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땅에 헤딩해도 봄날은 온다.
미국에는 전문적인 ‘머니 컨설턴트’가 있다. 이 직업은 사람들에게 부자마인드를 심어주고 부자가 되는 길을 코치해주는 것이다. 이들이 가장 강조하는 말 중의 하나가 “부자가 되겠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미쳐라”라는 것이다.
60년대에 경상도에서 올라와서 서울 남대문 시장에서 두 평짜리 솜이불 가게를 시작한 K씨는 ‘부자가 꼭 되겠다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돈이 없어 병원에 못 가 죽은 조카를 보고 난 후 상경을 결심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돈이 많은 곳으로 가야 했기 때문.
서울에 올라와서 그는 지독한 고생을 했다. 생일날 딱 한 번 ‘계란 두 알’을 먹는 것이 그의 삶에 유일한 낙이었다. 장사를 몇 년 해서 돈이 좀 모였는데, 어느 날 옆 가게의 사람이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급전을 융통해주고 고리를 받았고, 이에 재미를 붙이면서 사채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꼭 돈을 벌겠다는 마음에 장사보다는 사채놀이에 더 열중하게 됐고 급기야는 가게에 있는 시간보다 다방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돈이 필요한 사람들과 만났다. 80년대에 들어서는 아예 가게를 접고 전문 사채업자가 돼서 1백억원 이상의 부동산과 현찰 수십억원을 챙겼다.
하지만 그는 3층짜리 건물에 건평이 1백 평 정도 되는 단독주택에 살면서도 겨울에는 보일러를 안 돌려 온 가족이 이불을 덮고 산다. 그는 아직도 죽은 조카의 혼이 어른거린다고 한다. 하지만 그 덕택에 부자가 되었다.
전라도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도망하다시피 올라온 L씨는 있는 것이라고는 몸에 걸친 옷밖에 없었다. 건장한 신체 덕에 막노동을 해서 돈을 벌 수 있었으나, 잠자리가 없었다. 그는 한 허름한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주인아저씨에게 제안을 했다. “여기 식당에서 밤에 잠 좀 잘 수 있겠냐”는 것. 주인은 “대신에 밤 2~3시에 끝나는 가게 청소를 하라”는 조건을 달았다.
식당에서 의자 다섯 개를 붙이고 잠을 자고, 낮에는 노동판을 전전하였다. 한 3년쯤 그런 생활을 하자 제법 돈이 모였다. 그는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밤 늦게 포장마차에서 팔고 남은 ‘불어 빠진 우동’을 먹는 생활이었지만 그는 “ 반드시 부자가 되고야 만다”는 주문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외워대면서 포장마차를 했다.
어느 날 스포츠센터를 운영하는 한 단골 손님이 그에게 “이번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데 스포츠센터를 인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동안 성실한 L씨를 눈여겨 본 이 손님은 스포츠센터 대금의 10분지 2 정도만 선불을 내고 나머지는 벌면서 갚으라고 하였다. 파격적인 제안에 L씨는 가진 모든 돈을 털어넣고 스포츠센터를 인수했다.
스포츠센터 수입으로 몇 년 후 빚을 모두 갚고는 이후에는 매년 벌어들이는 돈으로 무조건 아파트를 사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오늘날 아파트 다섯 채를 가진 스포츠센터의 부자 사장이 되었다. 마음속으로 ‘부자되겠다’는 결심을 수십만 번 이상 한 후에 얻은 결과였다.
용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역시 가난 때문에 서울로 ‘도망친’ O씨의 사례. 우여곡절 끝에 그는 용산전자상가에 취직했다. 리어카 행상과 배달로 성실하게 일했고, 한 허름한 도매 점포를 맡게 되었다. 용산과 청계천 세운상가에 점포 세 개를 가진 주인아저씨는 매일 등산을 가고, 대신 O씨가 용산의 점포를 맡아서 관리해 나갔다. 엉덩이가 밖으로 다 삐져 나오는 좁디좁은 화장실에 갈 때마다 그는 문고리를 잡고는 “나는 부자가 된다”를 속으로 외워댔다.
