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항저우행 승선 ‘젊은피’ 예비명단 131명 확정…‘와일드카드’ 예비 27명 중 3명 차출 과정 잡음 가능성
2008년 베이징올림픽 전승 금메달로 르네상스를 맞았던 한국 프로야구는 지난해 도쿄올림픽에서 충격적인 현실과 맞닥뜨렸다. 13년 만에 야구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부활했는데, '디펜딩 챔피언'인 한국이 일본·미국·도미니카공화국에 잇따라 패해 메달 없이 빈손으로 돌아온 것이다. 곧바로 한국 야구 위기설이 고개를 들었고, 실제 KBO리그 TV 중계 시청률과 인터넷·모바일 중계 접속자 수가 예년에 비해 확연히 줄었다는 집계가 나오기 시작했다. 국민적인 관심을 끌어 모으는 국제대회에서 경쟁력이 프로야구 흥행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다시 한 번 보여준 셈이다.
이뿐 아니다. 한국 야구 대표팀은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고도 A 선수의 병역 대체복무 혜택을 둘러싼 논란으로 홍역을 치렀다. "A가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합류하기 위해 고의로 입영을 연기했고, 당시 국가대표 사령탑이던 선동열 감독의 선택을 받아 손쉽게 뜻을 이뤘다"는 게 비난 여론의 골자였다. 그 여파로 선 감독이 자진 사퇴했고,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차출 규정에도 대대적인 변화가 생겼다. 일본이 프로야구 선수를 파견하지 않는 대회에 한국만 최정예 대표팀을 보내는 게 무의미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결국 젊은 유망주들을 중심으로 한 대표팀을 꾸리고, 아시안게임 기간에도 KBO리그 정규시즌을 중단하지 않기로 했다.
#새 사령탑 류중일 감독
초대 선동열 감독, 제2대 김경문 감독에 이은 제3대 국가대표 감독은 류중일 전 LG 트윈스 감독이 맡았다. 류 감독은 지난 3월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경기력향상위원회 회의를 통해 항저우 아시안게임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됐다. 화려한 선수 경력과 지도자 경력을 자랑하는 야구인들이 대표팀 감독에 지원했지만, 류 감독이 국가대표팀 운영 계획과 경기 운영 능력, 지도 통솔력 등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류 감독은 설명이 필요 없는 지도자다. 현역 시절 삼성 라이온즈에서 명 유격수로 이름을 날린 류 감독은 삼성 감독이던 2011~2014년 정규시즌·한국시리즈 통합 4연패를 이끌며 명장 반열에 올랐다. 2015년에는 한국시리즈 우승에 실패했지만, 정규시즌 1위 자리는 놓치지 않았다. 2016시즌을 끝으로 삼성 감독에서 물러난 뒤, 2018년부터 LG 지휘봉을 잡았다. 2019년과 2020년 연속 정규시즌 4위에 올라 가을 야구를 경험했다. 2013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감독과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감독을 맡아 국가대표팀을 지휘한 경력도 있다. 지난 시즌엔 현장을 떠나 모교 경북고에서 인스트럭터로 활동하다 역대 세 번째 대표팀 전임 사령탑에 올랐다.
류 감독은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된 직후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는 건, 선수 때나 지도자가 된 후에나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 책임감과 부담감을 느낀다"며 "일단 성적을 내야 한다. 선수 선발에서도 많은 분이 이해할 만한 과정을 거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류 감독은 또 "당연히 목표는 금메달이다. 최근 국제대회 결과로 아쉬워하는 팬들께 결과를 보여드려야 한다"며 "대표팀 코치진, KBO 기술위원회,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등과 잘 상의해 정말 뛰어난 젊은 선수, 미래의 스타가 될 선수를 뽑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류 감독과 함께 아시안게임 선수단을 이끌 코칭스태프 면면도 화려하다. 최일언 투수코치, 박경완 배터리코치, 이병규 타격코치, 이종열 수비코치, 정수성 작전코치, 김현욱 불펜 및 컨디셔닝코치가 항저우에 함께 간다. 류 감독은 "코로나19 여파로 팬들이 야구장을 잘 찾지 못하면서 선수들도 흥과 집중력이 떨어진 것 같다. 이런저런 문제로 한국 야구 인기가 떨어졌다는 말에 안타까움도 느꼈다"며 "과정과 결과, 미래까지 생각해 대표팀을 이끌겠다. 한국 야구가 다시 팬들에게 희망을 드리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첫 관문은 '선수 선발'이다. 류 감독은 "24세 이하 선수로 대표팀을 꾸리니 KBO리그의 미래를 책임질 선수를 발굴하고 성장하게 해야 하는 과제도 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선발된 젊은 선수들이 '성공'을 체험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서는 기쁨을 젊은 선수들이 누리게 하고 싶다. 또 항저우 대회를 통해 KBO리그의 스타가 탄생했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젊은 대표팀 떠받칠 와일드카드는?
