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에어컨’은 이제 더그아웃 필수품…선수협 2018년엔 ‘경기 취소 검토’ 요청했지만 무산
KBO리그도 시름시름 앓았다. 가뜩이나 야구장을 찾는 관중 수가 줄었는데, 7월 이후로는 매진 소식이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7월 16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에 만원 관중이 모인 게 오히려 이례적이었을 정도다.
야구팬이야 집에서 TV로 야구를 보면 그만이지만, '야외활동'이 직업인 프로야구 선수들은 죽을 맛이다. 지열이 올라오는 그라운드에서 매일 3시간 이상을 버티다 보면 땀이 비 오듯 흐른다. 더위를 이기기 위한 '얼음주머니'가 더그아웃에 등장하고, 평소 투지 넘치기로 유명한 선수들조차 "딱 하루만 쉬고 싶다"고 넋두리를 할 만하다. 이 시기만큼은 상대팀 투수와 타자보다 더 무서운 적이 '더위'다.
#최고의 피서, 휴식
프로야구 감독들이 꼽는 최고의 여름나기 비법은 간단하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는 것"이다. 이 가운데 사령탑들이 배려해줄 수 있는 부분은 휴식뿐이다. 수년 전부터 많은 구단은 더위가 극에 달할 때 경기 전 훈련을 아예 안 하거나 최소화하곤 했다. 평일 경기를 기준으로 보통 홈팀은 오후 3시, 원정팀은 오후 4시 30분쯤 차례로 훈련을 시작하는데, 정작 경기 때보다 이때 겪는 더위가 더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선수들 자율에 맡긴 팀도 있고, 아예 강제로 훈련을 금지한 팀도 있다. 홈팀 선수들은 배팅 훈련만 간단하게 한 뒤 라커룸에서 휴식을 취하고, 원정팀 선수들은 숙소에서 최대한 늦게 출발한 뒤 야구장에서 몸만 풀고 경기에 나서는 일도 잦았다. 한 선수는 "휴식일에도 외출을 가급적 삼가고, 필요한 훈련은 되도록 실내 훈련장에서 한다"고 했다.
코끼리 코처럼 길쭉한 송풍구들이 달린 대형 냉풍기는 이제 모든 야구장 더그아웃의 필수품이 됐다. 경기 중 더그아웃에 머물러야 하는 선수들이 수시로 열기를 식힐 수 있게 해주는 최고의 조력자다. 최근 롯데 자이언츠에 새로 온 외국인 타자 잭 렉스는 팀에 합류하자마자 이 냉풍기와 사랑에 빠진 모습을 보여 웃음을 자아냈다. 냉풍기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수시로 얼굴을 송풍구에 갖다 대며 찬 바람의 냉기를 흡수했다.
김태형 두산 베어스 감독이 애용해 유명해진 '얼음주머니'도 고전적인 방법이다. 말 그대로 얼음이 가득 든 비닐 주머니를 머리와 목에 올려놓고 버티는 거다. 냉장고 속 이온음료와 차가운 물도 경기 중엔 5회 이전에 금세 동이 나기 때문에 선수단 매니저가 수시로 점검하고 있다.
무더운 여름을 잘 나려면 영양 보충도 중요하다. 체력이 평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30대 중반을 넘어선 한 베테랑 선수는 "같은 팀 선수가 좋은 플레이를 했을 때 박수를 치고 하이파이브를 하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소모되는 느낌"이라고 농담도 했다. 이 때문에 예전 선수들은 뱀, 흑염소, 녹용, 개소주 등 온갖 보양식을 다 섭취했다. 몸에 좋다고 알려진 재료라면 입맛에 맞지 않아도 다 참고 먹었다. 빙그레(전 한화) 이글스는 한때 선수들에게 '뱀탕'을 돌린 적도 있는데, 고원부 같은 재일교포 선수들은 차마 먹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요즘 선수들은 다르다. 좀 더 체계적으로 식단을 관리한다. 한 코치는 "우리가 선수생활을 할 때는 다들 한약은 기본으로 먹고 부모님들이 희귀 음식들도 경쟁적으로 구해다 주곤 했다"며 "요즘 선수들은 각종 영양제들을 잘 챙겨 먹고, 도핑테스트 적발 위험이 있는 한약보다 부담이 덜한 홍삼즙 등을 수시로 먹는다. 보양식도 장어나 한우, 삼계탕처럼 일반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음식을 먹는다"고 전했다. 다만 여름철 급습하기 쉬운 장염을 피하기 위해 날 것이나 찬 음식은 가급적 피하고, 먹을 때는 음식 상태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인다.
#'폭염 취소'의 기준은?
2018년 7월 말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가 KBO에 "7월 31일과 8월 1일 이틀간 예정된 경기를 취소해줄 것을 검토해 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있었다. 그해 한국은 기상 관측 111년 만에 가장 높은 기온을 찍는, 기록적인 폭염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하루 최저 기온이 섭씨 30도를 넘는 '초열대야' 현상도 나타났다.
