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제의 달인들 심판 눈 피해 의도적 ‘기만행위’…배영수 ‘무투구 끝내기 보크’ 진기록
허 감독은 즉시 더그아웃을 박차고 나와 주심에게 양현의 보크를 주장했다. 양현이 투구 준비 전 동작을 완전히 멈추지 않고 왼쪽 어깨를 들썩거리다 견제구를 던졌다는 거였다. 심판진이 상의 끝에 어필을 인정하지 않자 물러서지 않고 거센 항의를 이어가다 제한 시간(4분)을 초과해 퇴장을 당했다. 다음 날인 23일엔 "양현의 동작은 명확한 부정 투구였다. 왼쪽 어깨를 몸 안쪽으로 넣으며 투구하는 동작을 하다가 갑자기 견제를 하는 것은 주자를 기만하는 행위"라며 "최근 1~2년간 그런 식의 견제를 해 와서 계속 눈여겨보고 있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이 발언은 양현의 경기 내용에 영향을 미쳤다. 양현은 24일 삼성전 6회 2사 후 이재현에게 안타를 내준 뒤 1루를 향해 네 번 연속 견제구를 던졌다. 삼성 더그아웃을 향한 무언의 시위로 여겨졌고, 홍원기 키움 감독도 그렇게 판단했다. 앞서 허 감독의 주장에 "양현의 동작은 보크가 아니다"라고 감쌌던 홍 감독은 26일 양현을 1군 엔트리에서 제외한 뒤 "(개인 감정으로) 경기 흐름에 안 좋은 영향을 미쳤다"고 쓴소리했다.
#보크란 무엇인가
보크는 투수들의 '반칙 행위'다. 투수가 상대 타자나 주자를 속이는 것을 막고 주자들의 주루 플레이 권한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안전장치로 여겨진다. 이 때문에 보크는 베이스 위에 주자가 있을 때만 성립하고, 투수의 보크가 선언되면 모든 주자가 한 베이스씩 진루한다. 3루에 주자가 있다면 실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보크는 웬만한 야구팬이라면 다 아는 단어다. 그러나 누구나 쉽게 잡아낼 수는 없다. 수많은 야구 규칙 가운데서도 무척 어렵고 까다로운 규정으로 분류된다. 명백하게 눈에 보이는 보크도 있지만, 신체의 일부분만 보크의 경계선에 놓이는 미세한 동작들도 종종 발견된다. 심지어 보크를 선언당한 투수가 문제의 원인을 알지 못할 때도 있고, 심판들조차 보크를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갈 때도 있다. 워낙 순식간에 지나가는 작은 움직임 하나에 보크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집계할 수는 없지만, 심판들은 평균적으로 20%가량의 보크를 놓친다는 속설도 있다. 그만큼 판정이 힘들다. 한 야구인은 "일반인들 눈에만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더그아웃에 있는 감독과 코치들, 선수들마저도 의식하고 보지 않으면 보크를 적발하지 못할 때가 많다"고 귀띔했다.
KBO 야구규칙에는 무려 13가지 보크 항목이 지정돼 있다. 투수들이 지적받는 보크 동작이 매번 비슷한 것 같아도, 알고 보면 복잡하고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그 조항들을 상세하게 정리해보면 이렇다.
