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 김시진 이어 2·3호 최동원·선동열 대투수 반열…왼손 최초는 송진우, 역대 최연소는 정민철
#천신만고 끝에 따낸 100번째 승리
유희관은 100승 고지를 앞두고 지독한 '아홉수'에 시달렸다. 5월 9일 광주 KIA 타이거즈전에서 99승째를 거둔 이후 132일 동안 마지막 1승을 올리지 못해 애를 먹었다. 많은 이가 관심을 갖고 지켜봤고, 유희관 스스로도 100승에 대한 열망이 컸지만, 승리는 뜻대로 찾아오지 않았다.
평소 투수 교체를 단호하게 하는 김태형 두산 감독조차 9월 12일 잠실 LG 트윈스전 5회에는 7-1로 앞서던 경기가 7-5로 쫓길 때까지 유희관을 마운드에서 내리지 않고 지켜봤다. 투아웃까지 잘 잡은 뒤라 마지막 아웃카운트 하나만 채우면 승리 투수 요건을 갖출 수 있는 상황이어서다. 그러나 감독의 기다림에도 유희관은 계속 추격을 허용했고, 끝내 이닝을 마치지 못했다.
두산 구단도 속이 탔다. 100승은 투수에게 가장 값진 기록 중 하나다. 당연히 유희관이 등판하는 날마다 100승 기념행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99승 이후 5경기째 100승이 불발되면서 미리 주문해둔 꽃다발도 매번 무용지물이 됐다. 팀 사정도 녹록지 않았다. 치열한 순위 싸움을 이어가는 중이라 선수 한 명의 기록을 위해 등판 일정을 배려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독한 아홉수는 결국 '5전 6기' 끝에 깨졌다. 유희관은 9월 19일 키움을 6이닝 무실점으로 틀어막은 끝에 힘겨운 100승 이정표를 세웠다. 278번째 경기에서 1402⅓이닝을 소화하면서 공 2만 3148개를 던져 달성한 기록이다. 100승 중 구원승은 2승뿐. 98승은 모두 선발승이다.
그동안 유희관은 두산(전신 OB 포함)의 왼손 투수 역사를 새로 써왔다. 2015년 18승을 따내 1988년 윤석환(13승)이 보유하고 있던 팀 왼손 투수 한 시즌 최다승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어 2017년에는 이혜천(55승)을 넘어 역대 두산 왼손 투수 통산 최다승 기록을 다시 썼다. 이 기록은 유희관이 1승을 추가할 때마다 매번 경신되고 있다.
천신만고 끝에 100승을 따낸 유희관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시즌 초반 몇 경기에선 '100'이라는 숫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 던지려다 보니 계속 급해졌다"고 털어놓으면서 "정작 100승 경기에선 '100'을 생각하지 않고 '한 경기 편하게 던지자'는 마음으로 나섰더니 결과가 좋았다. (목표를 이루기까지) 선수들이 많이 도와줬다"고 고마워했다.
이제 유희관의 다음 목표는 통산 109승. 1983년부터 13년 동안 장호연이 기록한 역대 두산 투수 최다승이다. '왼손'의 꼬리표를 떼고 팀 전체 투수 중 1위로 올라서겠다는 포부다.
#김시진과 최동원, 최초의 100승 레이스
KBO리그 최초의 100승 투수는 삼성 라이온즈 김시진이다. 데뷔 5년 만인 1987년 10월 3일 잠실 OB전에서 시즌 마지막 승리를 통산 100승으로 장식했다. 연 평균 20승이라는 무시무시한 페이스였다. 투수 분업화가 정착되기 전이라 가능했던 일. 186경기 만에 100승을 이뤄내면서 역대 최소 경기 100승 기록도 동시에 보유하고 있다. 야구 관계자들은 "이 기록만큼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당시에는 1958년생 동갑내기 투수인 삼성 김시진과 롯데 자이언츠 최동원 가운데 누가 먼저 최초의 100승 고지를 밟게 될지도 관심거리였다. 둘 다 당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대투수여서 더 그랬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한국에서 열리면서 국가대표로 발이 묶여 1년 늦게 데뷔하게 된 사정도 똑같았다.