도매 매출이 계속 늘자 주인아저씨가 아예 제안을 했다. 테크노마트에 가게를 하나 알아봐 줄 터이니 알아서 키우고 집세만 내라는 것이었다. 강변역 테크노마트의 가게를 맡는 날 그는 하도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나는 부자가 된다”는 일념하에 하루에 열다섯 시간 이상 일을 하였고 그래도 전혀 피곤한 줄을 몰랐다. 하루에 세끼를 먹어대는 라면도 전혀 질리는 줄 몰랐다. 라면을 먹을 때 그는 ‘국내 최고의 재벌인 이병철 회장은 라면 먹고 싶어서 비행기 타고 일본 가서 먹었고, 아들인 이건희 회장도 어떤 때는 하루 세끼를 라면만 먹었다는데 나 또한 그들과 다를 바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스스로 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라면 인생’에서 현재 십억 이상을 강남의 모 은행에 현찰로 맡기는 어엿한 PB 고객이 되었다.
이들은 전부 ‘의지의 화신’들이다. 부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고 달려든 사람들이다. 이런 이들만이 부자가 될 자격이 있다. 우리나라의 전체 부자 중에서 자수성가형 부자가 약 60% 정도 되는데 그 중의 대부분이 위에서 소개한 이들처럼 독한 마음을 먹고 온갖 고생을 다 한 결과로서 부자가 된 것이다.
부자 세미나에서 필자가 청중들에게 “부자가 되고 싶으면 아주 독한 마음을 먹어라”라고 강조를 하면 대부분이 열심히 듣는다. 그러나 막상 강의를 끝내고 대화 시간에서는 대부분이 금방 나약한 마음을 드러낸다. “사실 말이 그렇지, 그게 어디 쉽느냐”는 반문이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필자는 ‘그렇게 나약해서 어떻게 부자가 되려고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대한민국에 있는 부자는 전체 인구의 고작 1~2% 정도다. 아무리 넓게 잡아도 우리나라 전체인구의 5%가 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오늘 태어난 신생아 20명 중에서 수십 년 후에는 단 한명만이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20대 1의 경쟁을 뚫은 사람만이 부자가 될 수 있다.
필자의 말을 잘 믿으려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학교 제자 가운데 필자가 직접 그 과정을 목격한 생생한 실례를 하나 들어주겠다. 시골에서 여고를 졸업하고 서울여대에 들어온 이 제자는 졸업 후 집에서 단 한푼도 받지 않았다. 서울여대를 3년 다니면서 학비, 생활비를 스스로 벌고 그리고 통장에 현찰로 8천만원을 모았다.
그 제자가 어느날 필자에게 제출한 리포트에는 “교수님, 제가 서울여대 들어올 때의 목표가 졸업할 때 아파트를 한 채 산다는 것이었는데, 벌써 3학년인데 아직 8천만원밖에 모으지 못했어요”라고 적혀 있었다. 집에서 한푼도 받지 않고 대학 3년의 학비(약 1천8백여만원), 최소한의 생활비(약 3백60여만원, 월 10만원씩)를 쓰고도 8천만원을 모은 22세의 가냘픈 여대생의 이야기다.
이 제자는 어떻게 돈을 벌었을까? 그녀는 학교에서 근로학생(한 학기에 40만원)을 계속 했고, 편의점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시간당 3천원 정도)를 하였고, 번화가에서 좌판을 펼쳐놓고 액세서리를 팔았고(하루에 약 십만원 정도의 매상) 그리고도 돈이 되는 일은 아르바이트를 쉴 새 없이 하였다. 그녀는 학교 교과서를 샀을까? 아마 전혀 사지 않고, 선배에게 떼를 써서 얻어서 보았을 것이다. 식사는 아침과 점심은 대충 굶고 저녁만을 라면에다가 찬 밥을 말아 먹었을 것이다.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미국의 베스트셀러인 <부자 되는 법>이란 책에는 글이 적혀 있다. ‘부자가 되려는 생각을 열심히 하면, 부자가 되려는 행동이 저절로 나온다’라고. 부자마인드란 부자가 되겠다는 독한 마음이다. 미국의 초강력 베스트셀러의 결론은 ‘부자가 되고 싶으면 독한 마음을 먹어라’라는 것이다.
서울여대 경영학과 교수
<부자도 모르는 부자학개론>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