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대헌 ‘바람만 스쳐도 실격’ 우려가 현실로…중국 선수 빠진 결승에선 금메달 따내
한국은 지난 7일 중국 베이징 수도체육관에서 열린 쇼트트랙 남자 1000m 경기에서 금메달에 도전할 기회를 사실상 박탈당했다. 한국 남자 쇼트트랙의 간판 황대헌이 준결승에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지만, 심판진은 '황대헌이 1위로 올라서는 과정에서 레인을 너무 늦게 변경했다'는 이유로 페널티를 줬다. 공교롭게도 황대헌이 제친 두 선수는 중국의 런쯔웨이와 리원룽이었다. 둘은 황대헌이 탈락하면서 나란히 결승에 올랐다.
뒤이어 경기한 이준서 역시 조 2위로 들어왔지만, 심판진은 다시 비디오 판독을 통해 '이준석이 류 사오린 산도르(헝가리)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무리하게 레인을 바꿨다'고 판정했다. 그 결과 이준서가 실격되고, 탈락 위기에 놓였던 중국의 우다징이 조 2위로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은 중국 선수 3명과 중국계 혼혈 선수 2명(헝가리의 류 사오린·류 사오앙 형제)의 대결로 치러졌다.
#'블루투스 터치'로 예견됐던 홈 텃세
쇼트트랙에서 중국의 홈 텃세는 어느 정도 예견됐던 장애물이었다. 쇼트트랙은 중국이 세계 정상권을 유지하고 있는 종목인 데다 심판이 경기 결과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은 지난 5일 2000m 혼성 계주 금메달을 따는 과정에서 이미 판정 논란을 일으킨 참이었다. 준결승전에서 벌어진 '블루투스 터치' 사건이 문제였다.
중국은 당시 헝가리와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결승선을 통과해 B 파이널(5~8위 결정전)로 내려가는 듯했다. 하지만 심판진은 무려 10여 분간 비디오 판독을 실시했다. 이후 미국과 ROC(러시아올림픽위원회)가 실격되고, 중국이 헝가리에 이어 2위로 결승에 올랐다.
이상한 결과였다. 피니시 라인까지 13바퀴를 남기고 3위로 달리던 중국은 주자가 장위팅에서 런쯔웨이로 바뀌는 과정에서 제대로 터치를 하지 못했다. ROC 선수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서다. 쇼트트랙 계주에선 신체 어느 부위든 접촉하기만 하면 선수 교대로 인정하지만, 장위팅은 런쯔웨이와 손끝 하나 닿지 않았다.
여러 선수가 엉키는 쇼트트랙 계주 특성상 선수 교대시 다른 팀 선수 때문에 터치를 하지 못할 경우 기존 주자가 예외적으로 반 바퀴를 더 돈 뒤 터치하고 경기를 이어갈 수 있는 규칙이 있다. ROC 선수의 방해를 받았다 해도 원래 달리던 장위팅이 반 바퀴를 더 돈 뒤 정상적으로 터치하고 런쯔웨이와 교대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거란 얘기다. 하지만 중국은 그대로 경기를 이어갔고, 실격 처리 없이 무사히 결승에 나갔다. 형평성 논란이 불거질 만하다.
한국 쇼트트랙의 맏형 곽윤기는 지난 6일 공식 연습을 마친 뒤 "현장에서 경기를 봤는데, 3개국이 모두 실격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뒤에서 보던 네덜란드 선수들도 같은 말을 했다. 비디오 판독이 길어지면서 '설마' 하는 생각이 들던 차에 두 팀만 떨어지고 한 팀은 남는,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가 나왔다"고 했다. 이어 "계주 경기 때 선수끼리 터치가 안 된 상황에서 그대로 결과가 인정된 것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일이다. 다른 나라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결승에 오를 수 있었을까. 한국 대표팀과는 관계없는 판정이었지만, 우리가 당사자가 됐다면 너무나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가뜩이나 중국 선수들은 공격적인 레이스를 펼친다. 일부 선수는 예전부터 반칙성 플레이로 악명도 높았다. 한국 선수들이 중국의 홈 어드밴티지를 의식하는 게 당연하다. 곽윤기는 "지난해 10월 1차 월드컵 때 이미 한 차례 (중국의 홈 텃세를) 경험했다. 선수들끼리 '바람만 스쳐도 실격할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눌 정도로 판정에 대해서 예민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황당한 실격 판정으로 탈락한 한국
우려는 끝내 현실이 됐다. 혼성 계주 이틀 뒤 열린 남자 1000m 준결승 두 번의 레이스에서 거듭 중국 선수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판정이 나왔다. 중국이 가장 견제하는 한국은 두 번 모두 피해자였다.
