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애도’ 야 ‘위로’ 윤 대통령 ‘협력’ 강조…자민당 참의원 선거 압승 평화헌법 개정 여부 초미 관심
아베 전 총리 인생 마지막 페이지가 ‘총기 피격’으로 매듭지어질 것이라 예상한 이는 드물었다. 그만큼 세계적으로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아베 전 총리는 일본 자민당 10선 의원으로 재직 중이었고, 역대 최장수 총리 재직 타이틀을 갖고 있던 인물이다. 일본 정치권에서 아베 전 총리가 쌓아 올린 커리어는 입지전적인 수준이다.
아베 전 총리는 한국에서도 일본 총리 중 가장 높은 인지도를 지닌 인물로 꼽힌다. 그가 한국에서 쌓은 인지도를 굳이 분류하자면 ‘유명’보다는 ‘악명’에 가까웠다. 아베 전 총리가 재임 중 한일관계를 악화하는 행동 혹은 발언을 거침없이 이어간 까닭이다. 과거 일본 자민당 내에서 지한파로 분류되기도 했던 아베 전 총리는 재임기간 중 국내 ‘반일감정’을 부추기는 핵심 인물로 지목을 받았다.
자민당 10선 의원이었던 아베 전 총리의 지역구 역시 한국과 깊은 인연이 있는 편이다. 아베 전 총리 지역구는 야마구치현 제4구다. 시모노세키와 나가토를 포함하는 지역구로 일본 내에선 보수 성향이 짙은 지방이자, 대대로 아베 가문이 활동했던 무대로 알려져 있다. 국사 교과서에 일제강점기 신호탄 격으로 등장하는 ‘시모노세키 조약’의 무대가 된 지역구 중의원이 아베 전 총리였다.
아베 전 총리 사망 이후 주한 일본대사관엔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분향소가 설치됐다. 7월 12일엔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여야 수뇌부 역시 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다만 각자의 메시지가 가지는 온도 차이가 존재했다.
윤 대통령은 조문록에 “아시아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헌신하신 고 아베 신조 총리님의 명복을 빈다”면서 “가장 가까운 이웃인 한국과 일본이 앞으로 긴밀히 협력해 나가길 기원한다”고 했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의 이번 조문이 한일 양국이 가까운 이웃이자 가치와 규범을 공유하는 사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한일관계 새로운 출발점이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이번 조문과 별개로 한덕수 국무총리, 정진석 국회부의장 및 중진 의원들로 조문 사절단을 구성해 일본을 파견할 예정이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비명에 돌아가신 아베 전 일본 총리는 일본 최장수 총리로 일본 국민으로부터 많은 사랑과 신망을 받았다”면서 “그 분의 작고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윤 대통령보다 먼저 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우 위원장은 조문을 마친 뒤 취재진을 만나 “민주당과 정치적 견해는 달리하신 분이지만, 비극적인 일을 당해 위로의 뜻을 전하러 왔다”면서 “명복을 빌고, 일본 국민들도 충격받았을 텐데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고 했다.
대통령과 여야 수뇌부의 조문 키워드는 각자 다르다. 윤 대통령의 경우 ‘향후 긴밀한 협력’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웠다. 국민의힘 수뇌부인 권 원내대표는 ‘애도’를, 더불어민주당 수뇌부인 우 위원장은 ‘위로’를 키워드로 삼았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향후 외교적 방향성에 대한 부분을 짚은 반면,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을 대표해 조문한 인사들은 각자 조문의 무게감을 달리하면서 아베 총리 피격 사망 사건을 대하는 자세를 다르게 취했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박근혜 정부 시절 한일관계, 문재인 정부 시절 한일관계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쳐 여야 수뇌부 메시지가 다르게 나온 것으로 보인다”면서 “권 원내대표는 보다 무게감 있는 애도라는 표현을 하며 조문했고, 우 위원장은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는 부분을 강조하면서 일본 국민을 향한 위로에 방점을 찍었다”고 했다.
이런 온도 차 배경 이면엔 아베 전 총리 재임 시절 불거진 각종 이슈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아베 전 총리는 1차 내각(2006~2007년)과 2·3·4차 내각(2012~2020년) 등 총 4차례에 걸쳐 8년이 넘는 기간 동안 총리 직을 수행했다. 임기가 겹치는 한국 대통령이 4명이다. 아베 1차 내각 당시는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고, 아베 2차 내각은 이명박 정부 말기 2달여 동안 임기가 겹쳤다. 한일관계에 있어 아베 전 총리는 총리 임기 대부분을 박근혜 정부·문재인 정부 상대로 보조를 맞춰 왔다.