류 감독과 KBO 기술위원회가 꾸린 대표팀 예비 명단에는 프로야구 선수 158명이 포함됐다. 24세 이하 또는 입단 3년 차 이하 선수 131명과 와일드카드 후보 27명이다. 포지션은 투수 86명, 포수 12명, 내야수 34명, 외야수 26명으로 이뤄져 있다. 이들 외에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와 KBO리그 각 구단 스카우트팀이 함께 추천한 아마추어 투수 14명도 대한체육회에 제출한 예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KBO는 "기량이 뛰어난 젊은 선수들이 국제대회 경험과 성과를 통해 더 큰 성장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KBO리그에서 더욱 높은 수준의 경기력을 팬들에게 선보일 수 있도록 대표팀 선수 육성과 성과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선수단 구성에 중점을 뒀다"고 선발 원칙을 설명했다. 올해 스프링캠프와 시범경기 등의 성적을 기준으로 국가대표 결격 사유가 없는 선수들을 예비 엔트리에 넣었다.
구단별로는 한화 이글스 선수가 21명으로 가장 많다. 지난해 도쿄올림픽 대표팀 유력 후보로 거론되다 최종 엔트리에 들지 못했던 투수 강재민, 내야수 정은원·노시환 등 팀 주축 선수가 모두 포함됐다. 그 다음으로는 롯데 자이언츠(19명), 키움 히어로즈(18명), LG·삼성(이상 17명), NC 다이노스(15명), SSG 랜더스(13명), KIA 타이거즈(12명) 순이다. 지난해 한국시리즈에서 맞대결한 두산 베어스와 KT 위즈는 나란히 10명으로 가장 적은 예비 엔트리를 배출했다. KT에선 2020년 신인왕 소형준과 간판 타자 강백호 등이 포함됐고, 두산에선 투수 곽빈과 내야수 안재석 등 1군 주축 멤버들이 이름을 올렸다.
와일드카드는 경험이 많고 대표팀 취약 포지션을 메우면서 젊은 선수들의 리더 역할도 할 수 있는 선수들을 후보로 선택했다. 총 3명 선발할 계획인데, 아시안게임 기간에도 KBO리그가 계속 진행되는 점을 고려해 구단당 최대 한 명까지만 뽑기로 했다.
투수는 고영표·배제성(이상 KT), 이영하·최원준(이상 두산), 김광현·박종훈(이상 SSG), 김원중·박세웅(이상 롯데), 양현종(KIA), 김민우(한화)가 이름을 올렸다. 포수는 양의지(NC), 강민호(삼성), 유강남(LG), 박동원(키움), 최재훈(한화), 박세혁(두산)이 후보다. 또 내야수 심우준(KT), 오지환(LG), 하주석(한화)과 외야수 구자욱(삼성), 김현수·박해민·홍창기(LG), 한유섬(SSG), 박건우·손아섭(NC), 나성범(KIA)도 와일드카드로 뽑힐 수 있다. 최지만(탬파베이 레이스), 박효준(피츠버그 파이어리츠) 등 메이저리그(MLB)에서 뛰고 있는 해외파 선수는 제외됐다.
아직은 예비 엔트리라 파장이 크진 않지만 향후 와일드카드 선발 과정에서 잡음이 생길 여지는 있다. 아시안게임이 열리는 9월은 각 팀 순위 경쟁이 한창인 시기라 각 구단이 투타 기둥 선수를 대표팀으로 차출하는 것에 부담을 느낄 수 있어서다. 10개 구단 단장이 실행위원회에서 "대표팀 요청이 있다면 선수의 비중을 따지지 않고 와일드카드로 보내준다"는 내용에 합의했지만, 당장 1승이 아쉬울 때 에이스나 4번 타자를 내주고 싶어할 팀은 없다. 순위 경쟁팀 전력이 큰 변동 없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더 그렇다.
류중일 감독은 일단 "선발 투수와 포수가 부족한 것 같다. 그 자리를 와일드카드로 메워야 할 것 같다"는 의중을 내비쳤다. 김광현·양현종과 같은 기존 국가대표 에이스급 투수는 당연히 1순위 후보다. 젊은 투수들로 구성될 대표팀 마운드를 안정적으로 지탱하려면 강민호·양의지 등 공수를 겸비한 베테랑 포수도 필요하다. 다만 이 선수들을 대표팀에 다시 선발하는 건 '세대교체'를 내세우는 아시안게임 대표팀의 모토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이들의 대표팀 차출을 반대할 구단들에는 좋은 명분도 된다. 대표팀이 '야구 인기 회복'과 '젊은 대표팀의 당위성' 사이에서 갈등할 시간이 머지않았다.
#신인 선수 22명도 대거 포함
프로에 입단하자마자 태극마크의 꿈을 꿀 수 있게 된 특급 유망주들이 데뷔 첫 시즌을 치르고 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대표팀 예비 엔트리에 이름을 올린 신인 선수는 총 22명. 투수는 박영현·이상우(이상 KT), 조원태(LG), 노운현·주승우(이상 키움), 윤태현(SSG), 박동수·조민석(이상 NC), 이민석·진승현(이상 롯데), 최지민(KIA), 문동주·박준영(이상 한화)이다. 포수 중엔 안현민(KT)과 허인서(한화), 내야수 중엔 이재현(삼성)과 김도영·윤도현(이상 KIA), 외야수 중엔 김동준(두산), 김재혁(삼성), 박찬혁(키움), 조세진(롯데)이 각각 이름을 올렸다.