1983년은 17승의 김시진이 9승의 최동원에 압승을 거뒀지만, 이듬해인 1984년에 최동원이 무려 27승을 쌓아 올리면서 김시진(19승)을 눌렀다. 이후 2년간의 양상도 비슷했다. 1985년은 김시진이 25승으로 20승의 최동원을 앞질렀지만, 1986년에는 최동원이 19승을 올려 김시진(16승)보다 3승을 더했다.
첫 4년간의 성적은 김시진이 통산 77승, 최동원이 75승. 단 2승 차였다. 1987년 개막을 앞두고 두 투수의 대결에 관심이 쏠린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의외로 싱겁게 승부가 갈렸다. 김시진은 100승까지 필요한 23승을 한 해에 모두 채우면서 아홉수 한 번 없이 사상 최초의 100승 고지에 올랐다. 반면 최동원은 14승을 올리는 데 만족하면서 통산 89승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이후 최동원은 선수 노조 설립 문제와 연봉 협상 마찰, 트레이드(얄궂게도 1988년 11월 롯데와 삼성 간의 4 대 3 트레이드를 통해 최동원과 김시진이 유니폼을 바꿔 입었다)와 같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더 이상 승수를 빠르게 쌓지 못했다. 1988년 7승, 1989년 1승을 올린 게 전부였다.
최동원은 1990년 7월 12일 대구에서 열린 OB와 더블헤더 제2경기에 이르러서야 100승까지 남았던 3승을 어렵게 채우고 삼성 소속으로 100승을 따냈다. 한국 프로야구 역대 2호 100승 투수. 예상됐던 주인공이지만, 그 시기는 예상보다 조금 늦었다. 이미 롯데 시절 혹사의 여파로 구위가 많이 떨어진 뒤였다.
김시진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연 평균 20승은 연 평균 220이닝을 던졌기에 가능했던 기록이다. 팔이 성했을 리 없다. 그는 100승 달성 이후 5시즌 동안 합계 24승을 올리고 은퇴했다.
#각 구단 최초의 100승 투수들
최동원 이후 100승 투수들의 숫자는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2개월 후인 1990년 9월 2일 잠실 OB와 더블헤더 제2경기에서는 역대 최고의 투수로 꼽히는 해태(KIA의 전신) 선동열이 개인 통산 100승 고지를 밟았다. 해태가 배출한 첫 100승 투수이자 당시에는 최연소 기록이었다.
김시진, 최동원, 선동열에게 줄줄이 1~3호 100승을 헌납했던 OB는 3년 후인 1993년 9월 14일 사직 롯데전에서 장호연이 역대 네 번째 통산 100승을 올리면서 100승 투수를 배출하는 데 성공했다. 장호연은 지난해까지 베어스 한 팀에서만 100승을 올린 유일한 투수였는데, 그 뒤를 올해 유희관이 이었다.
롯데 최초의 100승 투수로 기록된 선수는 윤학길(1994년)이다. 최동원은 롯데에서 대부분의 승리를 거뒀지만, 100승 고지는 삼성 이적 후 밟았기 때문이다. LG 정삼흠(1996년), 한화 이글스 송진우(1997년), 현대 유니콘스 정민태(2000년)도 차례로 팀 프랜차이즈 최초의 100승 투수라는 이정표를 세웠다.
SK 와이번스(SSG 랜더스의 전신)에서는 김원형 현 감독이 2005년 가장 먼저 100승 투수로 이름을 올렸다. 다만 이 100승에는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올린 68승이 포함됐다. SK에서만 100승을 모두 따낸 최초의 투수는 2016년의 김광현(MLB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이다.