선수협은 이날 10개 구단 선수들의 의견을 취합해 "폭염이 지속될 경우 경기 개시 시간을 한 시간 늦추는 방안도 고려해 달라"는 요구도 했다. 7월 31일엔 기온이 섭씨 38도까지 올랐고, 8월 1일엔 최고 39도에 이를 것이라는 예보가 나온 뒤라서다. 당시 선수협 관계자는 "시즌 초 미세먼지로 경기 취소를 한 것처럼 폭염에도 선수보호 차원에서 전향적으로 경기 취소를 검토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KBO와 현장 지도자들이 난색을 표하면서 결국 무산됐다.
KBO 리그 규정 제27조에는 '황사 경보 발령 및 강풍, 폭염 시 경기 취소 여부' 관련 조항이 있다. 폭염주의보나 경보가 내려졌을 때 해당 경기위원이 지역 기상청에 확인한 후 심판위원, 경기 관리인과 협의해 구장 상태에 따라 취소를 결정할 수 있도록 명시했다. 폭염주의보는 6~9월 하루 최고기온이 섭씨 33도 이상인 상태가 2일 이상 지속할 때 내려지고, 폭염경보는 섭씨 35도 이상인 상태가 2일 이상 지속할 때 발령된다.
한낮인 오후 1시에 시작하는 퓨처스리그 경기는 여러 차례 폭염으로 취소된 적이 있지만, 아직까지 1군 경기가 더위로 열리지 않은 적은 없다. 1군 경기는 평일 오후 6시 30분에 시작되고, 혹서기인 7월과 8월에는 주말 경기도 모두 오후 5시 혹은 6시에 시작하기 때문이다.
더위를 이유로 1군 경기를 취소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KBO 관계자는 "폭염 관련 대책은 계속 고민하고 검토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당일이나 하루 전에 경기 일정을 갑자기 취소하기는 어렵다"며 "입장권 판매나 TV 중계 문제, 각 구장별 상태 등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다"고 설명했다. 시즌 초반 경기 취소와 달리 한여름 경기 취소는 순위 싸움에 한창 민감한 각 팀의 경기 일정이나 향후 일정 재편성에도 영향을 준다.
현장에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당시 A 감독은 "경기 개시 시간을 조금 늦추는 것까지는 고려해볼 수 있겠지만, 경기 취소는 옳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야구는 축구나 농구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종목이 아니다. 매일 경기를 치른다는 게 힘든 부분이 있지만, 훈련량 조절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본다"며 "폭염 취소보다 원정 라커룸 환경 개선에 더 신경을 쓰는 게 맞는 것 같다"고 강조했다.
B 감독은 아예 경기 시작 시간을 늦추는 안에 대해서도 반대 의견을 냈다. "어차피 경기가 끝난 뒤 밖으로 나가도 아스팔트에서 열기가 훅 올라온다. 시간을 조금 늦춘다고 큰 효과는 볼 것 같지는 않다"는 이유다. C 감독도 "경기를 늦게 시작하면 그만큼 끝나는 시간도 늦어진다. 야구장을 찾은 팬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더 불편해진다"고 지적했다.
#에어컨을 부탁해
많은 감독과 선수들은 "여름에는 차라리 원정 경기를 많이 하는 게 낫다"고 입을 모은다. 1군 선수단은 대부분 시설 좋은 특급 호텔을 원정 숙소로 사용한다. 당연히 방마다 에어컨 시설이 잘 구비돼 있다. 한 선수는 "집에 가면 방마다 에어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전력과 전기요금을 아끼기 위해 웬만큼 덥지 않으면 에어컨을 잘 틀지 않는다"며 "숙소에서는 눈치 보지 않고 에어컨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한 감독도 "선수들도 집에서는 아무래도 아이들부터 집안일까지 신경 써야 할 일이 많다"며 "원정경기에서는 시원한 숙소에서 체력을 세이브하고 휴식에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귀띔했다.
물론 룸메이트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한 베테랑 선수는 땀을 많이 흘리고 더위에 약해 잠자리에 들 때도 에어컨을 꼭 틀어놓아야 잠이 잘 오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신인 시절 룸메이트였던 선배 선수는 반대로 "에어컨을 켜고 자면 춥다"며 꼭 끄고 자야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이 선수는 "한여름 밤에 더워 죽겠는데 선배 몰래 에어컨을 켤 수도 없어서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 잤다"며 "요즘은 우리 팀도, 다른 팀도 원정 숙소에서 1인 1실이 보편화돼 정말 좋다"고 웃어 보였다.
지금은 대부분 야구장이 원정팀 라커룸 시설을 크게 개선했지만, 과거에는 지방의 한 구장에서 에어컨으로 인한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필이면 가장 더운 시기에 원정팀 라커룸의 에어컨이 고장난 탓이다. 당시 원정을 왔던 D 팀 선수들은 당연히 아우성을 쳤다. D 팀 관계자들도 E 팀에 거세게 항의했다.
그러나 E 팀은 "야구장 에어컨은 구단이 아니라 야구장을 관리하는 시설관리소의 소관이다. 시청에 수리를 요청했지만 아직 응답이 없다"고 말하면서 책임을 미뤘다. 분개한 D 팀 관계자들은 "다음에 E 팀이 우리 구장에 올 때는 원정 팀 라커룸과 식당 에어컨을 모두 꺼버리겠다"고 남몰래 다짐하기도 했다.
