올림픽까지 세 차례 더 시범 종목으로 선택됐다. 그러나 세 팀 이상이 승부를 겨룬 적은 없었다. 사실상 야구가 도입된 국가의 친선 경기 형태나 다름없었다. 1952년 헬싱키 대회에서는 '페사팔로(핀란드식으로 개량한 야구 경기)'라는 이름으로 경기가 진행됐다. 핀란드 내의 두 팀이 '피니시 베이스볼 리그'와 '워커즈 어슬레틱 페더레이션'으로 나뉘어 승부를 가렸다. 전자가 승리했다.
1956년 멜버른 대회와 1964년 도쿄 대회에는 미국 외에 개최국 호주, 일본만 각각 참가했다. 멜버른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호주-미국전 역시 관중 11만 4000명이 몰려 야구 역사상 최다 관중 기록을 경신했는데, 이날의 관중 대다수가 경기 후반에 입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의 진짜 목적은 야구 경기가 끝난 뒤 같은 장소에서 예정된 육상 경기를 보는 것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정식종목으로
야구가 올림픽에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건 1984년 LA 올림픽부터다. 도쿄 대회를 끝으로 사라졌던 야구가 20년 만에 다시 시범 종목으로 부활해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 살아남았다. 당시 경기 방식은 두 개의 디비전으로 나눠 예선전을 치른 뒤 조별 상위 두 팀이 메달 색을 가리는 방식이었다. 1984년에는 일본이 미국을 꺾고 금메달을 따내는 이변을 연출했고, 대만이 동메달을 가져갔다. 1988년에는 미국이 금메달, 일본이 은메달, 푸에르토리코가 동메달을 각각 땄다.
그리고 야구는 마침내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에서 올림픽 정식 종목에 등극했다. 이 대회부터 모든 야구 경기가 올림픽 '공식 기록'으로 남기 시작한 것이다. 경기 시간이 평균 3시간 안팎인 야구의 특성상, 올림픽에는 8개국만 참가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모든 국가가 개막 전 통과해야 하는 '예선' 단계도 생겼다. 지역 예선을 통해 올림픽에 참가할 5개국을 먼저 가린 뒤, 여기서 탈락한 국가들끼리 남은 3장의 티켓을 놓고 최종 예선을 치르는 방식이다.
올림픽 본선에서는 라운드 로빈 형식으로 8개국이 나머지 7개 팀과 모두 한 번씩 맞붙었다. 그 가운데 4강을 가려내 1위와 4위, 2위와 3위 팀이 각각 준결승전에서 격돌했다. 그 중 승자끼리 결승전, 패자끼리 동메달 결정전을 치렀다. 메달을 따려면 총 9경기를 소화해야 했다. 아마추어 선수들만 올림픽에 출전하던 시기에는 모든 나라가 알루미늄 배트를 들고 경기에 나섰다. 그러나 프로 선수들의 올림픽 참가가 허용된 2000년 시드니 대회부터는 알루미늄 배트 사용이 금지됐다.
올림픽 야구 도입 초기는 아마 야구 최강국 쿠바의 전성시대였다. 1992년 첫 대회와 1996년 애틀랜타 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다. 2000년 시드니 대회에서 미국에 져 은메달로 밀렸지만,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다시 금메달을 획득했다. 메이저리거들을 올림픽에 내보내지 않는 미국은 시드니 금메달 외에 애틀랜타 대회와 2008년 베이징 대회 동메달을 딴 게 전부다.
#한국의 금메달이 마지막이었지만…
한국은 1992년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 대회에선 대만이 은메달, 일본이 동메달을 수상해 아시아 야구의 위용을 떨쳤다. 그러나 한국도 1996년 애틀랜타 대회에 처음으로 선수단을 파견하면서 올림픽 역사에 첫 발을 내디뎠다. 2000년 시드니 대회에선 내로라하는 프로 선수들을 총망라한 '드림팀'이 출범해 사상 첫 메달(동메달)을 땄고, 2008년 베이징 대회에선 준결승에서 일본, 결승에서 쿠바를 차례로 꺾고 9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따냈다.
그러나 야구는 한국의 금메달을 마지막으로 잠시 올림픽에서 사라졌다. 2005년 7월 열린 IOC 총회에서 "야구와 소프트볼을 2012년 런던올림픽 정식 종목에서 제외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어렵게 올림픽 종목 한 자리를 꿰찬 지 30년 만에 다시 장외로 밀려난 것이다. 특정 종목이 올림픽에 편입됐다가 다시 빠진 것은 1932년의 폴로 이후 70년 만에 처음 벌어진 '사건'이었다.
IOC가 밝힌 가장 큰 사유는 '메이저리거들의 불참'이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올림픽 기간 동안 리그를 중단하지 않고, 빅리거들의 올림픽 참가도 허용하지 않는 데에 유감을 표한다"는 것이다. '각 종목 최고 선수들이 출전해 세계 최강자를 가린다'는 올림픽의 취지와는 맞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또 "야구가 극히 일부 국가에서만 인기가 있고, 경기시간이 지나치게 길며, 그 시간의 편차도 너무 크다"는 점도 원인으로 꼽혔다. 결국 '야구 불모지' 영국 런던과 브라질 리우에서 열린 두 차례 올림픽에서는 야구 경기를 볼 수 없었다.
다행히 이번 올림픽 개최지인 일본은 야구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나라다. 메이저리그 다음으로 큰 규모의 프로야구 리그를 운영하고 있고, 그 어떤 스포츠보다 야구의 인기가 높다. 2020년 올림픽 개최지가 도쿄로 정해지자마자 야구의 정식 종목 재진입이 추진되기 시작한 이유다. 결국 IOC는 개최국 조직위원회의 뜻을 받아들여 야구를 포함한 5개 종목을 도쿄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승인했다.
'디펜딩 챔피언' 한국도 올림픽 야구 예선을 겸해 열린 2019 국제야구소프트볼연맹(WBSC) 프리미어12에서 준우승해 다시 한 번 본선 진출을 확정했다. 한국은 결승전에서 일본에 패해 대회를 2위로 마쳤지만, '개최국은 본선에 자동 진출한다'는 규정에 따라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1위로 도쿄행 티켓을 손에 넣었다. 파란만장했던 올림픽 야구의 시계는 그렇게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