이들 중 올해 1군 개막 엔트리에 이름을 올린 선수는 박영현, 이재현, 김재혁, 노운현, 박찬혁, 윤태현, 조민석, 조세진, 김도영, 최지민, 박준영 11명이다. 기대 이상으로 활약한 선수가 있는가 하면, 아직 성장통을 겪고 있는 선수도 있다. 분명한 건 이들 모두 팀에서 큰 기대를 걸고 지켜보는 유망주라는 점이다.
가장 낯선 이름인 조민석은 개막 엔트리에 든 신인 중 유일한 대졸 선수다. 개막 엔트리에 든 11명 중 9명이 1차 지명 혹은 2차 1~2라운드 지명을 받았는데, 조민석만 2차 9라운드에 이름이 불렸다. 유명세는 가장 떨어질지 몰라도 생존력은 그 이상이다.
개막 엔트리에 든 선수 중 3~4명은 얼마 지나지 않아 2군으로 내려가야 할 운명이다. 다음 경기 선발 투수들이 한 명씩 엔트리에 등록되면서 자연스럽게 기존 선수 한 명이 자리를 내줘야 하기 때문이다. 조민석은 그런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다. 아직 불펜 필승조는 아니지만, 추격조로 나름의 경쟁력을 보여줬다. NC에선 "변화구 구사 능력이 실전급이다. 스피드도 나쁘지 않고, 싸움닭 기질이 있다"며 그의 가능성을 높이 샀다.
가장 큰 기대를 모았던 '제2의 이종범' 김도영은 아직 숨을 죽이고 있다. 시범경기 타격왕에 오르면서 돌풍을 일으킨 그는 지난 2일 개막전 리드오프로 출격했지만, 개막 후 6경기에서 안타 없이 침묵했다. 7번째 경기인 지난 9일 SSG전에서야 김광현을 상대로 데뷔 첫 안타를 쳤다. 하지만 그 후 두 경기에서 다시 안타를 치지 못해 타율이 0.071까지 떨어졌다. 결국 14일 롯데전에 데뷔 후 처음으로 결장했다. KIA는 슈퍼 루키 김도영이 시행착오를 이겨내고 잠재력을 터트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KT 차기 마무리 투수로 꼽히는 투수 박영현도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지난 3일 삼성전 9회 말 3-3 동점 상황에서 처음으로 마운드에 올랐다가 결승타 포함 연속 3안타를 맞고 3실점했다. 그래도 이강철 KT 감독은 "긴장하지 않고 자기 공을 던졌다. 앞으로 주축 불펜 투수로 기용하겠다"고 힘을 실어줬다. 박영현은 다음 경기에서 무실점을 기록하는 등 점점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각 팀이 전략적으로 키우는 신인 야수들도 조금씩 존재감을 보인다. 롯데 조세진과 키움 박찬혁, 삼성 이재현이 대표적이다. 조세진은 지난 7일 NC전 7회 1사 만루에서 2타점 결승 적시타를 때려냈다. 래리 서튼 롯데 감독은 "신인 선수가 타석에서 자신이 노리는 공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 굉장히 성숙하다고 생각했다"고 호평했다. 타율은 썩 높지 않지만 '포스트 이대호'로 성장할 만한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다.
개막전 멀티 히트로 눈도장을 찍은 키움 박찬혁은 지난 10일 삼성전에서 올해 신인 중 가장 먼저 홈런을 터트렸다. 3할에 육박하는 타율도 9번 타자로는 나쁘지 않은 성적이다. 박병호가 떠난 키움에서 미래의 중심 타자가 될 재목으로 꼽힌다. 이재현은 코로나19로 삼성 주축 선수가 대거 이탈한 시즌 초반, 내야 주전으로 활약하면서 공·수·주 모두 고른 기량을 보였다. 김재혁도 거침없는 스윙으로 눈도장을 받았다.
반면 시범경기에서 독특한 투구 폼으로 화제를 모은 키움 언더핸드 투수 노운현은 첫 등판에서 4안타를 맞고 2군에 내려갔다. KIA 왼손 투수 최지민도 2경기에서 5점을 내준 뒤 2군에서 재정비를 하기로 했다. SSG 1차 지명 투수 윤태현과 한화 2차 1라운드 지명 투수 박준영은 데뷔전도 치르지 못하고 엔트리에서 빠졌다. 아직 1군 무대를 밟지 못한 다른 예비 엔트리 신인들과 함께 '대표팀 쇼케이스' 기회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스프링캠프 불펜 피칭에서 시속 155km 강속구를 던져 화제를 모았던 한화 문동주는 옆구리 통증으로 재활을 하다 최근 다시 공을 잡았다. 5월 1군 데뷔를 목표로 서서히 투구 준비를 하고 있다. 아직 프로에서 공을 하나도 던지지 않았지만 대표팀 코칭스태프가 예의주시하는 특급 후보 중 하나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