△투수판에 중심발(오른손 투수는 오른발, 왼손 투수는 왼발)을 대고 있는 투수가 투구와 관련된 동작을 시작했다가 투구를 중지했을 때. 즉, 와인드업을 시작한 뒤 타자에게 투구하지 않으면 보크라는 뜻이다. △투수판에 중심발을 대고 있는 투수가 1루에 송구하는 시늉만 하고 실제로 공을 던지지 않았을 때. 2루주자와 3루주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지만 1루주자와 타자에게는 일단 송구 동작이 시작된 뒤 취소할 수 없다. △투수판을 딛고 있는 투수가 베이스에 송구하기 전에 발을 똑바로 그 베이스 쪽으로 내딛지 않았을 때. 외국인 투수들이 종종 1루 견제를 할 때 자유발(오른손 투수는 왼발, 왼손 투수는 오른발)을 홈과 1루 사이의 애매한 지점에 내딛어 지적을 받곤 했다. △투수판에 중심발을 대고 있는 투수가 주자가 없는 베이스에 송구하거나 송구하는 시늉을 했을 때. 플레이에 필요한 상황(1루주자가 도루를 시도할 때 2루에 던지는 것 등)을 제외하면 모두 보크다. △투수가 반칙투구를 했을 때. 타자가 타석 안에서 충분한 자세를 갖추기 전에 투구하면 보크가 선언돼 주자가 진루하고, 주자가 없을 경우 보크가 성립하지 않기에 스트라이크가 들어와도 무조건 볼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투수가 타자를 정면으로 보지 않고 투구했을 때 △투수가 투수판을 밟지 않고 투구와 관련된 동작을 취했을 때 △투수가 불필요한 이유로 경기를 지연했을 때. △투수가 공을 소지하지 않은 채 투수판을 밟거나 걸쳐 섰을 때 또는 투수판에서 떨어져 투구에 관련된 동작을 했을 때 △투수판에 중심발을 대고 있는 투수가 고의 여부와 관계없이 공을 떨어뜨렸을 때 △고의4구를 진행하고 있는 투수가 포수석 밖에 나가 있는 포수에게 투구했을 때 △투수가 세트포지션으로 투구하면서 완전히 정지하지 않고 투구했을 때도 모두 보크 항목으로 분류된다.
#1루 견제 보크가 최다
보크 판정 때 가장 많은 논란이 발생하는 사례는 단연 '1루 견제시 투수가 주자를 기만하는 행위'다. 1루 견제에 관련된 보크를 판정할 때 기본이 되는 기준은 '투수판'이다. 투수판을 밟기 전까지 투수는 한 명의 야수로 간주된다. 견제구를 던지는 시늉을 하다 말아도 상관이 없고, 반드시 베이스 쪽으로 자유발을 딛고 공을 던질 필요도 없다. 그러나 투수판을 밟는 순간부터 투수는 투구와 그 이외의 동작을 명확하게 구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심지어 투수판을 밟은 상태에서는 상대 팀이나 심판의 오해를 살 수 있는 애매한 동작도 최대한 피해야 한다. 과거 삼성 라이온즈와 한화 이글스에서 뛰었던 외국인 투수 미치 탈보트는 투수판을 밟고 서 있다가 마치 투구 동작을 시작하는 것처럼 양쪽 무릎을 한 번 움찔한 뒤 1루로 몸을 틀어 견제구를 던지는 습관 탓에 논란을 빚었다. 상대 팀 감독들이 끊임없이 항의했고 삼성 시절에는 세 차례, 한화 시절에는 두 차례나 같은 이유로 보크를 지적 받았다. 급기야 한 번은 글러브를 심판에게 던지면서 보크 판정에 항의하다 퇴장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심판들은 "명백하게 주자를 기만했다"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 야구인은 "한 번 보크를 지적받으면, 이후에는 투수가 고쳐야 한다. 심판들도 서로 정보를 공유하기 때문에 한 번 보크를 선언한 동작에 대해서는 다음 경기에서도 보크로 지적받을 가능성이 높다"며 "보크의 여지가 있는 동작은 처음부터 신경써서 하지 않는 게 좋다"고 했다.
물론 분명히 투수판에서 발을 뺐는데도 보크가 선언될 때가 있다. 투수판에서 내려올 때는 반드시 뒤쪽, 즉 2루 방향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한 베테랑 심판위원은 "일부 오른손 투수들은 1루 견제 동작을 빠르게 하기 위해 3루 쪽으로 중심발을 빼면서 견제하는 시늉을 하기도 한다"며 "이 경우 투수판 뒤쪽으로 발을 뺀 게 아니기 때문에 투수판을 밟고 있는 것과 똑같이 간주돼 보크가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투수들이 가장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이 심판위원은 "적지 않은 투수가 '분명히 투수판에서 발을 뺐는데 왜 보크냐'고 항의하곤 한다"고 귀띔했다.
