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법상 ‘공동행위’ 요건 준수 않았다고 판단…해운사들 행정소송 본격화 속 ‘친기업’ 한기정 후보자 기대도
공정위는 지난 1월 한국-동남아시아 수출·입 항로에서 총 120차례 운임을 담합한 23개 해운사에 시정명령과 과징금 총 962억 원을 부과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이들 해운사들은 2003년 12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총 541차례의 회합을 가지면서 기본운임 최저 수준, 기본운임 인상, 각종 부대 운임 도입 및 인상, 대형 화주에 대한 투찰가 등을 총체적으로 합의했다. 특히 한국 업체들끼리는 중립위원회를 통해 운임 감사를 실시하고, 합의를 위반한 업체에게는 벌과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이들은 다른 해운사의 화물을 서로 침탈하지 않기로 하고, 합의 운임을 수용하지 않는 화주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선적을 거부하기까지 했다.
공정위는 이어 지난 6월 한국-일본 항로에서 운임을 합의한 15개 해운사에 시정명령과 과징금 총 800억 원을 부과하고, 한국-중국 항로에서 운임을 합의한 27개 해운사에는 시정명령을 내렸다. 동남아시아 항로와 일본 항로에서 과징금을 부과 받은 업체는 HMM, SM상선, 장금상선, 팬오션, 흥아라인, 고려해운 등으로 국내 해운업계를 선도하는 기업들이다.
해운법에 따르면 해운업체들의 공동행위는 법적으로 허용된다. 해운사들은 업계 발전을 위해 법적으로 허용되는 범위에서 공동행위를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공정위는 해운업체들이 해운법상 신고와 협의 요건을 준수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해운법상 공동행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공동행위 후 30일 이내에 해양수산부 장관에게 신고 △신고 전에 합의된 운송 조건에 대해 화주 단체와 충분한 정보 교환·협의 등의 조건을 지켜야 한다.
공정위 발표 직후 해운업계는 반발했다. 한국해운협회는 “해운 기업들은 해양수산부 지도감독과 해운법에 따라 지난 40년간 절차를 준수하며 공동행위를 펼쳐왔는 데도 절차상 흠결을 빌미로 부당공동 행위자로 낙인찍혔다”며 “절차상 흠결이 있더라도 해운사들의 공동행위를 허용하는 해운법의 취지가 훼손돼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심지어 같은 정부 부처인 해양수산부도 설명자료를 통해 “전혀 문제가 없었던 공동행위에 대해 정부나 화주의 요청이 없음에도 자발적으로 신고했어야 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며 비상식적”이라고 비판했다.
해운사들은 정식으로 공정위에 이의를 제기했다. 한 해운사 관계자는 “해당 공동행위는 과당 경쟁을 방지하고 운임 안정화 취지에 부합하며 해양수산부가 공동행위의 해운법상 적법요건에 문제가 없었다고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점 등을 종합하면 공정거래법 적용 제외 대상이라고 볼 수 있다”며 “업계 경쟁이 실질적으로 제한됐다고 보기 어렵고, 효율성 증대 효과를 고려해야 한다”고 전했다.
심지어 일부 해운사들은 업체들 간 운임 합의 내용을 포함한 ‘운임회복’을 해양수산부에 신고한 바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해운사 관계자는 “18차례에 걸쳐 해양수산부 장관에게 신고했다”며 “해양수산부도 해당 공동행위에 대해 별다른 제한을 가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일요신문 취재 결과 공정위가 최근 한국-동남아시아 항로와 관련한 해운사들의 이의제기를 모두 기각한 것으로 확인됐다. 공정위는 해운사들이 해양수산부에 신고한 ‘운임회복’과 해운사들이 실제로 시행한 ‘최저운임 합의’는 그 개념이 다르다고 판단했다. 운임회복은 일정한 날짜에 각자의 운임에서 일정한 금액만큼 인상하는 것이고, 최저운임은 일정한 날짜에 적용할 특정한 최저운임 값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공정위 측은 “운임회복과 최저운임은 서로 다른 운임 인상 방식이며 해운사들은 최저운임을 합의했음에도 운임회복으로 신고했다”며 “(이번 담합은) 경쟁 관계에 있는 해운사 간 운임을 결정·유지 또는 변경하는 행위로서 그 행위의 성격상 경쟁제한 효과만 발생시키는 것이 명백하다”고 설명했다.
해운사들은 한국해운협회 주도로 한국-동남아시아 항로 관련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이와 관련, 한국해운협회 관계자는 “최근 서울고등법원에 한국-동남아시아 항로 관련해 정식으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며 “한국-일본 항로 관련해서는 향후 계획을 논의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한국해운협회에 따르면 해운사들은 아직 한국-일본 항로 관련한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동남아시아 항로 관련 이의제기가 기각됐으므로 일본 항로 관련 이의제기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8월 18일 공정거래위원장 후보로 한기정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지명하면서 반전을 기대하는 시각도 있다. 한기정 후보자는 공정위원장으로는 흔치 않게 친기업 성향을 보이는 인물이므로 기업들의 입장을 보다 많이 반영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한 후보자는 지난 8월 19일에도 “불필요한 규제는 과감하게 혁신을 통해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해운업계에서는 공정위가 해외 업체에도 과징금을 부과해 외교 문제로 불거질 가능성까지 제기한다. 공정위도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의식해 한국-중국 항로 담합 관련해서는 과징금 없이 시정명령만 내린 것 아니냐는 뒷말이 나온다.
논란이 불거지자 조홍선 공정위 카르텔조사국장은 지난 6월 중국 항로 관련해서 시정명령만 내린 이유에 대해 “한국과 중국은 1993년 운임협정을 맺고, 매년 해운회담을 개최해 정부 간 공급량을 제한하고 있다”며 “공급량을 제한해 왔다는 점에서 경쟁제한성이 있고, 경쟁이 제한된 상태에서 운임 담합을 했기 때문에 담합으로 발생하는 경쟁제한 효과나 파급효과 등이 상대적으로 미미했다”고 설명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