1조에서 실격 처리된 황대헌의 레이스는 흠잡을 데 없었다. 준결승을 3위로 출발한 황대헌은 결승선을 4바퀴 남기고 인코스로 절묘하게 파고 들면서 중국의 런쯔웨이와 리원룽을 모두 제쳤다. 놀라운 스피드로 순식간에 인코스를 꿰차 중국 선수 둘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황대헌은 이후 1위 자리를 유지하며 그대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하지만 심판진은 앞서 언급한 이유로 페널티를 줬다. 이정수 KBS 해설위원이 "전 세계적으로도 박수를 받을 만한 경기 운영과 플레이였다. 한국 선수들만 보여줄 수 있는 영리한 스킬이었다"고 칭찬한 기술이 순식간에 '실격 행위'로 뒤바뀌었다.
심지어 남자 1000m 준결승 직후 열린 여자 500m 결승 경기에서는 이탈리아의 '쇼트트랙 전설' 아리아나 폰타나가 황대헌과 똑같은 전략으로 금메달을 땄다. 폰타나는 첫 3바퀴까지 2위를 유지하며 레이스를 이어가다 마지막 한 바퀴 반을 남기고 전광석화처럼 인코스로 치고 나가 선두 자리를 빼앗았다. 안상미 MBC 해설위원은 "황대헌의 작전은 여자 500m 결승 때 폰타나가 보여준 장면과 똑같다. 그런데 한 명은 페널티를 받고, 한 명은 금메달을 땄다"고 꼬집었다.
이준서의 실격도 석연치 않았다. 그는 류 사오린에 이어 두 번째로 결승선을 통과했지만, "레인을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바꾸는 추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며 페널티를 받았다. ISU 국제심판인 최용구 쇼트트랙 대표팀 지원단장은 "이준서는 인코스로 정상 추월했고, 오히려 뒤에 있던 류 샤오앙과 우다징이 부딪혔다. 영상을 보면 우다징의 손이 류 샤오앙의 엉덩이에 닿았고, 류 사오앙이 중심이 흔들려 넘어지는 과정에서 이준서와 충돌했다. 오히려 두 선수가 실격을 받아야 한다"고 짚었다.
이뿐 아니다. 결승전에서도 중국에 유리한 판정이 이어졌다. 류 샤오린이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고, 런쯔웨이는 결승선 바로 앞에서 류 사오린의 팔을 잡아당기며 저지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또 판독 시간이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한참 후 경기장 전광판에 뜬 금메달리스트는 류 사오린이 아닌 런쯔웨이였다. "류 사오린이 경기 도중 두 차례 런쯔웨이의 진로를 방해하는 위험한 플레이를 했다"는 게 이유였다. 결승선 앞에서 상대 선수의 팔을 당긴 런쯔웨이의 '비매너'는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경기장 옆에서 지켜보던 다른 국가 선수단까지 야유를 퍼붓는 가운데, 런쯔웨이는 홀로 금메달의 '감격'을 만끽했다. 또 다른 중국 선수 리원룽은 3위로 들어왔지만,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반면 납득하지 못할 이유로 눈앞에서 금메달을 놓친 류 사오린은 한동안 경기장을 떠나지 못한 채 아쉬움을 삼켰다.
#외신도, 다른 선수들도 놀랐다
한국과 헝가리에만 이상한 상황은 아니었다. 해외 주요 언론도 경기 후 관련 논란을 비중 있게 다뤘다. 뉴욕타임스는 황대헌과 이준서의 실격 상황을 상세히 전하면서 "쇼트트랙에선 심판 판정이 중요하고 실격 사례에 일반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남긴 하지만, 이번 올림픽은 특히 중국 선수들에게 유리해 보이는 판정으로 중국이 금메달 2개를 얻었기 때문에 주목을 받고 있다"고 했다. 또 혼성 계주 준결승에서 벌어진 일도 언급하면서 "미국 선수들은 갑작스러운 페널티에 어리둥절했다"고 썼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베이징 올림픽에선 비디오 판독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서 리플레이 재생 전까진 공식 결과를 알 수 없다"고 꼬집었고, AP 통신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결승전"이라며 "류 사오린은 레이스 후반 선두를 달리던 런쯔웨이와 충돌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 런쯔웨이는 류를 붙잡았다. 그런데 심판은 류에게만 페널티를 줬다"고 전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JusticeForKorea(한국을 위한 정의)와 #JusticeForHungary(헝가리를 위한 정의)란 해시태그가 빠르게 번졌다. 많은 이용자가 중국의 홈 텃세에 당한 한국과 헝가리 선수들에게 지지를 표한 것이다. 다른 나라 쇼트트랙 스타들도 비판에 가세했다. 2009년 세계선수권 우승자인 라이언 베드퍼드(미국)는 트위터에 "ISU와 중국 사이에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 이번 판정들은 끔찍하다"고 올렸다. 캐나다 쇼트트랙 스타 샤를 아믈랭은 류 샤오린의 인스타그램에 "챔피언의 소감이네!"라는 댓글을 달았다. 남자 1000m의 진짜 '챔피언'은 런쯔웨이가 아니라는 암시다.
물론 가장 억울한 사람은 완벽한 레이스를 하고도 실격 당한 황대헌이다. 그는 다음 날인 8일 "다른 선수들과 몸이 전혀 닿지 않았는데도 이런 판정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며 "화가 많이 나지만, 남은 경기가 많으니 잘 먹고 잘 자려고 한다. 응원해 주시는 국민이 많아 든든하다"고 애써 허탈함을 달랬다.