#보크도 기술이다
노련한 베테랑 투수들은 가끔 심판의 눈을 피해 의도적인 보크 동작을 하기도 한다. 주로 발 빠른 주자가 미리 스타트를 끊었을 때 이뤄진다. 주자가 달리기 시작하면 심판들의 눈이 자연스럽게 주자 쪽으로 쏠리는데, 그 틈을 이용해 재빨리 '적발되지 않는' 보크를 범하는 것이다. 세트포지션에서 확실한 정지동작 없이 투구하는 '퀵 피치'가 가장 많이 시도되는 방법이다. 게다가 견제아웃을 잘 잡아내기로 이름난 투수들은 대부분 '훌륭한 견제'와 '애매한 보크'의 경계선을 잘 넘나들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모든 동작을 다 파악하기가 어렵다.
심판들은 보크를 놓치지 않고 잡아내기 위해 투수의 무릎, 손, 어깨, 글러브 위치 등을 유심히 본다. 선수별로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무릎은 가장 신경써서 지켜봐야 하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왼손 투수가 1루 견제를 할 때 자유발이 벌어지는 각도는 일반적으로 45도에서 60도까지 허용된다. 견제에 능한 왼손 투수들은 홈플레이트 쪽으로 무게중심을 두는 듯하다가 곧바로 1루 쪽으로 공을 던지는 기술을 구사한다. 이 때문에 무릎 쪽의 세밀한 움직임을 유심히 봐야 보크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다.
현역 시절 견제를 잘하기로 유명했지만 그만큼 보크도 많았던 한 왼손 투수는 빠른 주자가 나갔을 때 세트포지션 동작에 돌입하는 것처럼 글러브를 내리는 척하다가 완전히 정지하지 않고 1루로 견제구를 던지는 일이 잦았다. 베테랑 심판들은 어김없이 잡아냈지만, 연차가 높지 않은 심판들은 고개를 갸웃하다 그대로 속아 넘어갔다는 후문이다.
보크와 견제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하기로 유명한 투수들은 대부분 좌완이다. 1루 주자를 시야에 두고 공을 던질 수 있는 장점이 있어서다. 하지만 많은 심판은 '국보'로 불렸던 오른손 투수 선동열이 이 분야에서도 역대 최고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선동열의 보크를 판단하는 포인트는 왼쪽 어깨였다. 심판위원장 출신의 한 야구인은 "일반적으로 오른손 투수가 왼쪽 어깨를 안쪽으로 집어넣으면 정상적으로 투구를 시작하겠다는 의미인데, 선동열은 이 동작에서 순간적으로 몸을 틀어 1루로 공을 던졌다"며 "간혹 보크성인 경우도 있었지만 워낙 동작이 빨라 잡아내기가 쉽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화제의 보크 관련 사례
KBO리그 역대 1호 보크는 프로야구가 닻을 올리던 1982년 3월 27일에 나왔다. MBC 청룡(현 LG 트윈스) 이길환이 삼성과의 개막전 2회 초 1사 1루에서 투구를 시작하는 듯 상체를 움직였다가 다시 투구 동작을 해제해 보크를 지적받았다. 1991년 9월 25일 롯데 자이언츠 박동희가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범한 보크도 역대 가장 치명적인 실수 중 하나로 기억된다. 롯데가 2-1로 앞선 3회 말 1사 3루에 구원 등판해 삼성 류중일과 맞섰는데, 너무 긴장한 탓인지 투구를 시도하다 손에서 공이 빠지지 않아 허무하게 동점을 허용했다. 그 후 박동희가 연장 13회까지 10⅔이닝을 15탈삼진 1실점으로 막는 투혼을 보였기에 더욱 많은 이의 기억에 남은 장면이다. 두 팀은 그날 결국 3-3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예정에 없던 4차전(당시 준플레이오프는 3전 2선승제)을 치른 끝에 삼성이 플레이오프에 올랐다.
