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비스 총수 부자 지분 연말까지 10% 정리해야…사업다각화 통해 비계열사 일감 확보 주력
#대기업집단의 SI·물류 내부거래 옥죄는 공정위
‘공시대상기업집단 소속회사의 중요사항 공시 등에 관한 규정’ 개정안이 내년 5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대기업집단(자산총액 5조 원 이상)은 물류·SI 계열사와의 내부거래 현황을 1년에 한 번 공시하도록 하는 것이 개정안 핵심이다. 시장을 통한 자율적 감시를 위해 공시의무를 강화한 셈이다.
물류·SI 업종은 내부거래 비중이 높고, 총수일가의 지분이 높은 계열사에 일감을 몰아주기 쉽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하지만 현재 공시항목만으로는 내부거래를 통한 계열사들의 매입현황 확인이 불가능해 현황 파악과 감시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공정위 판단이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대기업집단 소속 물류·SI 기업은 계열사에 대한 매출 현황을, 물류·SI를 영위하지 않는 회사들은 계열회사로부터 물류·SI 매입현황을 각각 공시해야 한다.
공정위는 물류·SI 일감 개방 정책도 함께 추진하고 있다. 강제성 있는 조사를 통한 제재보다는 대기업집단이 자율적으로 물류 일감 몰아주기 행태를 근절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대기업집단 소속 물류기업의 내부거래 비중이 높고, 수의계약을 통해 내부 일감을 확보하는 관행이 두드러진다. 이 같은 관행은 비계열 독립·전문 물류기업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 2018년 기준 대기업집단 소속 물류기업의 내부거래 비중은 43.5%에 달했다. 통상적 내부거래 비중(12%)의 3배 이상인 셈이다.
이에 지난 7월 8일 국토교통부와 공정위는 국내 화주·물류 기업을 대표하는 5개 대기업집단(삼성·현대자동차·LG·롯데·CJ)과 함께 ‘물류시장 거래환경 개선을 위한 상생 협약식’을 열었다고 밝혔다. 국토부는 ‘물류서비스 표준계약서’를, 공정위는 ‘물류 일감개방 자율준수기준’을 제시했다. 각 기업은 공정위와 국토부가 마련한 안을 지키도록 노력하겠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공정위와 국토부는 인센티브를 마련해 일감 나누기를 유도할 계획이다.
물류서비스 표준계약서는 화주·물류기업 간 거래 시 기본원칙, 계약 당사자 간 권리·책임 사항 등을 규정했다. 물류 일감 개방 자율준수기준은 경쟁입찰과 제3자 물류 확대 등을 원칙으로 한다. 수의계약보다는 경쟁입찰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라고 명시됐다. 앞서 2월 공정위는 대기업의 자발적 일감 개방을 유도코자 ‘물류 일감개방 자율준수기준’을 마련했다. △절차적 정당성 보장 △제3자 물류 확대 △거래효율성과 전문성 제고 △공정거래를 통한 상생 △거래 과정의 객관성·투명성 확보 등 기본원칙 5가지를 제시했다.
#‘현대글로비스’와 ‘정의선 회장’
이런 가운데 현대차그룹이 제일 곤란스러운 입장에 놓였다는 평가다. 지난해 현대차그룹의 물류 전담 기업인 현대글로비스는 매출(16조 5198억 원) 중 71%(11조 8694억 원)를 계열사 간 내부거래를 통해 올렸다. 전체 내부거래 중 국내 매출만 따지자면 약 22%다. 공정위 칼날을 피하기 위해 일감을 개방하면 실적은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는 셈이다. 현대글로비스는 현행 공정거래법상 일감 몰아주기 등에 의한 사익편취 규제 대상 기업은 아니다. 하지만 일감 몰아주기만으로도 부당지원 혐의로 제재를 받을 수 있다.
실제 지난 6월 공정위는 삼성전자, 삼성디스플레이, 삼성전기, 삼성SDI 등 4개사가 급식 물량을 삼성웰스토리에 몰아줬다는 부당지원 혐의로 과징금 총 2349억 원을 부과했다. 삼성물산의 100% 자회사인 삼성웰스토리는 2019년 기준 매출액의 38.3%를 계열사 일감으로 올렸다. 이재용 부회장 등 삼성그룹 총수 일가가 개인 지분을 갖고 있지 않아 총수일가 사익편취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현대글로비스도 부당지원 혐의로 제재를 받은 경험이 있다. 지난 2007년 공정위는 계열사를 동원해 현대글로비스에 일감을 몰아준 혐의로 현대차그룹에 시정명령 및 수백억 원대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당시 현대차는 공정위 제재에 대한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지난 2019년에도 공정위는 현대차그룹이 자동차 제품 운반물량 등을 현대글로비스에 부당하게 몰아주고 있는지 관련해 조사에 착수한 바 있다.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현대글로비스가 갖는 위치는 남다르다. 정몽구 명예회장(6.71%)과 정의선 회장(23.29%)은 현대글로비스 지분 29.99%를 보유하고 있다. 반면 현대모비스(0.3%), 현대차(2.6%), 기아차(1.8%) 등의 정의선 회장 지분율이 낮다. 결국 현대글로비스 지분을 활용해서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고 그룹 지배구조 정점에 올라서야 한다. 현대차그룹은 10대 그룹 중 유일하게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지 못했다. 현재 현대모비스와 현대차, 기아 등 각 계열사들이 4개의 순환출자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오는 12월 30일부터 시행된다. 일감 몰아주기 대상 총수일가 지분 기준이 ‘상장사 30%·비상장사 20%’에서 일괄 20%로 변경된다. 정의선 회장은 현대글로비스 지분 10%를 매각, 지분 맞교환 등을 통해 정리해야 한다. 신규로 지주회사로 전환할 때 보유해야 할 의무 지분 비율도 높아진다. 현행 ‘상장회사 20%·비상장회사 40% 이상’에서 ‘상장회사 30%·비상장회사 50% 이상’으로 늘어난다. 현대차그룹이 지주사로 전환한다면 지분 확보를 위한 추가 자금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올해 SK텔레콤이 중간지주사 전환에 급하게 나선 이유다.
현재까지는 지분 정리보단 사업 다각화를 통해 비계열사 일감을 확보해서 기업가치를 끌어올릴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 올 초 현대글로비스는 육로·해상 운송에 더해 항공 물류 사업으로 영역을 넓힌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지난해는 자동차 운반선(PCTC) 사업에서 ‘비계열’ 매출 비중이 55%로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이 밖에도 시장 규모가 30조 원에 달하는 중고차 시장 진출을 위해 최소 2019년부터 준비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실적은 양호하다. 송선재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비계열사 물량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 최근 합리화 작업을 진행했던 벌크해상운송과 비철트레이딩 부문도 개선되고 있다”면서 “그룹 내 지배구조 이슈를 떠나 본업만으로도 충분히 성장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여기에 인수합병(M&A) 등 8000억 원 규모의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선박 매입비(3000억 원), 국내외 시설투자(3000억 원), 인수합병(M&A, 2000억 원) 등이다. 이미 미국 로봇 전문 업체 보스턴다이내믹스 M&A에 참여해 지분 10%(1000억 원)를 확보했다. 이 같은 전략이 성공하면 공정위 감시망도 피하고 지배구조 개편도 한층 수월해진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정의선 회장이 공정거래법 개정안 시행 전에 현대글로비스 지분 매각, 지주사격인 현대모비스와 지분 맞교환 등에 나서지 않을까 싶다”며 “현대글로비스 기업가치를 높여서 지배구조 개편에 나서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일 것”이라고 말했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