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회장·심판위원장 등 안 해본 일 없어…바둑 보급 등 ‘재능기부’도 열심
한철균 9단은 대학 3학년이던 1976년 입단해 43년 만인 2019년 한국기원 소속 여든두 번째 입신(入神·9단)이 됐다. 바둑은 중2 때 동네 친구 집에서 친구 아버지에게 처음 배웠다. 한 달 뒤 첫 바둑 선생님을 3점 접어줄 정도로 빨리 늘었다. “당시 8급쯤 됐었는데 그 후 1년에 2급씩 늘어 고3 때는 약하나마 1급이 된 것 같다”고 했다. 고려대 농학과 74학번인 그는 대학 3학년 때 나간 전국학생국수전의 우승자 자격으로 입단했다.
바둑계에서 드문 학구파 기사답게 대학바둑 강자 출신들과 친분이 깊고 지금도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다. 고려대 재학 시절엔 아마 강자인 이해범, 이웅기 등과 어울려 대회도 많이 나갔다. “박정희 정권 때 밥 먹듯 휴교령이 내려져 최루가스 맡으며 바둑 두던 기억이 생생하다”는 그는 매일 바둑판 앞에만 앉아 있다 보니 학업은 뒷전이기 일쑤였다고. 4년 내내 서머스쿨과 윈터스쿨을 빠지지 않고 수강하느라고 학교 좋은 일도 많이 시켜줬다며 웃는다.
대회 참가로 인한 교류가 좋은 인연으로 이어진 적도 많았다. 한국외국어대 출신 김원태 씨와의 인연은 바둑대회 창설로 이어지기도 했다.
“김원태 씨가 경기고 출신이었어요. 어느 해 마산에서 3·15 의거배 고교동문 바둑대회가 열렸는데 여기서 경기고가 우승하면 함께 경기고 선배 한세실업 김동영 회장을 찾아가 대학바둑대회를 후원해 달라고 하기로 작전을 짰지요. 마침 경기고가 우승을 했고, 김동영 회장님도 흔쾌히 수락해 지금의 한세실업배 대학동문전과 YES24배 고교동문전이 탄생했어요.”
바둑 해설은 1995년 바둑TV가 생기면서 시작했다. “그때는 KBS에서 노영하, MBC는 윤기현, SBS는 유건재 사범의 해설 입지가 굳건했기에 자리가 없었죠. 그러다가 바둑TV에서 기회가 주어졌고, 제법 열심히 했습니다.”
그가 해설을 맡은 ‘도전! 프로를 이겨라’, ‘대학동문전’, ‘고교동문전’, ‘지지옥션배 신사 대 숙녀 연승대항전’ 등은 바둑TV의 간판 프로그램 바둑리그 중계보다 시청률이 높을 때가 많았다.
그의 해설은 호불호가 갈린다는 평을 듣는다. 비유를 곁들인 눈높이 해설이 웃음을 머금게 해 친숙하게 느껴진다는 쪽이 있는가 하면, 비유가 지나치다는 사람들도 있다. 본인은 “제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는 팬도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나름대로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평균을 맞추려는 노력으로 봐주시면 좋겠다”고 했다.
20여 년 전 월간바둑에 연재한 강좌를 모아 출간한 ‘돌의 방향’을 시작으로 꾸준히 바둑책을 내온 한 9단은 2년 전 아예 출판사를 직접 차렸다.
“바둑책을 출간하는 이유는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바둑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지만, 제 존재 이유를 세상에 표출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뭐, 부질없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웃음).”
자비를 들여 제작한 책으로는 좋은 일도 많이 했다. 한국바둑중학교와 고등학교에 기부하기도 했고, 바둑 보급을 위한 행사에도 빠지지 않고 책을 기부했다. 최근에는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도 출간 의뢰가 들어와 6권의 책을 일본 현지에서 펴내기도 했다. 얼마 전 국내에 출간된 인공지능(AI) 바둑에 대한 책도 일본 출판사를 통해 시리즈로 발간할 예정이다.
그는 재능기부에도 열심이다. 양평보건소가 치매 예방을 목적으로 개설한 어르신 바둑교실에서 수년간 열심히 바둑을 가르쳐 명예 양평군민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이렇듯 다방면에서 활약한 한 9단이지만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은 남아 있다.
“1990년대 중반 명지대학교에서 바둑학과가 처음 출범했을 때 정수현 교수와 함께 작고하신 심종식 사범님과 제가 바둑학과 교수 물망에 올랐어요. 결국 낙점은 정 교수가 됐는데, 당시 바둑학과 창설을 주도하신 분이 이후에도 제게 강의를 제의하셨어요. 하지만 그때는 미역국을 먹어 자존심도 상하고 해서 거절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강의를 했으면 나중에라도 대학에서 교편을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좀 아쉽죠.”
하지만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그의 딸이 대신해줬다. 한 9단의 딸 한사민 씨는 서울대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박사 과정까지 마쳤는데 최근 미시시피대학 조교수로 임용돼 8월 중순부터 강단에 서게 된 것. 얼마 전 딸에게서 연락을 받았단다.
“10여 년 운영했던 어린이 바둑교실도 집에서 딸에게 바둑을 가르치다가 일이 커져 시작하게 됐는데 딸은 제게 항상 좋은 소식만 전해주네요. 평생 든든한 응원군입니다.”
인터뷰가 마무리될 때쯤 혹시 빠진 내용이 있을까 싶어 질문지를 정리하는데 한 9단이 마지막으로 한마디 툭 던진다.
“프로기사뿐 아니라 바둑계가 생각을 많이 해야 할 때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의 시각이 아닌, 넓은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가졌으면 해요. 후원하고 도와주는 기업이나 개인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스폰서를 진심으로 예우하고 대접해야 바둑계도 발전할 수 있습니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