2011년 6월 8일 LG-한화전에서 나온 이른바 '보크 끝내기 오심' 역시 11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보크가 화제에 오를 때마다 회자되는 사건이다. 상황은 이랬다. 한화가 5-6으로 뒤진 9회 초 2사 3루 이대수 타석. 풀카운트에서 한화 3루주자 정원석이 기습적인 홈스틸을 시도했다. 마운드에 있던 LG 투수 임찬규는 중심발을 투수판에 대고 자유발을 뒤로 뺀 채 투구 자세에 돌입한 상태였다. 무조건 투구 동작을 이어가야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나머지 투구 동작을 멈추고 투수판에서 발을 뗐다. 그리고 3루 주자를 잡으려는 듯 포수 조인성에게 공을 던졌다. 사실상 '투구'가 아닌 '송구'였다. 조인성도 얼떨결에 임찬규가 던진 공을 받아 홈으로 달려든 정원석을 태그했다.
중심발을 투수판에 대고 있던 투수가 투구 동작을 중지하면 명백한 보크다. 그런데 그 순간 주심이 정원석을 향해 아웃을 선언했다. 투수를 바라보면서 달려오느라 임찬규의 보크를 확실하게 목격한 정원석은 억울해 하며 펄쩍 뛰었다. 당시 한화 사령탑이었던 한대화 감독도 즉각 달려나와 격한 항의를 시작했다. 보크가 명백하니 3루 주자의 자동 득점이 인정돼야 한다는 거였다. 하지만 경기는 판정 번복 없이 그대로 종료됐다. 보크는 주심을 비롯한 4명의 심판 중 누구라도 선언할 수 있는데, 4명 중 누구도 그 순간 투수를 보지 않고 있었던 게 문제였다. 심판들도 화면을 확인한 뒤 뒤늦게 "오심이 맞다"고 인정하고 사과했다.
이날 오심의 혜택을 봤던 LG는 3년 뒤인 2014년 4월 29일 마산 NC 다이노스전에서 반대로 투수의 보크를 유도하기 위한 홈스틸을 시도하다 미수에 그쳤다. LG가 2-3으로 한 점 뒤진 9회 초 2사 만루 풀카운트에서 NC 마무리 투수 김진성이 마지막 공을 던졌고, 최경철이 그 공을 타격해 우익수 플라이로 경기가 끝났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LG 3루주자 박용근이 갑자기 홈으로 뛰어 들며 슬라이딩을 했다. 타구만 바라보던 최경철이 박용근의 발에 걸려 넘어질 뻔한 아찔한 상황도 연출됐다. '타자가 타격할 때 홈으로 슬라이딩하는 주자' 해프닝은 다음 날 외신에서도 화제가 됐을 정도로 주목 받았다.
알고 보니 이 플레이는 한 번 한화에 허를 찔렸던 LG가 그 아이디어를 역이용해 스프링캠프 때부터 준비해 온 작전이었다. 박용근은 "한 점이 꼭 필요한 상황에서 주자가 3루에 있을 때는 (홈스틸 시도로) 보크를 유도하기로 미리 약속했다"며 "풀카운트에서 투수가 공을 던지는 순간 시야에 뛰어 들어가는 주자가 보이면, 보크를 범하거나 적어도 볼을 던질 가능성이 높다고 팀에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2019년 9월 14일 두산 베어스 소속이던 배영수의 '무투구 끝내기 보크'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1위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를 2.5경기 차로 맹추격하던 두산은 9회 말 마무리 투수 이형범이 6-6 동점을 허용한 뒤 1사 1·3루 위기가 이어지자 부랴부랴 베테랑 투수 배영수를 마운드에 올렸다. 그러나 배영수는 첫 타자 노수광에게 첫 공을 던지기도 전에 1루에 있던 주자 정현을 견제하는 동작을 취하다가 투수 보크 판정을 받았다. 심판 4명이 동시에 팔을 올린, 명백한 보크였다. SK 3루 주자 김강민의 자동 끝내기 득점이 인정되면서 경기는 순식간에 종료됐다. 끝내기 보크는 역대 6번밖에 나오지 않은 진기록이고, 그 가운데 공 한 개도 던지지 않은 끝내기 보크는 역대 유일한 사례였다.
배영수는 "분명히 투수판에서 발을 뺐다"고 억울해 하며 펄쩍 뛰고 반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튿날 보크를 인정하면서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다. 부끄럽고 참담한 내 실수다. 1루 주자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그런 실수가 나왔다"고 고개를 숙였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