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사람들과 단골들이 이룬 공공자산” 주장에도…‘계약갱신 요구권’ 없는 노포들 임대차 분쟁 땐 속수무책
6평짜리 자그마한 가게인 을지OB베어의 정문은 유리가 깨져서 너덜너덜했다. 건물 앞에는 무단침입을 금지하는 경고문이 여러 장 나붙었다. 중소벤처기업부 ‘백년가게’ 현판 바로 위에는 부동산인도집행조서가 붙었다. 바로 아래에는 ‘을지로 노가리골목 서울 미래 유산’이라고 써진 서울시의 알림 현판만 덩그러니 남았다. OB베어를 찾은 손님들이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노가리 골목에 위치한 10개 남짓의 ‘만선호프’나 맞은편 ‘뮌헨호프’ 등 이웃 가게가 일부 손님을 흡수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대로 골목을 떠나기도 했다.
1980년 문을 연 을지OB베어는 창업주 강효근 씨의 뒤를 이어 딸 강호신 씨와 사위 최수영 씨 부부가 2대째 운영한 42년 된 노포다. 4월 21일 새벽 4시 20분께 강제 철거됐다. OB베어를 지키기 위해 모인 시민들과 용역 간의 대치로 다섯 번의 강제집행이 무산된 끝에 마침내 건물주가 법원에서 야간집행 허가를 받아낸 것이다. 철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를 비롯한 일부 시민들은 깨진 정문 앞에 현수막을 붙여 가리고 앉아 매일 오후 6시부터 손팻말을 들었다. 가게 맞은편 창고쪽 마당에서는 매일 오후 7~8시쯤부터 예배를 하거나 공연을 하고 전단지를 나눠주는 등 문화제를 열며 노가리 골목을 찾는 시민들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문화제에 참석한 한 남성은 “일을 마치고 지친 몸 안고 왔다가 시원한 맥주 한 잔과 학꽁치, 연탄에 구운 노가리를 먹으면 다시 내일을 살 기운을 얻었다”며 “OB베어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 청년은 “저희 부모님께서 30~40년 전에 여기서 인쇄소를 하셨는데 철거 소식을 듣고 사장님께 힘내시라는 말 전해드리라며 저를 보내셨다”며 최수영 사장의 손을 꽉 붙잡고 가기도 했다.
노포가 사라지는 것은 사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을지OB베어와 같은 파장이 생기는 것이 특별한 일이다. 그 이유는 우선 을지OB베어가 갖고 있는 상징성 때문이다. 을지OB베어는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을지로 골목을 지켜온 터줏대감으로 역사를 지닌 점포다. 을지OB베어를 필두로 노가리와 맥주를 파는 가게가 하나둘씩 들어서면서 노가리 골목이 형성됐다. 긴 세월 같은 곳을 지키며 저렴한 가격을 유지한 탓에 단골도 적지 않다.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측은 “노포는 오래된 단골들과 골목길 사람들 모두가 함께 형성하고 유지한 공공적 자산”이라며 “(노포가 있는 상권은) 억지로 만들려고 해도 만들 수 없는 오래된 생태계라 큰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울 시내 곳곳의 노포는 자본 논리에 밀려 사라지고 있다. 을지OB베어의 경우도 같은 건물 1층에 입점한 만선호프 측이 세를 확장하면서 밀려난 경우다. 주변 상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2014년 만선호프가 노가리 골목에 들어오면서 역사가 오래된 노포들이 하나하나 가게를 비우고 나가야 했다. 인근 상인 A씨는 “만선호프가 높은 임대료로 치고 들어오면서 작은 가게들이 우르르 내쫓겼다”며 “만선호프 본점 있는 자리에만 노포가 3곳은 있었는데 다 나가고 지금은 만선호프가 10군데 가까이 차지하면서 ‘만선호프 골목’이 됐다”고 귀띔했다. 만선호프가 늘어나는 것 자체는 사실 문제가 될 일이 아니다. 지금의 노가리 골목의 명성에 만선호프가 기여한 비중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번 건이 주목을 받은 것은 분쟁이 길었던 데다가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탓도 있다. 건물주·만선호프와 을지OB베어의 갈등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8년 6월 건물주는 을지OB베어 측에 임대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을지OB베어 측이 반발하자 같은 해 명도소송을 걸었고 대법원은 2020년 10월 건물주의 손을 들어줬다.
최수영 을지OB베어 사장은 “건물주가 원래 계약이 끝나는 2018년 10월에 만선호프가 입주할 예정이니 우리더러 자리를 비우라고 했다”며 “우리가 안 떠나니까 만선호프 측이 급기야 우리가 입주한 건물을 인수했다”고 말했다. 실제 을지OB베어와 만선호프가 나란히 입주했던 건물의 부동산등기부를 살펴보면 방종식 대표의 일가로 보이는 방성수 씨와 방성언 씨가 올해 1월부터 각각 건물 지분의 48%와 14%를 보유하고 있다.
만선호프 방종식 대표는 “대법원 확정판결이 난 후 5차례나 철거를 시도했는데 안 나가는 바람에 건물주가 1억 5000만 원의 손해를 보고 지쳐서 저한테 건물을 팔고 나간 것”이라고 반박했다. 만선호프 측은 을지OB베어가 지나치게 저렴한 월세를 내며 특혜를 누리고 있고 리모델링 요구를 거절해 재계약이 무산된 거라고 주장하지만 을지OB베어는 협상을 진행하는 도중에 강제로 가게를 철거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임대인과 분쟁이 생길 경우 오랜 기간 터전을 지키던 노포들은 속수무책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다. 상생이라는 측면에서 을지OB베어가 관심을 받는 또 다른 배경이다. 법도 이들을 보호하기 힘들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건물주가 단순히 마음에 안 들어서 나가라고 해도 임차인이 거부할 법적 근거가 없다”며 “2018년 상가임대차 보호법이 개정되면서 갱신요구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간이 5년에서 10년으로 늘기는 했지만 그나마도 을지OB베어는 해당이 안 되는 경우”라고 말했다.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에 규정된 갱신요구권 관련 내용에 따르면 임대인은 임대차 기간이 만료되기 6개월 전부터 1개월 전까지 사이에 임차인이 계약갱신을 요구할 경우 법률에 정한 사유 없이는 거절하지 못한다. 문제는 최초 임대차 기간을 포함해 전체 임대차 기간이 10년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수십 년간 한자리에서 장사한 을지OB베어 같은 노포는 임대료가 오르거나 건물주와 분쟁이 생기면 속수무책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참여연대 사회경제국 이미현 팀장은 “경쟁업체와의 임대-임차 관계의 분쟁으로 을지OB베어가 쫓겨나게 된 사실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며 “한편으론 노포들이 다른 데로 옮겨갈 곳도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생계를 잃는 과정이 반복되는데도 현장답사까지 하며 문제를 해결하겠다던 정치권이 여전히 조용한 사실은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김정민 기자 hurrymi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