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인사 총괄 ‘실세’ 대통령 측근인사 기용…정권 ‘사금고지기’, 특활비 문제로 사고도
국정원 내 차관급 4명 가운데 한 명이라고는 하지만, 당연히 서열은 꼴찌다. 서열이 국정원 1차장~3차장 다음이다. 그럼에도 언론은 왜 기획조정실장을 국정원의 2인자라고 평가할까. 이는 국정원 인사 특징 때문에 나온 평이다. 기조실장은 보통 국정원 내부가 아니라 외부 인사가 임명되다 보니 ‘실세’라는 평가가 나오곤 했다. 정부 혹은 정치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이들이 외부에서 들어오다 보니 1~3차장을 제치고, ‘2인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내부 승진보다 외부 발탁 많아
국정원 기획조정실장(기조실장)은 별정직 1급 직위로, 차관급인 차장을 보좌하도록 과거 중앙정보부법(안기부법)에 규정돼 있었다. 하지만 문민정부 들어 차관급으로 직급이 상향됐다. 정부마다 조금씩 역할이 변화했지만, 예산과 인사를 담당하는 주된 업무는 바뀌지 않았다. 국정원장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주로 정권과 가까운 인사들이 맡아온 게 특징이기도 하다. 국정원 장악을 위해서는 예산과 인사가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서 함께 눈여겨봐야 하는 점은 국정원 조직의 특수성이다. 국정원은 조직 성격 상, 구체적인 예산 규모와 용처가 밝혀진 점이 없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2021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국가정보원 예산은 2020년보다 564억 원 늘어난 7460억 원으로 편성돼 있지만, 이는 대외적으로 드러난 필수 예산일 뿐이다.
공식 예산 말고도 국정원법의 ‘국정원 예산 중 미리 기획하거나 예견할 수 없는 비밀활동비는 총액으로 다른 기관의 예산에 계상할 수 있다’는 조항에 따라 확보할 수 있는 비공식 예산이 있다. 기획재정부 예비비 가운데 한 항목인 ‘국가안전보장 활동 경비’가 대표적인데, 이 같은 비공식 예산을 모두 더하면 국정원이 1년에 사용하는 예산은 1조 원이 넘는다는 게 정치권 설명이다. 그러나 보니 오랜 기간 국정원 기조실장은 정권의 사금고를 맡아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
국정원 예산은 과거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정권에 의해 활용했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기조실이 별도로 없었을 정도로 자유롭게 자금을 꺼내 활용했다. 청와대의 필요에 의한 조치이기도 하다. 격려금이나 금일봉처럼 영수증 없이 집행해야 하는 돈이 필요한데, 그런 돈을 국정감사까지 받아야 하는 청와대 예산으로 편성해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통령 직속기관인 국정원에 영수증 제출을 필요로 하지 않는 특활비 항목으로 넣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가져다 쓴 것이다.
자연스레 국정원 기조실장에는 보통 최고 통치권자의 측근 인사가 기용됐다. 기조실장 자리에 내부 승진보다는, 외부에서 발탁된 인사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김대중 정부부터 현재까지 역대 기조실장은 이강래, 문희상, 최규백, 장종수, 서동만, 김만복, 안광복, 김주성, 목영만, 이헌수, 신현수, 이석수, 박선원(현직) 등이다.
이 가운데 최규백과 김만복 정도만이 정통 국정원맨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외에는 모두 대통령 인수위에서 함께 활동했거나, ‘믿을맨’으로 분류되는 이들이 국정원에 들어온 케이스다. 국정원 정보에 정통한 관계자들에 따르면, 기조실장이 2인자인지 여부는 결국 ‘천거’를 누가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한 관계자는 “당시에도 김주성 기조실장의 경우 이명박 대통령과 가깝고 그 외에도 청와대와의 직접 소통이 가능하다 보니 실세로 분류됐지만, 후임인 목영만 실장은 관리형으로 분류됐다. 이는 서울시에서 환경국장 등을 하면서 원세훈 당시 원장을 보좌하는 성격이 강한 기조실장이었기 때문”이라며 “기조실이 예산을 관리하기 때문에 힘이 있다고 하지만, 결국 누가 추천해서 임명됐느냐에 따라 진짜 실제인지, 그냥 실장인지가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정원장과의 갈등이 종종 언론에 등장하는 것도 ‘원장 외 인사의 천거’로 된 경우로 보면 된다고 한다. 실제 박근혜 정부 시절 이헌수 국가정보원 기조실장은 사표를 제출했다가 반려되기도 했는데, 이를 놓고 이헌수 당시 실장과 이병기 국정원장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게 공공연한 소문이었다. 이헌수 실장은 전임인 남재준 국정원장 시절 임명됐는데 이병기 원장과 이헌수 실장이 힘겨루기를 하는 양상이었다고 한다.
또 다른 국정원 근무 경험이 있는 법조인은 “정권 초에는 국정원을 길들이기 위해서 정부와 가까운 대선 캠프나 인수위 멤버를 보내는 게 일반적이지만, 정권 중반에 들어서면 국정원에서도 승진시키거나 국정원과 정부가 추진하는 일을 서포트하는 성격의 인사를 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자연스레 뒤따르는 '돈' 사고
그럼에도 기조실장은 국정원의 돈을 관리하며 동시에 정부에 조달하기도 해야 하는 ‘사금고지기’였다. 당연히 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과거 김영삼 정부 때에는 김기섭 국정원(당시 안기부) 기조실장이 김 대통령 아들 김현철 씨의 정치자금을 숨겨주고 세탁한 혐의로 투옥됐고, 최규백 전 기조실장은 북한에 돈을 송금해줬다는 ‘대북 송금 사건’으로 기소돼 재판을 받기도 했다.
이후에도 흑역사는 계속됐다. 박근혜 정부 때 국정원장을 역임한 세 명(남재준, 이병기, 이병호) 모두 국정원의 특수활동비(특활비)를 청와대에 상납한 혐의로 수사를 받았는데, 이들이 청와대에 상납한 특활비를 실질적으로 관리한 것은 당시 이헌수 기조실장이었다. 이헌수 전 기조실장의 진술을 통해 수천만 원 단위에서 수억 원의 자금이 청와대에 건네진 사실이 드러났고 결국 이 전 실장은 징역 2년 6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신현수 전 검사가 첫 기조실장으로 임명됐다. 노무현 정부 시절 문재인 민정수석비서관을 보필하는 사정비서관을 지낸 그는 19대 대선 때는 문재인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법률지원단장을 맡은 바 있다. 법무부 장관이나 민정수석 후보로도 거론됐지만, 그는 기조실장으로 임명됐다. 직급은 낮지만 문재인 정부에서도 ‘기조실장 자리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는 평이 나오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정권에 가까운 인사면 아무나 잘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예산과 인사를 총괄하면서 국정원 내부 분위기를 장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실세라고 불렸던 서동만 전 실장의 경우 ‘내부 장악 문제’로 물러나야 했다. 당시 청와대 측은 “아무래도 페이퍼 워크가 위주인 기조실장 자리에 부자연스런 면이 있었다”며 교체 사유를 밝히기도 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