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올림픽 키즈’ 성장으로 광속구 투수 증가…강지광·이태오 등 제구력 불안으로 팀에 안착 못해
같은 날 일본 프로야구(NPB)에선 사사키 로키(21·지바롯데 마린스)가 최고 164㎞, 평균 158㎞의 직구를 앞세워 17이닝 연속 퍼펙트를 달성했다. 8회가 끝난 뒤 교체돼 세계 최초의 2경기 연속 퍼펙트게임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포크볼이 140㎞대 중반까지 나오는 괴력을 뽐내 전 세계 야구팬을 들썩이게 했다.
#한국도 시속 160㎞ 투수 나올까
한국 프로야구에선 아직 이들처럼 시속 160㎞ 강속구를 자유자재로 던지는 선발 투수가 나오지 않았다. 단국대에서 투수 역학 박사학위를 딴 최원호 한화 이글스 퓨처스(2군) 감독은 "MLB와 NPB는 역사와 인프라, 노하우 면에서 KBO리그와 큰 격차가 있다"며 "머지않아 KBO리그에도 시속 160㎞를 찍는 투수가 나타나겠지만, 프로에서 무기로 쓸 만한 경쟁력을 갖추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미국이나 일본 리그와의 역사 차이만큼 한국에는 시간이 더 필요할 수 있다"고 했다.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 안우진(키움 히어로즈), 문동주(한화 이글스) 등의 비시즌 훈련을 담당하는 김광수 54K스포츠 코치도 "미국, 일본처럼 선수 풀이 넓어야 천재형 유망주를 발견할 가능성이 높다. 최근 한국에 공 빠른 젊은 투수가 많아진 건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이후 좋은 유망주들이 야구로 많이 몰린 덕분"이라며 "요즘엔 학생 야구선수가 줄어드는 추세라 앞으로 '160㎞ 투수'를 볼 확률이 더 줄어들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투수의 구속은 대표적인 '재능'의 영역이다. KBO리그 역대 최고 투수로 꼽히는 선동열 전 국가대표 감독은 과거 "투수 개인이 던질 수 있는 구속에 한계가 있다. 나 역시 프로에 와서 체계적인 훈련을 거쳤지만, 대학 시절 기록한 최고 구속을 넘어서기는 어려웠다"며 "투구시 하체 밸런스를 이용한 중심 이동이 구속과 가장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이 부분도 어느 정도 타고 나야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후천적 노력으로 늘릴 수 있는 구속의 범위를 시속 5㎞ 안팎으로 여긴다. 시속 140㎞를 던지던 투수가 145㎞까지 끌어올릴 수는 있어도, 150㎞에 도달하기는 어렵다는 의미다. 김광수 코치는 "구속은 80%가 타고난 신체 능력에 달려 있다. 그 외에 좋은 지도자의 코칭이 10%, 적절한 웨이트트레이닝이 5%, 선수 개인의 역량과 노력이 5% 정도 작용하는 것 같다"고 했다.
국내 투수 중 시속 160㎞에 가장 근접한 후보는 키움 안우진(23)이다. 그는 2020년 10월 17일 두산 베어스전에 구원 등판해 고척스카이돔 전광판에 시속 160㎞를 찍었다. KBO 공식기록통계업체 스포츠투아이가 PTS로 측정한 이 공의 시속은 157.44㎞였다. 안우진은 올해 선발 투수로 나섰다가 이보다 더 빠른 공도 던졌다. 2일 롯데 자이언츠와 정규시즌 개막전 1회 안치홍 타석에서 던진 2구째 직구가 시속 157.53㎞(전광판엔 159㎞로 표출)를 기록했다. 안치홍은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하는 이 공에 배트를 내지 못했다.
아직 프로 데뷔전을 치르지 않은 한화 문동주와 덕수고 3학년 심준석도 기대감을 키운다. 문동주는 지난달 스프링캠프 불펜피칭에서 시속 155㎞ 강속구를 던진 특급 유망주다. 올해 신인 중 가장 많은 계약금 5억 원을 받았다. 개막을 앞두고 옆구리 근육을 다쳐 재활했고, 5월 말쯤 1군 데뷔를 준비하고 있다. 곧바로 선발 로테이션에 투입될지는 미지수지만, 향후 KBO리그 강속구 역사를 바꿀 투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심준석은 고교 2학년인 지난해 최고 157㎞을 찍어 화제를 모았다. 2년 선배 장재영(키움)과 함께 일찌감치 강속구 유망주로 이름을 날렸다. 심준석이 올 시즌 KBO리그 신인 드래프트에 나올지 아니면 미국 구단과 계약해 MLB 진출을 먼저 노릴지 벌써부터 관심거리일 정도다. 한국에서 먼저 프로 생활을 시작한다면 전체 1순위 지명권을 가진 한화에 뽑혀 문동주와 한솥밥을 먹게 될 가능성이 크다.
