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결승서 접전 끝에 중국 1위 커제에 승리…‘천재 기사’ 양딩신과 우승컵 놓고 맞대결
신진서 9단 이야기다. 누구나 우승을 예상했던 삼성화재배 결승전에서 박정환 9단에게 1승 후 2연패를 당하면서 나락으로 떨어졌던 그다. 하지만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LG배에선 한국 바둑의 구세주로 나타났으니 정말 새옹지마가 따로 없다.
신진서가 LG배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지난 10일 서울 한국기원과 베이징 중국기원에서 온라인으로 치러진 제26회 LG배 기왕전 준결승전에서 신진서 9단이 중국 커제 9단에게 300수 만에 백 3집반승을 거두고 결승진출을 확정지었다. 지난 24회 대회 우승자 신진서는 이로써 LG배 두 번째 우승컵을 노릴 수 있게 됐다.
한국은 전날 열린 8강전에 박정환 9단, 신민준 9단, 변상일 9단이 출전했지만 각각 커제 9단, 양딩신 9단, 미위팅 9단에게 패했다.
신진서는 대국이 끝난 후 가진 인터뷰에서 “박정환 9단에게 삼성화재배 결승에서 지고 바로 LG배가 이어져서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앞서 한국 기사 3명이 8강에서 모두 졌고 하필 상대도 중국의 커제 9단이어서 부담이 더 됐다. 하지만 두다 보니 수가 잘 보였고 결과가 좋아 다행”이라고 겸손해 했다.
신진서의 말대로 신진서에게 커제는 절대 지고 싶지 않은 얄미운(?) 상대다. 역대전적도 5승 11패로 뒤져 있고 작년 삼성화재배 결승에서는 ‘마우스패드 미스’ 사건이란 전대미문의 상황을 연출하며 우승컵을 넘겨줬다. 신진서가 한국바둑의 에이스로 떠오를 무렵에는 “신진서의 실력은 대단치 않다”고 발언해 신진서와 국내 바둑팬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신진서가 올해 농심 신라면배에서 5연승으로 한국 우승을 확정지은 후 “커제의 도발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고 했을까.
신진서와 커제의 준결승전은 한국과 중국의 랭킹1위 간 대결답게 양국 팬들의 이목이 쏠린 한판이었다. 신진서가 23개월 연속 한국랭킹 1위를, 커제가 36개월 연속 중국랭킹 1위를 달리는 등 양국 최강자의 대결답게 중반까지 인공지능 승률 그래프도 5 대 5를 기록할 만큼 팽팽한 접전이었다.
300수까지 가는 접전 끝에 3집반을 패한 커제는 중국 현지 인터뷰에서 “대국 중에는 형세가 계속 유리하다고 보고 있었는데 국후 인공지능으로 되돌아보니 계속 승률이 비슷했고 내가 좋은 적이 거의 없어 의외였다. 후반에 착각을 했는데 좌변에서 상대가 쌍립하는 수단을 미처 보지 못했다(실전3의 백4). 전체적으로 초읽기에 몰려 최강의 수단을 찾지 못해 아쉬웠다. 초읽기 훈련을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사실 후반에 매우 당황했고 다음 착점이 떠오르지 않아 애를 많이 먹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승리한 신진서는 9일 결승에 선착한 중국의 양딩신 9단과 내년 2월 7일부터 결승3번기로 우승컵을 다툰다. 24회 LG배 우승자 신진서는 2년 만에, 23회 LG배 패자(覇者) 양딩신은 3년 만에 각각 LG배 두 번째 우승에 도전한다.
신진서와 양딩신의 상대전적은 5승 5패로 팽팽하다. 2014년 둘 간의 첫 대결 이후 양딩신이 3연승으로 앞서갔으나 최근엔 신진서가 3연승하며 균형을 맞췄다. 가장 최근 대결인 10월 28일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준결승에선 신진서가 아슬아슬한 승부 끝에 승리했다.
1998년생으로 신진서보다 두 살 많은 양딩신은 중국 허난성 정저우시 출신의 천재 기사다. 커제에 이어 현 중국 랭킹 2위. 11세에 입단해 2년 후인 13세에 이광배에서 우승하며 중국 내 최연소 타이틀 획득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 기사 중에서도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가 가장 잘돼 있으며, 인공지능과의 착수 일치율도 가장 높다고 알려져 있어 신진서와의 결승전 결과가 주목된다.
바둑TV에서 준결승전을 해설한 이희성 9단은 “양딩신 9단은 장점과 단점이 뚜렷한 기사다. 행마가 유연하며 쉽게 무너지지 않고 두텁게 반면을 운영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전투력과 후반 끝내기는 신진서 9단이 확실히 우위를 점하고 있다”면서 “신진서 9단이 자신이 강한 부분에 집중한다면 LG배 두 번째 우승도 어렵진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주)LG가 후원하는 제26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의 우승 상금은 3억 원, 준우승 상금은 1억 원이다. 제한시간은 각자 3시간에 초읽기 40초 5회씩이 주어진다.
[승부처 돋보기] 신진서 날카로운 잽 한방으로 결승에…
제26회 LG배 기왕전 준결승전 ● 커제 9단 ○ 신진서 9단, 300수 끝, 백 3집반승
#실전1(비극의 씨앗)
본격적인 중반의 시작 단계다. 커제의 흑1은 흔히 쓰는 활용 수법으로 다음 흑A로 몰아 패로 국면을 정리하겠다는 뜻. 하지만 이 장면에서는 엷었다. 흑은 이후 이곳 처리로 인해 비극을 맞게 된다.
#참고도1(우직한 수단)
흑은 헤퍼 보이지만 1로 나가두는 게 좋았다. 백2를 기다려 흑3·5로 활용하는 것이 우직하지만 우세를 지키는 수단. 다음 흑7로 밀어 올렸으면 이 바둑은 커제가 가져갈 공산이 높았다.
#실전2(응수를 묻다)
흑이 ▲로 젖혀 중앙 흑의 안전을 도모한 장면. 이 시점, 인공지능(AI)은 흑59%, 백41%를 나타내고 있었다. 여기서 백1로 붙여간 것이 신진서의 날카로운 잽. 흑의 응수를 물어 다음 공격을 보겠다는 뜻이다.
#참고도2(흑, 연결이 가능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흑은 1의 뻗음이 정수였다. 백2로 위협해도 흑7까지 중앙 흑은 연결이 가능하다.
#실전3(탕웨이싱의 탄식)
흑1이 패착. 중국에서 해설하던 탕웨이싱 9단은 “보통이라면 흑1이 정수지만 지금은 틀렸다”고 탄식했다. 백4가 신진서 회심의 한 수로 다음 A로 막아 중앙을 잡는 수와 B의 침입이 맞보기다.
#실전4(사실상 승부결정)
커제는 흑1로 비틀었지만 여전히 백2가 통렬하다. 흑3·5로 차단했지만 흑11까지 패는 불가피하다. 흑집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패가 났으니 여기서 사실상 승부가 결정되고 말았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