박근혜 정부 초기 아베 행정부는 한일관계를 중시하는 스탠스를 취했다. 그러나 아베 전 총리를 비롯한 내각 주요 인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및 독도 관련 망언 등으로 양국은 쉽사리 가까워지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는 한반도 안보 상황에서 더 비중을 차지하는 국가로 중국을 꼽아 중국과 스킨십을 이어갔다.
그러던 2016년 사드 배치 논란이 한반도 정세를 좌우하는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자, 한중관계가 악화했다.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한일관계 개선을 지속적으로 촉구했다. 결국 박근혜 정부와 아베 행정부는 ‘한일 위안부 합의’를 전격 성사시키며 관계 개선 물꼬를 텄다. 한일 위안부 합의는 박근혜 정부와 아베 행정부 모두 리스크를 안는 합의이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는 과거사 관련 일본 정부 차원 사과를 받아내지 못했고, 아베 행정부는 ‘박정희 정부 당시 이뤄졌던 한일기본조약으로 끝난 일에 대한 재배상은 없다’는 원칙을 물렀다. 양쪽 모두 자국 정치권에서 비판을 받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관계 개선을 추진한 셈이었다.
2016년엔 한일 군사정보포괄협정이라 불리는 ‘지소미아’를 양국이 체결했다. 해당 조약을 두고 국내에선 실리를 추구하는 필요한 조약이라는 여론과 과거사를 망각한 경솔한 조약이라는 여론이 대립각을 세우며 논란 중심에 서기도 했다.
전직 군 정보당국 관계자는 “지소미아의 경우 한국이 강점을 지닌 휴민트(Humint)와 일본이 강점을 지닌 텍민트(Techmint)를 교환하는 조약으로 일본은 납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로 지소미아를 체결했다”면서 “교환 정보 사이 실익을 따지자면, 한국이 우위지만 과거 한국을 침탈했던 일본과 군사조약에 대해 찜찜한 감정을 가지는 국민 여론 역시 적지 않았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이후 점차 개선되는 듯했던 한일관계엔 갑작스레 빨간불이 켜졌다. 한국 정치권이 탄핵정국으로 요동치면서부터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정농단 사건이 촉발한 탄핵 국면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리고 정권이 교체됐다. 문재인 정부의 등장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기반으로 북한과 직접 대화하는 ‘한반도 운전자론’을 내세웠다.
2018년 10월 대법원은 일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 일본제철에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에 대해 아베 전 총리는 강경한 불가 입장을 내비쳤다. 한일관계는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2019년 7월엔 아베 행정부가 공업 소재 한국 수출을 규제했다. 이에 따라 국내에선 ‘반일감정’이 최고조에 달했다. 일본산 제품에 대한 불매 운동이 일어났다. 2020년엔 아베 행정부 임기 내 평화헌법 개헌 여부를 두고 이슈가 불거지면서 한일관계가 더 나빠지는 양상을 보였다. 평화헌법 개헌은 방어만을 목적으로 존재하는 일본 자위대 용도가 재무장으로 방향성을 트는 의미를 지녀, 동아시아 정세에 긴장감을 고조시킬 수 있는 변수로 꼽힌다.
아베 전 총리는 일본 참의원 선거 지원 유세 중 유명을 달리했다. 아베 전 총리가 사망하면서, 선거는 자민당에 유리한 결과로 막을 내렸다는 게 정치권 복수 관계자 분석이다.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선거 전보다 8석을 추가 확보하면서 개헌 동력을 얻게 됐다.
일본 내부 사정에 정통한 외교가 관계자는 “결과론적으로 아베 전 총리 사망으로 자민당이 8석을 더 확보하며 정국 운영 주도권을 보다 확실하게 쥐게 됐다”면서 “이런 부분이 한일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야 윤곽을 나타낼 것이라 본다. 다만 아베 행정부와 기시다 행정부의 성향이 약간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에 과거 아베 시절처럼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강한 움직임을 보일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주장했다.
정치평론가 신율 명지대 교수는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이론적으로 따지면 일본 내부에서도 상당히 보수에 치우친 정치인이었다”면서도 “그간 일본 보수 진영 본류가 보였던 정치 성향과도 차이가 있는 특이 케이스”라고 했다. 그는 “일본 보수진영 본류는 우리나라를 배려하는 입장이 강했고, 우호적인 스탠스를 취했다”면서 “아베 전 총리 사망이 일본 보수 진영의 방향성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을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신 교수는 “현재 재임 중인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일본 보수진영 본류에 포함되는 정치인인데, 개헌에는 찬성론을 펼치고 있다”면서 “기시다 총리가 일본 국민 다수가 반대하는 평화헌법 개정에 대해서는 강력한 드라이브를 펼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된다면, 한일관계는 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