막내 구단 KT 위즈도 외국인 투수 덕에 100승 투수를 배출한 구단으로 기록됐다. 2011년부터 2017년까지 두산에서 94승을 거둔 더스틴 니퍼트가 2018년 KT에서 8승을 더하면서 100승 투수 대열에 합류했다.
#100승 관련 진기록은 누가 세웠나
100승 투수 32명 가운데 단일 팀에서 100승을 달성한 투수는 총 22명이다. 나머지 10명은 한 차례 이상 팀을 옮겼다. 100승 달성 당시 소속팀으로 분류하면 삼성 소속이 8명으로 가장 많다. KIA가 5명, 한화와 LG가 각 4명, 롯데와 두산이 각 3명, 현대와 SK가 각 2명을 배출했다.
김시진은 앞서 언급했듯 역대 최소 시즌과 최소 경기 100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한화 정민철은 27세 3개월 2일의 나이로 100승을 달성해 역대 최연소 기록을 갖고 있다. 고졸 신인으로 데뷔한 뒤 8번째 시즌에 달성했다. 이 부문 2위인 선동열과는 4개월 가까이 차이가 난다. 반대로 한화 이상군은 38세 9일이 되던 날 100번째 승리를 따냈다. 역대 최고령 기록이다. 삼성 이상목은 19년 차였던 2008년에 100승 고지에 올랐다. 가장 높은 연차에 100승을 달성한 투수다.
송진우는 왼손 투수로는 최초로 100승 투수 반열에 올랐다. 데뷔 9년 만이던 1997년 9월 20일 인천 현대전이 그 무대였다. 2002년에는 역시 사상 최초로 150승 이정표를 세웠고, 2006년에는 200승이라는 금자탑까지 쌓았다. 한국 프로야구 200승 투수는 여전히 송진우(210승)뿐. 150승을 넘긴 투수도 송진우 외에 정민철(161승), 이강철(해태·152승)밖에 없다. 양현종이 통산 150승까지 3승을 남겨둔 채 지난 시즌 종료 후 미국으로 떠났다.
이강철은 1996년 역대 7호이자 잠수함 투수로는 최초로 100승 투수가 됐다. LG 김용수는 1998년에 역대 10호 100승 투수로 이름을 올린 뒤 이듬해 200세이브까지 돌파했다. 사상 첫 '100승-200세이브' 투수다. 이 기록은 김용수와 KIA 임창용만 보유하고 있다. 외국인 선수는 앞서 언급한 니퍼트가 유일하다. 니퍼트는 KBO 리그에서 무려 8시즌을 뛰었다. 역대 외국인 선수 최장 기간 기록이다.
김광현과 장원준(두산)은 2016년 4월 24일 나란히 100승 고지를 밟아 역대 최초로 하루에 100승 투수 2명이 탄생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심지어 둘 다 KBO리그 역사에 많지 않은 왼손 100승 투수라 더 눈길을 모았다. 같은 날 등판한 둘의 기록 달성 순서는 한시적으로 도입됐던 '선데이 나이트 베이스볼' 이벤트가 갈랐다. 그날 김광현이 등판한 인천 NC전과 장원준이 나선 잠실 한화전 경기 시작 시간이 달랐기 때문이다.
KBO는 2015·2016년 두 시즌 동안 흥행 강화를 위해 4·5·9월 일요일 오후 2시 경기 중 일부를 오후 5시에 편성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잠실 두산-한화전이 '선데이 나이트 베이스볼' 대상 경기로 지정돼 장원준이 김광현보다 늦게 마운드에 오르게 됐다. 결국 '순서의 형평성'을 놓고 고민하던 KBO는 '기록 달성 시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광현과 장원준은 그날 모두 승리 투수가 돼 각각 좌완 3호와 4호 100승 투수로 남았다.
