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 분리 이후 총수 일가 관심 시들…지금은 현대차 중심으로 과거 영광 되찾는 모양새
랜드마크, 국가나 도시 혹은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시설이나 건축물을 뜻한다. 전쟁 등을 거치며 관공서를 제외하고는 랜드마크라고 불릴 만한 건물이 귀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고도 성장기를 거치며 각 지역마다 랜드마크 반열에 올라서는 건물이 하나둘씩 생겼다. 이들 건물은 대부분 당시 비약적으로 사세를 키우던 기업들과 연관이 깊다. 이 때문에 해당 랜드마크의 역사는 기업 또는 산업의 역사다. 다른 한편으로는 최근 새롭게 랜드마크로 꼽히는 건물은 시장과 산업의 트렌드를 보여주는 이정표로 자리매김하는 경우도 있다.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은 일요신문이 각 지역 랜드마크와 기업이 얽힌 이야기를 연재한다.[일요신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로 나와 30~40m를 걸으면 눈에 익은 빌딩을 마주하게 된다. 주변에 높은 빌딩이 없는 터라 크기에 비해 웅장한 느낌을 주는 이 건물의 이름은 ‘현대그룹 계동 사옥’이다. 현대그룹 계동 사옥은 한때 국내 1위였던 현대그룹의 영광과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건물이다. 재계를 주름잡던 현대그룹의 주요 의사 결정은 대부분 계동 사옥에서 이뤄졌다. ‘왕회장’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정계 진출이나 대북사업 등도 계동 사옥에서 논의됐다. 현대그룹 소식을 전하는 뉴스의 배경에는 늘 계동 사옥이 있었다. IMF 외환위기와 현대그룹 형제의 난 등을 겪으면서 범 현대가의 계동 사옥의 위상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현대자동차그룹의 현대건설 인수를 계기로 주요 계열사가 계동 사옥에 입주하면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가는 모양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1976년 종로구 계동에 위치한 옛 휘문고등학교 부지를 매입한 후 신사옥 건설을 추진했다. 그러나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학교 이적지에 대한 건축 규제가 엄격하게 적용되던 시절이었고, 인근에 창덕궁 등 유적지가 있어서 고층 건물을 반대하는 여론도 높았다. 결국 현대그룹은 1982년 당초 계획이었던 건물 규모를 지상 33층에서 12층으로 수정한 후에야 서울시의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33층으로 건설됐다면 당시 롯데호텔 본관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높은 빌딩이 될 기회였다.
계동 사옥은 조선 시대 관상감이 있었던 곳으로 지리적 명당으로 꼽힌다. 관상감은 천문, 지리 등과 관련한 일을 담당했던 관서다. 계동 사옥 동쪽에는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과 종묘가 위치해 있다. 서쪽에는 북촌한옥마을, 인사동 등의 상권이 발달해 있다.
계동 사옥은 14층 규모의 본관과 8층 규모의 별관으로 구성돼 있다. 계동 사옥 완공 당시 본관은 12층 규모였지만 1996년 증축하면서 층수를 14층으로 늘렸다. 특이한 점은 계동 사옥에 13층이 없고, 12층의 다음 층은 14층과 15층이라는 것이다. ‘13일의 금요일’에서 알 수 있듯 13은 서양에서 불길한 숫자로 꼽힌다. 정주영 명예회장도 이 점을 고려한 것으로 전해진다.
계동 사옥 가장 위층의 창문이 반원 형태인 것도 눈에 띈다. 한때 반원 형태의 창문은 현대그룹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범 현대가 그룹의 한 관계자는 “예전 현대중공업의 블라디보스토크 호텔도 반원 형태의 창문이 있었고, 현재도 옛 현대증권 빌딩(현 코스콤 사옥) 등 반원 형태의 창문을 가진 건물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며 “2000년대 들어 현대그룹이 계열분리되면서 각 그룹들의 시그니처가 달라졌고, 현재는 반원 형태의 창문을 굳이 반영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계동 사옥 공사 과정에서 건설 반대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공사 현장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등 우여곡절도 있었다. 막상 계동 사옥이 완공되자 주변 부동산 가격이 상승했고, 인근 식당도 호황을 맞이해 지역 주민들이 환호했다는 후문이다. 계동 사옥 완공 후 현대건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상선(현 HMM) 등 현대그룹의 주요 계열사가 입주했다.