#구속, 달콤하지만 위험한 유혹
최원호 감독은 문동주와 심준석의 160㎞ 도전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운동 역학자들은 근력의 정점을 20대 중반으로 본다. 그때까지는 별다른 운동을 하지 않아도 근력이 저절로 상승하지만, 그 시기 이후에는 운동으로 관리하지 않으면 근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라며 "반대로 생각하면 20대 초중반까지는 투수들의 발전 가능성이 충분히 열려 있다. 아주 드물지만 오동욱(한화), 이혜천(전 두산)처럼 프로에 와서 시속 10㎞ 이상 공이 빨라진 사례도 있다"고 설명했다.
앞서 언급한 그린과 사사키도 그랬다. 그린은 2017년 신시내티에 지명된 뒤 지난해까지 마이너리그에서 경험을 쌓았다. 2018년엔 팔꿈치 수술을 받고 재활했다. 입단 5년 만인 올해 빅리그에 올라와 연일 광속구를 뿌리고 있다. 사사키도 2020년 입단 후 1년간 2군에서 제구를 다듬고 프로에 적합한 몸을 만들었다. 지난 시즌 11경기에 등판해 예열을 마쳤고, 3년차인 올해 공도 빠르고 제구도 되는 '괴물'로 도약했다.
안우진도 입단 당시보다 최고 구속이 4㎞가량 늘었다. 김광수 코치는 그 비결로 '벌크업'을 꼽았다. "체중과 스태미너는 구속에 중요한 요소다. 안우진은 원래 구속이 빠른 투수였지만 지난 겨울 몸을 키우면서 더 힘이 붙었다"며 "부상 방지를 위해 어깨와 팔꿈치 강화 훈련을 병행했고, 투수에게 중요한 고관절 운동을 통해 유연성을 유지했다"고 설명했다.
물론 좋은 투수의 기본은 커맨드(마음먹은 대로 공을 던지는 능력)다. 최원호 감독은 "과거 미국의 한 야구 아카데미에서 야구 불모지인 인도를 방문해 운동에 재능이 있는 선수들을 투수로 테스트한 적이 있다. 야구를 한 번도 안 해봤는데도 시속 150㎞을 넘기는 선수가 많았다고 하더라"며 "하지만 정작 그 선수들을 스카우트해서 투수로 키우려고 하니 잘되지 않았다고 한다. 단순히 빠르게 던지는 것과 공을 제대로 던지는 것은 또 다른 문제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 감독은 이어 "투수의 기술 중 1번은 구속이 아니다.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능력'이 단연 첫 번째로 중요하다"며 "투구 기술이 잘 갖춰져 있다는 전제 아래서만 공이 빠른 투수가 유리하다. 너무 구속에만 우선 순위를 두면 공이 아무리 빨라도 효과를 볼 수 없다"고 했다.
실제로 스포츠투아이가 2011년 이후 측정한 국내 투수 비공인 최고 구속(시속 158.68㎞)의 주인공인 최대성은 11시즌 동안 244와 3분의 1이닝만 던지고 은퇴했다. 남들보다 빠른 공을 던지는 능력 덕에 롯데, KT 위즈, 두산을 거치며 기회를 얻었지만 커맨드가 뒷받침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2019년 최고 시속 156.38㎞를 찍어 6위에 오른 강지광(전 SSG 랜더스)도 강한 어깨로 주목을 받았지만 투수와 타자를 오가면서 도전을 거듭하다 지난 시즌을 끝으로 SSG에서 방출됐다. 2020년 LG 트윈스와 어린이날 맞대결에서 시속 156.09㎞ 강속구를 뿌렸던 이태오(당시 두산·8위) 역시 불안한 제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지난해 말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됐다. 올 시즌 롯데로 팀을 옮겨 새로운 기회를 노리고 있다.
반면 키움 조상우(시속 157.19㎞·4위)와 LG 트윈스 고우석(시속 156.54㎞·5위)은 강속구 재능을 잘 살려 팀을 대표하는 마무리 투수로 자리 잡았다. 2012년 최고 시속 155.95㎞를 찍은 삼성 라이온즈 오승환(9위)도 강속구와 제구력을 겸비한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한·미·일 프로야구를 호령했다. 또 앞서 언급한 안우진(3위)과 2014년 8월 최고 시속 156.11㎞를 기록한 김광현(SSG·7위)은 2011년 이후 최고 구속 톱10에 이름을 올린 선수 중 단 둘뿐인 선발투수다. 김광현과 오승환이 KBO리그 역사에 남긴 발자취를 돌아보면 같은 시속 150㎞ 중반대 강속구로 얼마나 다른 결과가 나오는지 실감할 수 있다.
안우진이 올해 키움의 개막전 선발로 나선 것도 단지 공이 빨라서만은 아니다. 홍원기 키움 감독은 "제구와 구종 선택, 경기 운영이 투수에게는 가장 중요하다. 구속에 대한 욕심이나 관심은 그 다음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광수 코치 역시 "미국과 일본에 시속 160㎞를 던지는 투수는 많다. 디그롬이나 사사키처럼 컨트롤이 되는 투수여야 그 공으로 빛을 보는 것"이라며 "학생 선수가 기본기를 갖추기도 전에 공만 빠르게 던지려다 다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