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 직후부터 정경유착 논란, 국정농단 사태로 4대그룹 탈퇴…‘최장수’ 허 회장 역할 주목
#정치권과의 소통창구로 활용된 전경련
전경련은 오랫동안 국내 대표 경제 단체이자 재계와 정치권을 연결하는 소통창구로 활용됐다.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정치권이 재계 의견을 듣기 위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전경련이었다. 2016년 전경련은 위상에 치명타를 입었다. 그해 '국정농단 게이트'에 연루되면서 삼성, 현대자동차 등 주요 대기업이 전경련을 탈퇴했다. 한때 재계를 대표했던 전경련 회장의 위상도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전경련의 모태는 1961년 창립한 한국경제인협회다. 설립을 주도한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초대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을 맡았다. 이후 1968년 전경련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전경련은 재계를 대변해 정부에 정책을 건의하고, 해외 시장 개척을 지원하는 등 국내 기업의 활동을 돕는 역할을 자임해 왔다. 때로는 재계를 대표해 국가 행사를 지원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8년 서울올림픽이다. 당시 전경련 회장이었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1981년 올림픽 유치위원장에 취임했다. 그는 각국 재계 인사를 설득하고, 국내 기업에는 후원을 요청하는 등 올림픽 유치에 큰 힘을 보탰다.
서울올림픽처럼 전경련과 정부의 협업이 긍정적인 효과를 낼 때도 있지만 정경유착의 창구로 사용된다는 비판이 늘 뒤따랐다. 전경련은 설립 직후부터 정경유착 논란에 휩싸였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1년 부정축재 혐의로 이정림 대한양회 회장, 고 이양구 동양시멘트 회장 등 재계 총수들을 구속하자 이병철 회장은 한국경제인협회 회장 자격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나 담판을 지었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산업재건에 이바지할 기회를 준다는 이유로 기업인들을 모두 석방했다.
1995년에는 재계가 전경련을 통해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일었다. 이 때문에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고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 등이 불구속 기소됐고, 이들은 모두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전경련은 1995년 사과문을 통해 “과거의 잘못된 관행으로 인해 오늘날 불행한 사태가 일어난 데 대해 깊이 자성하고 있다”며 “앞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어떠한 명분으로도 음성적인 정치 자금을 제공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국정농단 게이트에 연루되면서 다시 한 번 논란이 됐다. 주요 대기업들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수백억 원을 출연하는 과정에서 전경련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에 후원한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전경련을 해체해야 한다는 여론까지 나왔다. 논란이 불거지자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4대 그룹은 전경련을 탈퇴했다.
전경련은 2017년 △한국기업연합회(한기련)로 명칭 변경 △회장단 회의 폐지 △경영이사회 신설 △7본부를 1본부 2실로 축소 △연 2회 재무현황 공개 등 혁신안을 발표했다.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2017년 신년사에서 “국민의 엄중한 목소리를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며 “앞으로 전경련은 국민적인 여망을 반영한 여러 가지 개선방안을 조속히 마련하도록 하겠다”고 전했다. 전경련은 회장단 회의 폐지, 본부 축소 등 일부 혁신안은 이행했지만 명칭 변경은 이뤄지지 않았고, 재무현황도 연 1회만 공개하고 있다.
#허창수 회장, 전경련 위상 회복할 수 있을까
2011년 취임한 허창수 회장(33대~38대)은 연임 의사가 없음을 수차례 밝혔지만 마땅한 회장 후보가 나타나지 않아 현재까지 회장을 맡고 있다. 전경련뿐만 아니라 국내 경제단체 최장수 수장 기록을 쓰고 있다. 비단 국정농단 게이트가 아니더라도 전경련은 2000년대 이후 회장 구인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전경련은 통상 회장단 회의를 통해 회장 내정자를 정한 후 정기총회에서 발표한다. 하지만 내정자가 그룹 경영에 집중한다는 이유로 회장직을 고사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허창수 회장은 올해 2월 회장 취임사를 통해 전경련의 쇄신과 부여된 역할을 다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전경련을 외면하는 분위기는 여전하다. 문재인 정부는 각종 행사에서 전경련을 배제해 ‘전경련 패싱’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올해 4월 정부에 제출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면 건의서에는 한국경영자총협회,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중소기업중앙회, 한국무역협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등 5개 경제단체가 이름을 올렸지만 전경련은 빠졌다.
지난 5월 취임한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구자열 한국무역협회 회장 등을 만나 경제현안을 논의했지만 전경련은 그 대상에서 제외됐다. 또 지난 6월 ‘국무총리-경제계단체장 간담회’에서도 김부겸 국무총리와 최태원 회장, 손경식 회장, 구자열 회장, 김기문 회장, 강호갑 한국중견기업연합회 회장 등이 참석했지만 전경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전경련 내부적으로도 과거에 비해 홍보 비용 등이 크게 줄고, 사업 규모도 축소됐다. 4대 그룹 탈퇴로 전경련 회비수익이 감소하면서 사용 가능한 비용도 그만큼 줄어든 것이다. 전경련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전경련의 2016년 회비수익은 400억 원이 넘었지만 2017년 이후로는 100억 원이 채 되지 않는다. 전경련이 2020년 임대료 수익과 관리비수익을 모두 합쳐 거둔 466억 원의 수익은 2016년 937억 원의 절반 수준이다. 전경련이 자체적으로 수익 사업을 하지 않아 회비나 임대료·관리비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수익원도 없다.
위상이 과거와 같지 않다고 해도 활동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경련은 지난 5월 모건스탠리캐피탈인터내셔널(MSCI)에 한국을 신흥시장에서 선진시장으로 승격시켜줄 것을 촉구하는 의견서를 전달했고, 5월 11~12일 열린 B7 정상회의에는 허창수 회장이 한국 경제계 대표로 참석했다. 지난 7월에는 유럽연합(EU)에 탄소국경조정제도 면제국에 한국을 포함시켜달라는 건의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허창수 회장 입장에서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야당인 국민의힘이 전경련에 상대적으로 우호적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황교안 전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대표는 2019년 8월 전경련과 정책간담회를 개최한 바 있고, 2020년 9월에는 권태신 전경련 부회장이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만나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논의했다. 전경련 주최 행사에 국민의힘 인사가 참석하는 사례도 종종 있다. 일례로 전경련이 올해 4월 주최한 ‘한미정상회담, 한국 경제계는 무엇을 대비해야 하나’ 토론회에 박진 국민의힘 의원이 참석한 바 있다. 이 때문에 전경련 내부에서는 정권 교체를 희망하는 여론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우호적일 뿐, 국민의힘이 적극적으로 전경련을 활용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가 수차례 ‘전경련 패싱’을 할 때 국민의힘이 공식적으로 전경련을 옹호하는 논평을 낸 적도 없다. 즉, 여야 모두 전경련에 대한 감정을 떠나 관심 자체가 크지 않다. 이 때문에 4대그룹이 복귀하지 않는 이상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단기간 내 위상 회복은 어렵다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대한상의가 재계 대표 단체로 자리매김한 현 상황에서 4대그룹의 전경련 재가입 여부는 미지수다.
허창수 회장의 임기는 2023년 2월까지다. 현재와 같은 분위기가 이어질 경우 회장 지원자가 없어 허 회장이 또 다시 연임할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전경련 관계자는 “정책 연구와 건의 등 전경련 본연의 업무를 열심히 하고 있다”며 “외부 요인으로 인해 크게 업무에서 벗어난 일을 하고 있지는 않다”고 전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