준준결승에서 왼손을 크게 다쳐 준결승에서 기권한 박장혁도 "1차 월드컵 때 (편파판정을) 느껴서 예상을 하고 준비했는데도 솔직히 이 정도까지는 생각을 못했다. 정말 당황스럽다"며 "선수들이 해탈한 기분을 느낄 정도로 판정이 과했다. 남은 종목에서 다시 최선을 다하자고 선수들끼리 다짐했다"고 털어놨다.
#한국 선수단의 거센 반발, 효과 봤나
이례적인 편파 판정에 한국 선수단은 거세게 반발했다. 윤홍근 한국 선수단장은 경기 다음 날인 8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피땀 흘린 쇼트트랙 선수들의 4년을 지켜내지 못한 점에 대해 선수단을 대표해서 사죄한다. 죄송하다"며 "스포츠는 페어플레이가 담보되어야 한다. 이 경기를 지켜본 전 세계 80억 인류 전원이 심판"이라고 역설했다.
윤 단장은 또 "재발 방지를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겠다. 경기 직후 현장에서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고, ISU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항의서한을 보냈다"고 했다. 금메달을 잃은 헝가리도 한국처럼 곧바로 ISU에 공식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ISU는 "연맹 규정에 근거해 주심의 판정에 대한 한국과 헝가리 대표팀의 이의 제기를 받아들이지 않겠다. 경기 규칙 위반에 따른 실격 여부에 대한 심판의 판정에는 항의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대한체육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번 의혹을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제소한다는 방침이다.
물론 CAS 제소가 실질적인 힘을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한국은 2004 아테네 여름올림픽 체조 양태영 오심 사건으로 CAS 문을 두드린 바 있다. 당시 양태영은 남자 개인종합에서 0.049점 차로 밀려 은메달에 그쳤다. 심판이 가산점 0.2점을 0.1점으로 처리한 게 문제였다. 국제체조연맹(FIG)이 오심을 인정했지만, CAS가 "심판 실수에 따른 결과는 번복 대상이 아니다"라고 결정해 금메달을 되찾아오지 못했다. 한국은 이후에도 몇 차례 판정 논란과 관련해 CAS 제소를 검토하다가 "판정에 부정이 개입했거나 의도적인 잘못이 아니면 심사 대상이 아니다"라는 국제변호사 조언에 따라 포기했다.
체육회 역시 이런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소를 결정한 건 남은 종목에서 또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논란을 줄이겠다는 의지다. 최 지원단장은 "명백한 오판이라 해도 심판진의 권위를 고려해 ISU가 잘못을 인정하진 않을 거다. 다만 (공식 항의와 CAS 제소 등이) 남은 종목에서 논란의 여지를 줄이는 데 영향을 줄 거라고 본다"고 했다. 윤 단장도 "경각심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 선수들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대한체육회는 더 나아가 남자 1500m 경기를 앞둔 9일 오전 ISU 회장을 포함한 고위 관계자들과 화상 면담을 진행했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과 윤 단장 등이 직접 면담 대표로 나서 "그날의 판정은 편향됐으며 잘못된 판정으로 한중관계 악화가 우려된다"고 거듭 유감을 표현했다. 또 "한국 국내 여론이 매우 좋지 않다. 재발 방지를 촉구한다. 곧 열리는 남자 1500m 경기를 예의주시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공교롭게도 그날 밤 열린 1500m에선 중국 선수 3명이 모두 결승에 오르지 못했다. 쑨룽은 준준결승, 런쯔웨이는 준결승에서 각각 반칙으로 페널티를 받아 실격됐다. 장톈위는 준준결승 경기 도중 넘어져 4위로 들어왔지만, 심판진이 비디오 판독 없이 그대로 순위를 확정해 탈락했다.
중국 선수가 모두 빠진 이날 결승에는 무려 10명의 선수가 출전했다. 준결승 3개 조 1·2위 6명과 상대 페널티로 구제받은 선수 4명이 한꺼번에 레이스를 펼쳤다. 그런데도 넘어지거나 실격 처리된 선수가 나오지 않았다. 비디오 판독도 필요 없었다.
1500m는 쇼트트랙 개인전 중 최장거리 경기다. 선두로 나서면 바람을 안고 달려야 해 체력 소모가 크다. 하지만 황대헌은 뒤에서 기회를 노리다 8바퀴를 남기고 단숨에 아웃코스로 치고 나가 선두로 올라섰다. 몸싸움을 최대한 피하고, 힘과 지구력으로 버텼다. 막판 거센 추격을 받았지만, 흔들리지 않고 1위 자리를 지켰다. 기량이 압도적이었기에 가능한 결과다. 그렇게 황대헌은 개막 닷새 만에 한국 선수단에 첫 금메달을 안겼다. 논란도, 의혹도 없는 '클린 금메달'이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