계동 사옥은 현대그룹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주주총회나 기자회견 등 각종 행사가 열린 것은 물론이고, 주요 의사 결정도 대부분 계동 사옥 내에서 이뤄졌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통일국민당 창당 논의도 계동 사옥 12층에서 주로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 명예회장이 1998년 ‘소떼 방북’을 할 때 방북단이 집결한 곳도 계동 사옥 앞이었다. 노동계에서도 계동 사옥은 익숙한 건물이다. 현대그룹 계열사 노동조합들이 늘 계동 사옥 앞에서 크고 작은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집무실은 계동 사옥 12층에 있었다가 증축 후 15층으로 이전했다. 당시 현대그룹은 높은 층에 있을수록 서열이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1996년 당시 정몽구 현대자동차 명예회장이 14층,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12층,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11층을 사용했다. 고 정세영 HDC그룹 명예회장과 그의 아들 정몽규 HDC그룹 회장의 집무실은 8층에 있었다.
현대건설은 1990년대 말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재무 여건이 크게 악화됐다. 현대건설은 자구책으로 계동 사옥 매각을 추진했다. 현대그룹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을 외부 자본에 매각할 수 없다는 여론이 현대건설 내부에서 나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현대건설은 2001년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등에 계동 사옥 본관을 매각했고, 별관만 현대건설 소유로 뒀다. 현대중공업도 2016년 자금난을 이유로 아산재단에 계동 사옥을 매각했다. 현재 계동 사옥 본관은 아산재단이 두 개 층을 소유하고 있고, 나머지 층은 모두 현대자동차 소유다.
현대그룹 총수 일가는 한동안 계동 사옥에 집무실을 두지 않았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양재동 현대자동차 사옥에 집무실을 뒀고,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은 정치 활동에 전념하면서 경영에서 손을 뗐다. 정몽헌 회장은 계동 사옥에 집무실을 뒀지만 2003년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후임 회장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적선동으로 집무실을 옮겼다.
현대그룹이 계열분리된 후 한동안은 범 현대가 계열사들이 계동 사옥에 입주했었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대부분 계동 사옥을 떠났다. 현대모비스는 2005년 역삼동으로 본사를 이전했고, 현대해상과 현대로템은 각각 광화문 사옥, 양재동 사옥으로 옮겼다. 이들이 떠난 자리에는 해양수산부, 보건복지부, 부패방지위원회, 씨티은행 등 외부 기관들이 입주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이 2011년 현대건설을 인수하면서 계동 사옥에도 변화가 생겼다. 무엇보다 정몽구 명예회장이 과거 계동 사옥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선 정주영 명예회장의 집무실이 있었던 계동 사옥 15층에 본인의 집무실을 마련했다. 보건복지부가 2013년 세종시로 이전한 후 현대건설의 본사를 계동 사옥 별관에서 본관으로 옮겼고, 별관에는 현대건설 자회사인 현대엔지니어링을 입주시켰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계동 사옥에 집무실을 마련하면서 “정말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정몽구 명예회장의 노력 덕에 현재 계동 사옥은 대부분 범 현대그룹 계열사들이 사용하고 있어 과거 영광을 어느 정도 되찾은 상태다. 계동 사옥 본관 11층, 12층, 14층 세 개 층에는 HD현대, 한국조선해양, 현대건설기계, 현대중공업 등 현대중공업그룹 계열사가 입주해 있다. 나머지 11개 층은 현대건설, 현대스틸산업, 현대오토에버 등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가 사용하고 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