D 팀은 결국 인근 전자제품 대리점에서 최대한 큰 사이즈의 선풍기를 몇 대 구입해 와 임시방편으로 사용했다. 또 E 팀이 뒤늦게 3연전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구단 자비로 에어컨을 수리해주면서 추가 '보복'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D 팀은 "이 선풍기는 우리 재산"이라며 운반하기도 힘든 대형 선풍기들을 깨끗하게 챙겨서 B 팀의 구장을 떠났다.
#대나무발과 양배추 해프닝
KBO리그에는 '더위 지옥'이라는 악명을 떨쳤던 '폭염 야구장'의 전설이 존재한다. 삼성이 프로야구 원년인 1982~2015년 무려 34년간 홈구장으로 썼던 대구 시민운동장 야구장이다. 분지에 위치한 대구는 가뜩이나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라는 별명까지 붙은 지역. 게다가 시민운동장 야구장에 깔린 인조잔디에 그라운드에서 올라오는 복사열까지 합해지면 그야말로 '습식 사우나'가 따로 없었다. 많은 야구인은 삼성이 전통적으로 여름에 강했던 이유로 바로 무더위를 꼽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대구 홈구장의 더위에 익숙한 삼성 선수들에 비해 원정팀들은 대구 경기 적응이 어렵고, 반대로 다른 원정 구장은 대구에 비해 덜 더우니 삼성 선수들에게 오히려 편하게 느껴진다"는 얘기였다. 삼성 선수들조차 이 해석에 고개를 끄덕일 만큼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이 때문에 더블헤더가 종종 열리던 1980년대 후반 대구구장 더그아웃에는 대나무로 만든 발까지 등장했다는 후문이다. 안 그래도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더운 데다 원정팀 더그아웃에는 홈팀보다 두세 배 많은 햇빛이 쏟아진 탓이다.
당시 이틀 연속 더블헤더 일정이 잡혀 있던 빙그레 프런트는 선수들의 더위를 조금이라도 식히기 위해 '대나무 발'이라는 묘수를 냈다. 고심 끝에 인근 시장에서 거대한 대나무 발을 구입해 경기 전 훈련이 한창인 더그아웃 앞에 늘어뜨린 것이다. 감독의 시야를 가리고 선수들의 동선이 불편해진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거둬들였지만, 경기력 향상을 위한 프런트의 노력은 모두 높이 샀다는 후문이다.
삼성이 2016년부터 사용하고 있는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는 이전 대구구장과 비교하면 '천국' 수준이다. 메이저리그식 최신 시설을 갖추고 있는 데다 천연잔디라 지열이 덜 올라온다. 야구장 주변도 시원하게 트여 있어 이전 구장에 비해 바람도 잘 통한다. 무엇보다 더그아웃과 관중석 복도에 미스트 노즐이 설치돼 있다. 여름이면 안개처럼 물이 분사돼 열기를 식혀준다. 삼성의 한 코치는 "너무 더울 때는 그 안의 물마저도 가열돼 '미지근한' 물안개가 나오곤 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귀띔했다.
또 하나 더위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에피소드는 은퇴한 투수 박명환의 '양배추 사건'이다. 박명환은 땀이 많은 체질인 데다 한때 갑상선 기능 항진증을 앓아 유독 무더위에 약했다. 머리에서 땀이 너무 많이 흐르면서 시야까지 가려 투구에도 지장을 받기 일쑤였다. 안타까워하던 아내가 남편을 도울 방법을 찾다가 "양배추가 머리 위 열을 식히는 데 효과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2004시즌 중반부터 남편이 선발 등판하는 날이면 손수 손질한 양배추를 아이스박스에 넣어 챙겨 주기 시작했다. 박명환도 이닝이 끝날 때마다 얼음물 안에 넣어 뒀던 새 양배춧잎을 모자 속에 넣고 공을 던지곤 했다.
하지만 2005년 6월 19일 잠실 한화전에서 공을 던지다 모자가 벗겨지면서 그 안에 넣어뒀던 양배추잎 한 장이 마운드로 떨어진 게 문제였다. 예기치 못한 물체의 등장에 단숨에 '박명환의 양배추'는 야구계의 화제가 됐다. 곧바로 KBO 규칙위원회도 열렸다. 모자 속의 양배추가 '투수가 이물질을 몸에 붙이거나 지니고 있을 때 퇴장시킬 수 있다'는 야구규칙에 해당하는지를 가리기 위해서였다. 결국 "양배추는 투수가 던지는 공의 변화에 영향을 주는 물체로 볼 수 없지만, 투구 도중 이물질이 떨어지는 것은 타자의 타격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으니 금지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박명환은 이후 양배추 사용을 중단했다.
물론 당시 박명환의 양배추 사용을 '부정행위'라고 진지하게 손가락질한 이는 없었다. 상대팀인 한화조차 유쾌하게 웃어 넘겼고, 야구팬들에게도 색다른 추억을 안긴 해프닝으로 남았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