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영웅과 떠오르는 새 얼굴’ 김정환‧구본길‧오상욱‧김준호 최강 조합…출중한 외모는 덤
출발 전부터 기대가 컸다. 역대 가장 많은 올림픽 출전권을 땄다. 남녀 사브르와 에페는 개인전과 단체전 모두 출전했고, 남녀 플뢰레는 개인전에 나섰다. 그 결과 금메달 1개(남자 사브르 단체), 은메달 1개(여자 에페 단체), 동메달 3개(남자 사브르 김정환, 남자 에페 단체, 여자 사브르 단체)를 수확했다. 특히 단체전 네 종목에서 모두 3위 안에 들면서 이번 올림픽 출전 선수 18명 중 16명이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걸고 귀국했다.
한국 펜싱이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켠 대회는 2012년 런던올림픽이다. 당시 금메달 2개를 포함해 6개 전 종목(남녀 플뢰레·에페·사브르)에서 메달을 수확하는 기염을 토했다. 올림픽 펜싱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만 이 때문에 2016 리우올림픽 결과가 더 실망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남자 에페 개인전 박상영이 금메달, 남자 사브르 개인전 김정환이 동메달을 각각 수확한 게 전부다. 4년 전의 빛이 너무 화려했기에 상대적으로 그림자도 짙어 보였다.
그러나 도쿄올림픽에선 펜싱이 다시 '효자 종목'으로 발돋움했다. 런던의 영웅들이 신화를 재현했고, 새 얼굴들이 나타나 활력을 불어넣었다. 한국이 리우의 한을 풀고 다시 '펜싱 강국'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 중심엔 세계 최강 남자 사브르 대표팀이 있었다.
#세계 최강 남자 사브르, 개인전 아깝네
남자 사브르 대표팀은 7월 28일 열린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땄다. 넷 다 출중한 외모에 세계 정상의 펜싱 실력을 자랑해 '어펜저스(어벤저스+펜싱)'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신구 조화가 잘 이뤄진 멤버 구성도 완벽하다.
김정환(37·국민체육진흥공단)과 구본길(32·국민체육진흥공단)은 국제펜싱연맹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베테랑이다. 2012 런던올림픽 단체전 금메달도 합작했다. 에이스 오상욱(25·성남시청)과 차세대 간판 김준호(27·화성시청)는 향후 10년간 한국 남자 사브르를 이끌어 갈 주역들이다.
이들 넷은 처음으로 한 팀을 이룬 2017년 세계펜싱선수권 단체전에서 한국 남자 사브르 사상 최초로 우승했다. 이후 한 번도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도쿄에서도 세계 최강의 위용을 재확인했다.
유일한 아쉬움이 있다면 한국 펜싱 사상 첫 올림픽 2관왕 배출에 실패했다는 거다. 남자 사브르 대표팀은 개인전과 단체전 모두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다. 펜싱 관계자들은 "세계 1위 오상욱이 아무래도 가장 유력한 개인전 금메달 후보지만, 김정환이나 구본길 중 누가 시상대 맨 위에 올라도 이상할 게 없다"고 했다.
그러나 단체전보다 나흘 먼저 열린 개인전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2년간 세계 랭킹 1위를 지킨 에이스 오상욱(25·성남시청)이 8강에서 탈락했다. 남자 사브르의 또 다른 간판 구본길(32·국민체육진흥공단)은 32강에서 떨어져 더 놀라움을 안겼다.
#개인전 동메달로 펜싱 새 역사 쓴 맏형
맏형 김정환이 동생들의 자존심을 대신 세웠다. 끝까지 버텨 동메달을 따냈다. 그는 2012 런던올림픽 단체전 금메달, 2016 리우올림픽 개인전 동메달을 이미 갖고 있다. 도쿄 대회 동메달로 최초의 올림픽 3개 대회 연속 메달리스트가 됐다.