#'왼손 100승 투수' 많아진 이유
100승 투수 32명 중 약 78%에 해당하는 25명이 오른손(사이드암 포함) 투수다. 100승을 돌파한 왼손 투수는 유희관까지 총 7명. 송진우가 최초로 100승을 돌파한 뒤 두 번째 왼손 100승이 나오기까지는 무려 18년이 걸렸다. 장원삼(삼성)이 2015년 4월 7일 롯데전에서 100승을 거두면서 마침내 그 공백을 깼다.
전 세계 인구 중 왼손잡이 비율은 10% 안팎으로 알려져 있지만, 야구계는 유독 왼손잡이가 많은 분야다. 아예 어릴 때 야구를 시작하면서 '후천적 왼손잡이'로 길러지는 투수도 많다. MLB 토론토 블루제이스 류현진이 대표적이다. 그런데도 KBO리그에 왼손 100승 투수가 많지 않았던 원인은 분명히 있다.
선수 시절 좌완 에이스로 활약한 야구 관계자 A 씨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감독이나 투수코치들이 왼손 투수는 주로 선발보다 불펜 원포인트릴리프나 롱릴리프로 기용하곤 했다"며 "좋은 왼손 투수들은 선발로 던지다가도 마무리로 투입되는 보직 이동이 잦았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구대성(67승 214세이브), 이상훈(71승 98세이브), 조규제(54승 153세이브) 같은 리그 정상급 왼손 투수들은 선발과 마무리에서 모두 활약하느라 100승 달성 기회를 놓쳤다. 성준(97승), 김정수(92승), 주형광(87승)도 상대적으로 일찍 불펜으로 자리를 옮긴 투수들이다.
A 씨는 "나도 한때 마무리 투수를 경험했고, 최근에도 좋은 왼손 투수들 중 불펜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이 많았다. 왼손으로 100승을 올린 투수들은 실력도 뒷받침된 데다 그동안 마무리 차출 없이 선발로 계속 뛰었기 때문에 100승이 가능했다고 본다"고 했다.
오른손 에이스 출신인 또 다른 야구 관계자 B 씨도 "과거에는 지금과 달리 왼손 타자가 많지 않아서 왼손보다는 오른손 투수가 주로 선발 역할을 맡았다"고 증언하면서 "지금처럼 투수들이 던지는 구종도 다양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왼손 투수들은 대개 오른손 타자 몸쪽으로만 승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점이 선발로 긴 이닝을 소화하는 데 걸림돌로 여겨졌다"고 분석했다.
이런 이유로 송진우를 제외한 왼손 100승 투수들은 모두 2000년 이후 데뷔해 2010년 이후 기록을 달성했다. 2015년 왼손 2호 100승 투수 장원삼을 시작으로 2016년 김광현과 장원준, 2017년 양현종, 2019년 차우찬(LG 트윈스), 올해 유희관 순이다. 2015년까지는 24명 중 2명이 왼손 투수였는데, 2016년부터는 8명 중 5명으로 전세가 역전됐다.
B 씨는 "왼손 타자들이 점점 늘고 투수들이 던지는 구종도 많아지면서 왼손 선발 투수들의 경쟁력이 커진 지 오래다. 앞으로도 왼손 100승 투수 수는 더 늘어날 것"이라고 점쳤다. 올해 신인 중 '특급'으로 평가 받는 이의리(KIA), 김진욱(롯데) 등도 모두 왼손 투수다.
유일한 변수는 '해외 진출'이다. KBO리그를 주름잡는 왼손 투수들은 이제 메이저리그(MLB)와 일본 프로야구(NPB)에서도 탐내는 대상이다. 대표적으로 류현진은 한화에서 7시즌 동안 통산 98승을 쌓아 올렸지만, 100승을 눈앞에 둔 채 메이저리그로 진출해 기록이 멈췄다. 최근 프로에 입단했거나 입단을 앞둔 신인 중에도 KBO리그에서 7년을 채운 뒤 해외 리그에 도전하겠다는 목표를 세운 투수가 많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