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발성 김민정 아나운서 도움 받아…엄마 역 이혜영의 찐팬 ‘애증 케미’ 짜릿~
“스릴러 장르를 제가 꽤 했더라고요. 밀도 높은 작품을 좋아하기도 하고, 배우라는 직업인으로서 경력이 쌓일수록 성숙한 모습도 보여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시점이었어요. 터닝 포인트까지는 아니어도 변신하고 싶었어요. 저는 늘 선배님들과 작품하면서 제 스스로가 항상 어리고, 부족하고, 미흡하고, 배워가는 입장이라고 생각해 왔거든요. 그러다 이번에 프로다운 면모를 한 번 보여주면 어떨까 싶어서 이번 작품을 선택하게 됐죠.”
극 중 천우희가 맡은 세라는 방송국의 간판 앵커로 선배인 남자 앵커와 함께 수년째 메인 뉴스를 담당하고 있는 능력자다. 겉으로 보기엔 완벽하고 화려해 보이지만 기자 생활을 거치지 않아 앵커보다는 아나운서에 가깝다는 지적을 받고, 언제든 젊은 후배로 교체될 수 있는 ‘남자 앵커의 파트너’라는 뒷말을 들으며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백조형’ 캐릭터이기도 하다. 속은 문드러지고 있지만 겉으로는 고고하고 완벽한 앵커로서의 모습을 지켜야 하는 세라를 연기하기 위해 천우희는 목소리의 톤부터 바꿔야 했다고 말했다.
“딕션이나 발성 연습이 어렵지는 않았는데, 연기 발성하고 아나운서 발성이 확실히 다르다는 걸 알았어요. 현장에서 김민정 아나운서가 도와주셔서 고칠 수 있었는데 이렇게 발성 차이가 난다는 것에 자괴감도 느꼈죠(웃음). 앵커의 바른 자세와 표정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요. 세라의 경우는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의상의 색이라든가 표정, 화장, 머리 모양 같은 게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변화하는데 뒷부분을 보면 그런 게 확실히 드러나거든요. 그런데 한번은 GV(감독, 배우가 상영관을 방문해 관객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갖는 시사회 이벤트) 때 그런 세라의 모습이 촌스러워 보인다는 말이 나왔어요. 그 촌스러움 의도한 거거든요(웃음)!”
메인 앵커 자리를 놓지 않으려는 세라의 강박은 특종에 대한 욕심으로도 이어진다. 뉴스 생방송 5분 전, 방송국으로 걸려온 살인 사건 예고 전화를 받은 세라는 ‘진짜 앵커’가 되기 위해 경찰보다도 먼저 제보자의 집을 방문했다가 제보자 모녀의 시신을 발견한다. 이후 특종을 직접 취재한 집념의 앵커라는 찬사를 받지만, 세라의 내면에 잠재돼 있던 강박증이 욕망을 먹고 자라면서 점점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사실 세라가 가진 작은 강박증보단 그 캐릭터의 야망, 욕망, 성취욕, 애정 욕구가 더 크게 외부로 발산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관객들이 이 캐릭터에게 가질 호감과 연민, 그리고 당위성이 더 부여될 테니까요. 제가 이제까지 강한 캐릭터도 최대한 섬세하게 표현하려 하고 복합적인 감정을 표현해 왔다면 이번엔 굉장히 직선적으로 연기했어요. 그걸 통해서 ‘앵커’라는 작품의 장르가 가진 것도 잘 표현될 것 같고, 세라에 대한 충분한 연민이 생길 것 같았거든요.”
세라의 완벽을 향한 갈망을 부추기는 것은 그의 엄마(이혜영 분)다. 따뜻한 응원과 칭찬 대신 더 노력하고 더 앞서 나가길 바라며 채찍질하는 엄마는 세라를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쥐락펴락하기를 원한다. 피로 엮여 있기에 너무나도 사랑스럽지만 동시에 증오스러울 수 있는 모녀 관계가 더 팽팽한 긴장 속에 부각되는 데엔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천우희·이혜영 배우의 연기 덕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 이혜영의 팬으로 그가 출연한 연극 작품까지 섭렵했다는 천우희 역시 좋은 연기 합의 덕을 이혜영에게 돌렸다.
“정말 카리스마 넘치는 분이세요. 저와 선배님이 같이 나오는 신을 촬영하는데 제가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머릿속에 구상한 이미지나 제스처가 있었거든요. 서로 의견을 나누지도 않았는데 촬영 때 선배님이 그 제스처를 하시더라고요. 서로 모녀 사이를 연기하는데 뭔지 모를 공감이 짜릿하게 느껴졌어요(웃음). 저는 선배님의 팬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선배님이 카메라에 담기는 그 모습 하나하나가 모두 인상적으로 느껴지더라고요. 얼굴 골격이나 표정, 그냥 가만히 계시는 모습까지도 멋있어서 저는 옆에서 가만히 지켜봤어요(웃음).”
누군가는 ‘앵커’ 속 모녀 관계를 보고 “영화적 상상을 위해 과도하게 왜곡됐다”고 언짢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터다. ‘앵커’뿐 아니라 종종 강압적이고 강박적인 모녀 또는 부자 관계를 다룰 때마다 현실적과 비현실적의 경계를 뚜렷이 나누려는 관객들의 움직임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이런 지점에 대해 천우희는 ‘앵커’ 속에서 그려진 모녀 관계가 단순히 현실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껏 우리들이 간과해 온 모성애 신화에 대한 또 다른 시각임을 지적했다.
“보통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은 항상 모성애가 넘치는 모습이죠. 저는 그런 단면적인 모습이 어쩌면 우리가 여성에게서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어요. 모녀는 사랑하면서도 집착하는 애증 관계라서 항상 마냥 이해하고 배려할 순 없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처음부터 엄마가 엄마로 태어난 게 아니란 걸 간과하는 것 같아요. 엄마도 엄마로서, 여자로서, 인간으로서의 삶이 있는데 언제부턴가 그걸 한 사람에게 다 부여시키는 거죠. ‘앵커’에서 보이는 모습도 굉장히 극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감정 자체는 보편적이라고 생각해요.”
한편으로 여성 관객들에게 ‘앵커’가 좀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 영화가 그간 보기 어려웠던 ‘여성 서사’를 재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대유행)으로 영화계가 얼어붙었던 2020년부터 상업영화에서 여성의 이야기만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등장한 ‘앵커’의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주연인 천우희는 작품을 바라보며 어떤 의무감 같은 걸 느끼지는 않을까. 질문에 그는 “제가 의무감을 갖고 싶어도 부여를 안 해주시잖아요”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저는 많은 부분을 공감해요. 여성 서사가 적을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문제도 물론 잘 알고 있고요. 한편으론 어떤 젠더 이슈로 나눠서 그 비중을 굳이 늘려야 한다는 생각은 또 아니에요. 완성도 있는 작품을 내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여성 서사에 대해 세밀하게 쓰고 연출할 수 있는 분들이 많이 나오셨으면 좋겠어요. 여성 서사 작품이 나올 때 물론 제 연기를 완성도 있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언제부턴가는 흥행적인 면도 보지 않을 수 없으니 그저 잘 되길 바랄 뿐이에요. 하나가 잘 돼야 그 이후에도 좋은 작품들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