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유진 국수전·기성전 최정 연파 ‘정면으로 맞선 게 승인’…최정 역시 최고상금 오청원배 우승 ‘건재 과시’
지난 14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 바둑TV스튜디오에서 열린 제5기 한국제지 여자기성전 결승3번기 2국에서 오유진 9단이 최정 9단에게 213수 만에 흑 불계승을 거뒀다. 이로써 결승3번기 1, 2국을 연달아 제압한 오유진은 종합전적 2-0으로 한국제지 여자기성전 우승컵을 차지했다.
#오유진, 변화가 주효했다
하루 전 열린 1국에서 중반 중앙 전투에서 잡은 리드를 끝까지 지켜 선제점을 얻었던 오유진의 기세는 2국으로 이어졌다. 흑을 든 오유진은 초반부터 몸싸움을 마다않는 전투적인 행마로 좌하귀 백 대마를 압박하며 기선을 제압했다. 이후 끝날 때까지 계속된 최정의 집요한 흔들기에도 침착하게 대응, 후반엔 오히려 차이를 더 벌리며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이날 대국으로 두 기사 간의 상대전적은 오유진 기준 6승 26패로 좁혀졌다. 물론 그래도 한참 차이 나는 전적이지만, 올해만 놓고 보면 오유진이 4승 3패로 앞서 있어 이제부터의 승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유진 9단은 대국이 끝난 후 가진 인터뷰에서 “굉장히 강한 선수를 결승전에서 계속 이겨 더 기쁘다”고 말했다. 이어 “예전에는 다음 착점을 선택할 때 좀 더 안전한 수를 더 많이 추구했는데 요즘에는 더 적극적인 수를 찾게 된 것 같다. 내 스스로 정체기가 아닌가 생각했고 스스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변화를 꾀한 것이 좋은 결과로 나오는 것 같다”면서 “첫 판을 이겨 우승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오늘 끝낼 수 있어 다행이다. 앞으로도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오유진의 대국 후 소감대로 최정을 상대로 전투를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친 것이 승인이라는 분석이 많다. 오유진의 기풍은 전투보단 길게 판을 이끌어 후반 끝내기에서 승부를 보는 유형이다. 문제는 이것이 웬만한 기사들에게는 통했지만 최정을 상대로는 언감생심이었던 것.
하지만 여자 국수전과 기성전에서 오유진은 최정의 강수에 주눅들지 않고 정면으로 맞섰다. 과거 둘의 대국은 초반 오유진이 앞서다가 중반 돌이 부딪치면서 최정의 역전승으로 끝나는 것이 패턴이었는데 이번 승부에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당황한 최정이 무리수를 남발하다 계가까지 가지 못하고 불계로 끝난 승부가 많았다.
바둑TV 해설의 이현욱 9단은 “중국의 위즈잉 7단을 제외하고 최정 9단을 이렇게 끝까지 괴롭힌 기사는 없었다”면서 “오유진 9단이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한 단계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줬다. 향후 둘 간의 대결이 더 재미있게 진행될 것 같다”고 분석했다.
#‘최정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편 최정의 여자 기성전 4연패 도전은 무위로 돌아갔다. 여자 국수전 결승전 전까지 여자 기사들을 상대로 29연승을 기록했던 최정은 최근 한 달 사이 오유진에게 4패를 당하면서 2개의 타이틀을 내줬다.
일각에선 “1996년생 최정도 스물다섯이 넘었으니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는 소리도 나왔지만, 최정은 오유진에게 타이틀을 내주는 사이 여자대회 중 가장 상금이 큰 오청원배 세계여자바둑대회에서 우승,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했다. 특히 최정은 오청원배에서 루민취안 6단, 저우홍위 6단, 팡뤄시 4단, 위즈잉 6단 등 중국 여자바둑을 대표하는 신구 기사들을 차례로 꺾고 우승해 4강에도 오르지 못한 오유진, 조승아에 비해 국제무대에서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줬다.
한 바둑 전문가는 “최정의 부진이라기보다는 한국 여자바둑의 수준이 높아진 것으로 분석하고 싶다. 최정은 오유진에게 2개의 타이틀을 빼앗기는 와중에 오청원배 세계대회에서 우승했다. 최정이 못 두는 게 아니라 오유진이나 조승아 등 다른 기사들이 성장하면서 상향평준화 된 것이다. 여기에 2007년생 김은지 2단, 2006년생 정유진 2단의 실력도 출중하기 때문에 이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승부가 된다면 한국 여자바둑의 르네상스가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최정, 오유진, 조승아는 현재 진행 중인 제1회 호반 여자최고기사결정전에서 초대 우승컵을 놓고 불꽃 튀는 경쟁을 펼쳐 주목을 끌고 있다. 호반배는 본선리그를 거쳐 상위 2명이 결승5번기를 치르는데 현재 최정, 오유진, 조승아가 모두 3승 1패를 기록하고 있어 이들 중 결승 진출자가 나올 확률이 크다.
일단 난적과의 대결을 모두 마친 최정의 결승진출이 유력한 가운데, 마지막 라운드에서 맞대결을 벌이는 오유진-조승아 전이 최대 승부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만일 호반배에서 오유진이나 조승아 중 한 명이 다시 최정을 넘는다면 여자바둑도 본격적인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 것이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