김정환은 1983년생이다. 한국 나이로 마흔을 앞뒀다. 한 차례 은퇴도 했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남자 사브르 단체전 금메달을 딴 뒤 현역에서 물러났다. 그런 그가 올해 다시 올림픽 피스트에 오른 건 자신을 '왕년에 펜싱 좀 했던 남자'로만 알고 있던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올림픽 무대에 선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김정환은 은퇴 후 인연을 맺은 항공사 승무원 변정은 씨(34)와 지난해 9월 결혼했다. 하지만 아내는 남편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잘 몰랐다. 안그래도 펜싱에 미련이 남았던 그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열정이 끓어올랐다.
후배의 자리를 빼앗는 건 아닌지 잠시 망설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표팀은 후배들의 '기둥' 김정환을 필요로 했다. 오상욱은 "국제대회에서 실수를 많이 했는데, 김정환 선배 조언 덕에 이겨냈다. 내 목표는 '김정환 선수'처럼 되는 것"이라고 했다. 구본길도 "내 기준은 언제나 '김정환'이다. 나는 형의 발자국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한국 남자 사브르의 맏형은 결국 다시 검을 들었다.
펜싱은 순발력과 집중력이 필요한 종목이다. 특히 사브르는 플레뢰, 에페와 달리 '베기'도 가능해 체력 소모가 유독 크다. 나이를 한 살씩 먹을수록 힘에 부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김정환은 기술만큼 심리전이 중요한 펜싱에서 '교과서 같다'는 평가를 받아온 선수다. 스스로 "가위바위보를 하듯 경기에 임한다"고 했다. 도쿄에서도 그 장점을 그대로 살렸다. 넓은 시야를 활용해 상대의 허를 찌르고 타이밍을 빼앗았다. 활력 넘치는 기합과 제스처로 경기 분위기를 주도했다.
수차례 고비도 겪었다. 준결승에서 자신보다 키가 12cm 큰 루이지 사멜레(이탈리아)를 만났다. 12-6까지 앞섰다가 연속 9점을 내줘 충격적인 역전패를 당했다. 경기 중엔 사멜레의 발을 밟아 발목을 다칠 뻔했다.
산드로 바자제(조지아)와 맞붙은 동메달 결정전에서는 11-10에서 공격하려고 다리를 뻗다 결국 오른 발목이 꺾였다. 응급처치를 하고 경기를 재개했지만, 이번엔 상대가 휘두른 검에 뒤통수를 맞았다. 보호장비가 닿지 않은 부분이라 통증이 극심했다. 온 몸이 만신창이. 김정환은 그 모든 걸 이겨내고 세 번째 올림픽 메달을 손에 넣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아보고 싶었다"던 그가 결국 한국 펜싱에 새 길을 냈다.
개인의 목표도 이뤘다. 아내 변정은 씨는 금의환향하는 남편을 맞이하러 인천국제공항에 나왔다. 그리고 "이렇게 대단한 선수인데, 내가 남편을 너무 가볍게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멋진 선수"라고 감탄했다. 첫 번째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왔던 김정환은 "앞으로는 아내와 상의해 은퇴 시기를 결정하겠다"며 웃었다.
#키도 크고 팔은 더 긴 '막내 에이스'
세 선수가 차례로 출전해 5점씩 따내는 단체전은 흐름이 중요하다. 보통은 그 팀에서 가장 잘하는 선수가 마지막 주자로 나선다. 지고 있으면 역전해야 하고, 이기고 있으면 리드를 지켜야 해서다. 펜싱 관계자는 "한국 남자 사브르 팀은 누가 마지막에 뛰어도 상관 없을 만큼 전부 다 기량이 출중하다. 실수만 없으면 금메달이 유력했고, 계획대로 됐다"고 평가했다.
그 중에서도 선택을 받은 마지막 주자가 바로 오상욱이었다. 그는 고3이던 2014년 12월 국가대표 선발전 3위에 올라 사브르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로 뽑혔다. 이후 빠른 속도로 한국 펜싱의 간판 스타로 성장했다. 태극마크를 단 지 4년 7개월 만에 세계랭킹 1위로 올라섰다. 그 순위를 생애 첫 올림픽 때까지 계속 유지했다.
