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은 연봉에도 ‘올림픽과 김연경’ 꿈 위해 한국행…“선수 편견 없이 대하고 잠재력 끌어내”
“선수들마다 감독님이 엄하고 무서운 분이라 훈련이 무척 힘들다고 말하더라. 대표팀 합류하면서 운동량이 많아 애를 먹을 줄 알았는데 막상 내가 만난 감독님은 화를 내기보다 강도 높은 훈련 스케줄을 부드럽게 진행해 나갔다. 선수들이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다. 반면 훈련 외의 시간에는 선수들과 장난도 치고 친근하게 다가오셨다. 지금까지 경험했던 대표팀 감독님들과는 전혀 다른 색깔을 갖고 있는 분이셨다.”
KGC인삼공사의 한송이는 이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라바리니 감독의 특별한 지도법을 설명하면서 인상적이었던 몇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라바리니 감독님과 함께하지 못했을 때는 대표팀에 다녀온 선수들이 리그에서 더 좋은 경기력을 선보이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러다 대표팀 합류 후 그 해답을 알 수 있었다. 라바리니 감독님은 선수들이 갖고 있는 재능을 이끌어내시는 힘이 있었다. 체력적인 부담은 있어도 훈련 프로그램의 의도와 도출해내려는 결과들을 설명하고 이해시켜주시기 때문에 선수들이 감독님과 코칭스태프를 믿고 코트에서 열정을 발휘했다. 항상 태블릿을 갖고 다니면서 수시로 상대팀의 경기 영상을 분석하고 대표팀의 지난 경기들을 다시 확인하면서 코치들과 토론하는 장면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한송이는 대표팀에 있는 동안 “웜업존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뻤다”고 말한다.
“선수들을 편견 없이 대해주셨다. 2000년생인 이주아와 1984년생인 한송이를 동등한 시각으로 봐주신 것이다. ‘나이 때문에’,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 줘야 하니까’, ‘팀을 리빌딩하려고’ 등등의 이유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실력으로만 평가하셨는데 그런 부분이 나로선 정말 감사했다.”
라바리니 감독은 2019년 1월 여자 배구대표팀 사령탑으로 부임했다. 1979년생의 젊은 나이, 선수 경력이 없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라바리니 감독은 빠르게 팀을 정비해 나갔고, 선수들의 장단점을 파악하면서 전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여자대표팀이 올림픽을 앞두고 이재영, 이다영의 학폭 문제가 불거지면서 좋지 않은 영향을 받았음에도 라바리니 감독은 흔들리지 않았다. 선수 한 명, 한 명에게 할 일을 부여했고,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선수들의 마인드를 일깨웠다. 김연경한테만 의존하지 않고 상대를 정밀 분석한 끝에 다양한 공격 루트로 세계 여자배구의 벽을 깨기 위해 노력했다.
한유미 KBSN스포츠 해설위원은 라바리니 감독의 리더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표팀 선수들에게 라바리니 감독에 대해 물으면 자주 들었던 대답이 ‘뭔가 다르다’는 내용이었다. 단순히 배구에 대한 열정이 높은 걸 넘어 선수들이 해야 할 역할을 정확히 배분하고 이해시킨다. 그런 다음 자신의 리드대로 따라와 달라고 주문한다. 감독이 코칭스태프와 밤새 분석해서 내놓은 해법을 토대로 선수들에게 설명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이전 다른 감독들한테선 엿볼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선수들이 라바리니 감독의 말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훈련할 때도 주전과 비주전의 구분이 명확했다. 주전 선수들이 훈련하면 나머지는 도와주는 선수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대표팀은 모든 선수들이 다 연습에 참여한다. 주전, 비주전의 구분이 없다. 훈련 프로그램에 따라 쉬는 선수가 나올 것 같으면 미리 다른 훈련을 준비해서 그 선수에게 주문한다. 두세 시간의 연습 시간 동안 쉬는 선수가 한 명도 없다. 워낙 훈련 스케줄을 세부적으로 준비해서 갖고 오기 때문에 선수들은 무조건 집중해야 한다. 집중하지 못하면 그 훈련을 따라갈 수 없다.”
한유미 해설위원은 라바리니 감독의 가장 큰 장점은 선수들의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힘이라고 말한다.
“선수들에게 ‘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들었다. 선수들이 실의에 빠져 있으면 바로 다가가 너는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분명히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면서 잠재력을 이끄는 지도자다. 단순히 할 수 있다는 말만 반복하는 게 아니라 맞춤형 훈련 프로그램으로 선수들에게 새로운 동기부여를 제공한다. 주로 주전들이 뛰는 A 코트와 후보 선수들이 뛰는 B 코트로 나누는 것 없이 누구라도 A 코트에서 뛸 수 있게끔 선수들을 준비시켜 놓는다. 그래서 웜업존에 있는 선수라도 코트에 들어갈 때 감독의 모든 작전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한유미 해설위원은 다른 대표팀 지도자와 달리 적은 연봉에도 라바리니 감독이 한국 대표팀을 맡은 이유는 김연경이라는 대체 불가의 선수와 올림픽 무대의 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라바리니 감독이 16세인 1995년부터 지도자 생활을 했고 이탈리아와 브라질 클럽팀을 이끌며 인정받는 감독이었지만 익숙한 나라를 떠나 한국에 올 수 있었던 건 김연경과 올림픽이라는 꿈 때문이었다.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낯선 나라에서 선수들과 동고동락해온 것이다. 그 부분을 진심으로 높이 평가하고 싶다.”
2019년 1월 25일 대한배구협회가 여자대표팀에 외국인 감독인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을 내정했다고 발표하자 팬들은 “배구협회가 이번에야말로 일다운 일을 했다”며 칭찬을 보냈다. 협회가 라바리니 감독과 계약을 성사시키기까지 나름의 우여곡절이 많았다. 무엇보다 일부 협회 관계자들이 외국인 감독 선임에 반대하고 나서는 바람에 난항에 부딪혔는데 그중 당시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던 이선구 전 GS칼텍스 감독이 라바리니 감독 선임에 가장 앞장섰다는 후문이다.
이선구 전 감독은 6일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다른 감독들은 대우나 조건을 먼저 물어보는데 라바리니 감독은 조건을 내세우지 않고 대표팀을 맡고 싶어 하는 의지가 매우 강했다”라고 설명했다.
“라바리니 감독은 여자대표팀을 올림픽 무대에 올리고 좋은 성적을 통해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겠다는 목표가 분명했다. 그래서 다른 조건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런 의지와 열정이 있는 지도자라면 우리 대표팀을 맡길 만하다고 생각했다.”
이 전 감독은 라바리니 감독의 가장 큰 장점으로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는 부분을 꼽았다. 그 변화가 이번 올림픽 경기를 통해 나타났다고 말한다.
“이번 올림픽 경기를 지켜보면서 ‘쌍둥이’들이 많이 생각났다. 대표팀에 이재영, 이다영이 있었다면 얼마나 더 단단한 팀이 됐을까 싶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이 없었기 때문에 대표팀이 더 똘똘 뭉칠 수 있었다고 본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대표팀을 잘 이끌고, 쌍둥이들의 공백을 느낄 수 없도록 팀을 만든 라바리니 감독에게 고마운 마음을 느낀다.”
한유미 해설위원은 “올림픽 시작하기 전에는 8강만 진출해도 대박이라고 생각했다”면서 “어려운 시기를 통해 더 많이 성장하고 발전한 후배들을 보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선수들과 라바리니 감독이 만들어 가는 올림픽 스토리가 오랫동안 진한 여운으로 남을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