오상욱은 키(192cm)가 크다. 한국 펜싱 대표팀 최장신이고, 유럽 선수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팔도 길다. 윙스팬(wingspan·양팔을 좌우로 벌린 길이)이 205cm에 달한다. 보통 사람은 키와 윙스팬이 거의 비슷한데, 오상욱은 키보다 13cm 길다. 모든 선수의 검 길이가 동일(105cm)한 사브르에서 긴 팔은 중요한 무기가 된다. 그의 주특기인 팡트(fente·팔과 다리를 동시에 뻗어 찌르는 기술)에 유럽 선수들도 쩔쩔 매는 이유다.
체격이 큰 선수는 대부분 발이 느리다. 하지만 오상욱은 스피드와 탄력을 함께 갖췄다. 펜싱을 막 시작한 매봉중 1학년 때 키가 160cm로 또래보다 작았는데, 결과적으로 그 덕을 봤다. 그는 "작은 키로 상대를 이기려면 더 빠르게 스텝을 밟고, 정확하게 찔러야 했다. 중1 때부터 가장 지루한 기본기와 순발력 훈련을 하루도 빠짐없이 했다"고 했다.
중2 때부터 키가 무서운 속도로 자랐다. 대전 송촌고에 진학할 때쯤엔 187cm까지 컸고, 고1 때 190cm를 넘겼다. 키가 작을 때 갈고 닦은 기본기와 순발력은 체격이 커진 뒤 더욱 효과적인 무기가 됐다. 오상욱은 월등한 체격 조건과 파워, 속도와 유연성을 모두 갖춘 '펜싱 괴물'로 성장했다.
#대표팀의 든든한 기둥과 밝은 미래
구본길은 김정환과 함께 한국 남자 사브르를 떠받쳐 온 기둥이다. 처음 국가대표로 발탁된 2008년부터 김정환과 13년 넘게 동고동락해 형제 같은 호흡을 자랑한다. 런던과 도쿄에서 9년에 걸쳐 올림픽 단체전 2연패(리우올림픽은 세부 종목 단체전 로테이션 규정에 따라 사브르 단체전이 빠졌다)를 함께 일궜다. 둘은 서로의 성장에 큰 도움을 준 경쟁자이자 파트너였다. 김정환은 "내 최고의 라이벌은 구본길"이라고 했다.
개인전 첫 판에서 탈락한 뒤 "아무것도 못 해보고 졌다"며 자책했던 구본길은 그 아쉬움을 단체전에서 깨끗하게 씻었다. 금메달로 향하는 분수령이 된 독일과 준결승에서 두 차례나 역전을 성공시켜 경기 흐름을 바꿨다. 경기 중반 일찌감치 승부가 갈린 결승전에서도 구본길의 '해결사' 본능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단체전 결승에서 승리한 뒤 "나와 김정환 형이 (런던에서) 느낀 올림픽 금메달의 느낌을 후배들도 알게 해주고 싶었다. 개인전에서 경기력이 많이 떨어져 스스로 불안했는데, 간절함 덕에 지금 메달을 딸 수 있지 않았나 싶다"며 활짝 웃었다.
김준호는 '미남 군단'으로 주목받은 사브르 대표팀 안에서도 '대표 꽃미남'으로 통한다. 단체전 예비 멤버로 나서 네 명 중 가장 짧은 시간을 뛰었지만, 잘생긴 외모로 많은 여성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금메달을 눈앞에 뒀던 결승전 8라운드에서 상대를 5-1로 제압해 승리에 쐐기를 박았다.
대표팀 안에서 김준호의 비중은 점점 더 커질 것 같다. 맏형 김정환이 도쿄 대회를 끝으로 올림픽 무대를 떠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김준호는 그 빈자리를 메울 1순위 기대주다. 한국 남자 사브르의 '황금시대'를 함께 연 김준호는 앞으로 할 일이 더 많다.
펜싱 관계자는 "3년 뒤 파리올림픽에 김정환이 함께 나가지 못하게 되더라도, 김준호가 있어서 전력이 크게 약화하진 않을 거다. 한국 남자 사브르는 한 명의 실력이 독보적인 게 아니라 평준화됐다. 좋은 선수들이 모여 훈련하면서 기술적인 부분을 공유하고 함께 발전하는 것도 남자 사브르가 강해진 비결"이라고 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